주간 영화

2021.07.23-2021.07.29

by 드플레

<피닉스(Phoenix)> (크리스티안 페촐트, 2014)


<피닉스>에선 1938년, 1944년 등과 같이 시공간을 나타내는 표지가 각본상의 대사로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그 흔한 설정 쇼트를 동원하지 않은 채 구체적인 시공간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한다. 페촐트의 영화에선 시공간이 모호한 속성을 띠는 경우가 많은데, <피닉스>도 이런 맥락에서 <트랜짓>과 크게 다르지 않다. 얼굴의 상흔을 지워낸 뒤 새로운 삶을 살아내야만 하는 넬리는 잃었던 실존적 지위를 회복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고, 이 영화가 품은 모호한 시공간은 그러한 넬리의 존재적인 유령성을 더욱 가속화한다.


지금의 넬리는 예전의 넬리와 같아질 수 없다. 넬리의 얼굴은 복원되었으나 완벽하게 재현되지는 않았고, 남편은 자신을 넬리로 여기지 않는다. 넬리가 감각하는 자신은 온전한 자신이 아닌데, 그녀는 이 실존적 위기를 가면극을 통해 극복하고자 한다. <피닉스>를 지탱하는 건, 니나 호스의 탁월한 연기로 구현된 이 넬리라는 인물의 감정선인데, 호스는 이 영화에서 정체성에 균열이 생긴 나, 내가 연기하는 과거의 나, 절대로 지위를 회복할 수 없는 존재 너머의 나를 모호하게 오가는 다층적인 연기를 훌륭하게 선보인다.


넬리를 타인으로 오인한 조니는 그녀가 자신의 아내를 모사하길 바라는데, 넬리는 여전히 과거의 잔상에 사로잡힌다. 그녀는 지금 이 순간 현존하는 나를 그대로 감각하는 대신, 조니의 기억에 남은 넬리를 자신의 과거와 동일시하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이 오류에서 비롯된 자아 재구성의 뒤틀린 시도가, 모호한 넬리의 정체성을 유령으로 가공하는 데 탄력을 부여한다. 결국 <피닉스>는 부활(불사조)의 서사가 아니라, 내가 어딘지 찾을 수 없어 배회하기만 하고 잔상에만 집착하는 자의 말로를 표상한다는 점에서, 섬뜩한 소멸에 가까운 서사다. 그래서 넬리는 프레임 바깥으로 빠져나가는데, 카메라는 그 모습을 온전히 잡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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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닉스(Phoenix)>



<더 게임(The Game)> (데이빗 핀처, 1997)


인물은 자신이 어떤 일을 겪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홀린 듯 게임을 지속한다. 불가해한 일을 겪는 인물의 심리에 이입할 수 있도록 시점 쇼트를 배치하는 전략이나 전개 상의 디테일한 요소들을 영리하게 활용하는 방식 등에선 핀처의 섬세한 연출력이 빛을 발하지만, 어쩐지 <더 게임>은 찜찜한 구석이 많아 보인다. 관객은 극 중 인물과 함께 혼란에 빠진 채 끝을 모르는 장난을 계속해서 마주한다. 이 거대한 이벤트가 니콜라스의 삶을 성찰하게 만들 수는 있다. 하지만 인물의 여정에 쉽사리 동조하고 싶지는 않다. 한 남자의 일상에 비일상적인 경험들이 침투하는 서사 구조 자체는 매력적이지만, 영화는 게임의 정체를 단순히 처리해버리면서 관객의 다층적인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다. 결국 이 영화는 그저 관객을 교란하기 위한 트릭에만 몰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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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게임(The Game)>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 (변성현, 2016)


플롯을 재치 있게 꼬는 시도, 리드미컬하게 커트되는 장면들, 조명과 색감의 세련된 배치만 보더라도 촬영과 편집에 공을 들인 느낌을 준다. 비록 여러 측면에서 기존의 영화들을 많이 참고한 것처럼 보이지만, 최소한의 성의는 보이기 때문에 묘하게 싫지는 않다. 기시감을 지워내기 위해 이리저리 비틀기를 시도하면서 나름대로 고유성을 획득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컨버터블 카에 누워 있는 인물을 직부감으로 내려다보거나, 유리창과 벽 너머에서 여러 겹의 프레임을 구축한 채 인물들을 따라가는 카메라의 시선. 이 영화는 필연적이지 않은 상황에서도 과감히 위트 있는 스타일을 선보이겠다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서사적인 명분도 있어 보이지만 한편으론 겉멋이 아닐까 싶기도 한데, 이는 여러 레퍼런스가 들러붙은 장르 영화의 틀 속에서는 온전히 극복하기 힘든 지점이 아닐까 싶다. 그래도 매혹적인 건 사실이니, 묘한 매력을 지닌 영화임은 확실하다.


사실 극을 이끄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는 재호와 현수의 미묘한 감정선인데, 단순 우정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두 남자 사이에서 감지되는 텐션감, 분위기가 좀처럼 명확히 와닿지 않는 느낌도 들었다. 다시 보게 된다면 대사와 대사 사이, 시선과 시선 사이의 여백을 응시할 때 비로소 두 사람의 감정을 음미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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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



<사라진 시간> (정진영, 2019)


영화의 내용 일부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생생하게 남아 있다. 기억과 감각 모두 나의 존재를 확인시켜 주지만, 지금의 나는 내가 아니다. 아니라고 판단하고 싶은 건가, 실제로 아닌 건가. 꿈이라면 벗어나면 될 터인데, 꿈은 아닌 듯하다. <사라진 시간>은 원인을 규명하지 않는다. 개체가 직면하는 불가해한 순간을 나열하는 데 집중한다. 영화는 한정된 에피소드들만을 엮어 내지만, 분명 그들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나를 나로 온전히 감각하지 못하는 삶을 살아내야만 하는 존재들의 이야기 말이다. 윤회와 타임 루프로 둘러싸인 모호하고 신비한 영역의 어딘가를 맴도는 인물들의 사연들이 펼쳐지는 와중에, 영화는 관객에게 전하고 싶은 말 또한 놓치지 않는다. 나 자신이 부정당하는 낯선 경험이 반복되는 가운데, 인간은 이중적이고 모순된 모습을 보여준다. 즉, 떨쳐내지 못하기도 하고 현재를 수용하기도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먼저 발화되는 "참 좋다"와 나중에 발화되는 "참 좋다"가 묘하게 따스함을 안겨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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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시간>



<우리들> (윤가은, 2015)


아이들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이야기다. 초등학생들의 갈등 관계를 중첩해가는 <우리들>은 봉합 대신 확장에 집중한다. 윤가은의 <우리들>은 매우 정교하게 구축된 가공의 이야기이지만, 그 자체로 텁텁한 현실감을 짙게 환기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관객이 <우리들>을 통해 현실을 사유할 수 있는 이유는, 첫째로 예상치 못한 크고 작은 갈등이 우연히 중첩되어 간다는 점 때문이고 둘째로는 사춘기를 앞둔 초등학생 소녀들만의 이야기를 넘어서 세대를 넘나들며 구사하는 영화의 확장적인 화법 때문이다. 성장과 회복의 가치를 말하기보단, 균열을 응시한 뒤 고개를 돌리지 않는 태도를 지향하려는 영화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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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우리, 둘(Deux)> (필리포 메네게티, 2019)


제목처럼 두 사람에게 오롯이 집중하는 영화지만, 어쩐지 영화의 정체성을 흐릿하게 만드는 요소가 있다. 영화는 두 동성애자를 둘러싼 외부의 시선을 폭력적으로 설정한다. 즉, 주변 사람들은 두 사람의 관계를 방해하는 장애물로 묘사된다. 그 어떤 어려움에도 무너지지 않는 두 사람의 사랑을 부각하려는 장치라는 건 알겠으나 이러한 설정의 활용만 놓고 보자면, 영화가 결국 무엇에 집중하고 싶은 건지 모호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납득하기 어렵다.


이 의문은 영화의 전략과 연결된다. 즉, 이 영화에는 의도적으로 부각하는 갈등 상황이 존재한다. 만약 이 영화가 그저 동성애자가 사회적으로 겪는 어려움을 거칠게 나열하는 데 집중했다면, 나는 영화가 기승전결의 서사가 아닌, 관찰과 응시를 바탕으로 한 파편화된 서사를 구축한다고 여기면서 수긍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 둘>은 기본적으로 두 사람의 사랑을 메인 테마로 삼고 있으며, 그 사랑의 서사적 굴곡을 심화하기 위해 갈등 상황을 몇몇 지점에서 부각하고 있다. 따라서, 이 영화는 부각하는 지점에 관해 충분한 보충 설명이 필요하다. 즉 영화는 마도의 고뇌를 묘사하고 있지만, 서사의 무게추를 어느 순간 마도로부터 니나에게 옮겨버린 뒤, 마도가 겪었던 어려움에 관해 전혀 보충하지 않은 채 니나의 서사를 쌓아간다. 이 영화는 그래서 전략이 불분명하다.


그럼에도 이 영화에는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몇몇 순간들이 존재한다. 이는 앞서 말한 두 사람의 사랑을 묘사하는 방식에서 비롯된다. 영화는 완결된 지점으로 가려는 대신, 두 사람이 처음 춤을 췄던 그 시공간의 무드를 환기하면서 연인의 세계와 바깥 세계를 분리한다. 이는 곧 니나의 집과 집 바깥의 공간 대비로 형상화되며, 더 나아가 니나의 집 안에서 춤추는 두 사람이 과거를 회상하듯 그 시절의 향수를 지금 이 자리로 불러내는 듯한 낭만적인 연출을 통해서도 강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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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둘(Deux)>



<초여름(麥秋)> (오즈 야스지로, 1951)


오즈의 카메라는 공간을 구획하고, 인물은 프레임 안팎으로 들어왔다 나갔다를 반복한다. 그의 영화를 처음 봤지만, 단번에 어떤 영화를 지향하는지 감이 잡혔다. 후기 오즈의 영화들에선 스타일이 정립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초여름>은 특별한 갈등 없이 일상을 나열하지만, 겹겹이 쌓여가는 사소한 순간들 가운데 어느 순간 균열이 보이기 시작한다. 노리코의 말처럼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게 우리의 삶이라면, 그저 인간은 늘 그 자리에 있는 자연을 보면서 막연히 기대도 하고 걱정도 하고, 늘 복잡하게 생각에 빠진다. 그래도 지금까지 살아왔으니, 앞으로도 어떻게든 살 수 있으리라는 희망과 여전히 한구석에 자리한 불안함이 공존한다. 가족, 세대, 일상을 머금은 이야기들. 이 포근하고 무심하다가도 어느샌가 달콤쌉쌀한 기운이 감도는 오즈스러운 스토리텔링이 막연히 좋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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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여름(麥秋)>



<천국의 나날들(Days Of Heaven)> (테렌스 맬릭, 1978)


자연광을 벗 삼아 촬영된 생생한 자연의 이미지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어쩌면 인간과 자연을 대비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접근이었을지도 모른다. 영화 속에서, 대자연 속 인간은 검은 실루엣으로만 드러나거나 광활한 롱 쇼트에 갇혀 자그마한 형상으로 감지된다. 이런 무대에서 인간의 탐욕과 모순을 포커싱할 때 그 극단성이 극대화되는 듯 보인다. 정착할 수 없는 이들을 붙잡지 않겠노라 다짐하는 롱 쇼트들 또한 인상적이다. 결국 '천국의 나날들'은 각자에게 다른 의미로 작용한다. 빌에게 천국 같은 때는 언제이며, 애비에게 천국 같은 때는 언제인가. 이들이 왜 방랑하고 정착할 수 없는지 영화는 설명하지 않는다. 그저 바라만 볼 뿐이다. 그런 점에서, 어린 동생의 내레이션은 빌과 애비 혹은 농장주의 심리에 이입할 여지를 줄이고 있기도 하다. 방랑으로 회귀하는 관성, 노매드의 삶을 다룬다는 점에선 <노매드랜드>가 단박에 떠오르기도 한다. 물론 두 영화는 소재와 촬영 등에서 몇몇의 공통점만이 있을 뿐(클로이 자오는 테렌스 맬릭에게 영향을 받은 것처럼 보인다), 매우 다른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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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의 나날들(Days Of Heaven)>



<모가디슈> (류승완, 2020)


재밌는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강대진이 공항에 도착해 한 대사를 오랫동안 기다리는데, 택시 기사 중 하나가 다른 관광객을 태우지 않고 끝까지 남아 강대진을 손님으로 받고자 한다. 결국 오랜 기다림에 지친 강대진이 택시를 타려는 순간, 저 멀리 어떤 차가 대진을 태우러 온다. 그런데 어쩐지 대진은 차를 타지 못하게 되고, 택시를 타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사실 이 신은 언뜻 보면 서사적으로 아예 필요가 없다. 그런데 굳이 이 장면을 배치한 이유가 있을까? 있다. 강대진은 이 상황에서 선택할 수 있었다. 그는 택시를 안 타기로 결정했고, 그 결정을 따랐다. 그런데 정작 택시를 타지 않으면 안 될 상황에 처하자, 어쩔 수 없이 택시를 탄다. 그러니까 이 장면은 후반부 인물들의 선택을 가볍게 요약해놓은 프롤로그에 가깝다. 자유롭게 선택해야 할 때 생기는 딜레마가 아닌, 생존을 위해서 강요된 선택지로 향해야 하는 상황 말이다. <모가디슈>는 비록 철저한 상업영화지만, 밀도 있는 지점들이 제법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소홀히 처리된 구간들이 아쉬움을 키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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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가디슈>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IM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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