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7.30-2021.08.05
<락큰롤라>의 배배 꼬인 스토리텔링은 그 자체로 영화를 특징짓는 데 기여한다. 하지만 <록 스탁...>, <스내치>와 다르게, 이 영화는 목표 지점이 너무나 많다. 다시 말하면, 가이 리치의 특유의 이런 스타일이 담긴(<록 스탁...>의 아류들) 영화는 감독이 염두에 둔 목적지가 존재한다. 즉, 부산스럽게 여러 갈래로 뚫어놓았던 길을 어느 순간 하나로 재편하여 종착지로 가야만 한다. 그게 <록 스탁...>이었고, 조금 변형된 영화가 <스내치>였다.
하지만 <락큰롤라>는 제목에서도 보이듯, 목표 지점이 뚜렷하지 않다. 이 영화의 '그림'은 나름 전작들의 '총 두 정'이나 '다이아몬드'의 지위를 부여받는 듯 보이나, 리치는 자신이 그림의 종착지를 설정한 이유를 굳이 어필하지 않는다(각본 또한 리치가 썼으니 그에겐 선택지가 있었다). 게다가 무리해서 조니 퀴드의 사연을 엮어내고, 인물들의 관계를 계속해서 변화시키고, 진실을 밝혀내는 등 영화 속엔 생각보다 인과관계로 엮여 있지 않은 갈래 서사들이 산재해 있다. 일부러 파편화된 서사 구조를 극대화하려는 <락큰롤라>는 그래서 방황한다. 생판 남남처럼 보이던 이들을 한데 묶어서 판을 키우는 각본이나, 특유의 교차편집 등 영화의 때깔은 분명 매력이 있다. 하지만 이 영화는 목적지로 향해가는 앞선 두 편의 영화와 다른 시도를 하려다가, 스스로가 정체성을 혼동하고야 만다.
영화사 로고가 새겨진 거리의 바닥을 비출 때부터, 영화는 매끈한 스타일을 자랑하는 듯 보인다. 하지만 세련된 미장센과 편집술의 분투, 배우들의 매력적인 퍼포먼스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도통 갈피를 잡지 못한다. 가이 리치는 원작을 토대로 영화화하는 작업과 본인의 스타일을 녹여내는 작업을 그럴싸하게 배합하는 데에 실패한다. 백번 양보해서 방황은 할 수 있다 쳐도, 셜록 홈즈가 난제를 풀어내는 비교적 심심한 에피소드를 굳이 두 시간 분량의 장편 영화로 만들어야 했는지에 관해선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즉, 방대한 서사처럼 보여도, 실은 무리하게 규모를 늘려놓은 것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사람들을 현혹하는 마법이나 주술 따위는 존재하지 않고, 오로지 합리적인 사고만으로 모든 걸 설명할 수 있다는 일종의 교훈(?)은 애써 피력할 이유조차 없어 보인다.
전작보다 더욱 세련된 감각을 지향하고 싶어 하는 감독의 고집스러운 면은 잘 와닿았지만, 지지하고 싶지는 않다. 특정 지점에서 슬로 모션, 교차 편집 등이 강조되는 상황을 보고 있으면, 잘 짜인 유기물로서의 영화가 아닌, 피상적인 기법을 펼쳐놓은 영상물처럼만 느껴진다. 원작 고증이야 둘째치고, 영화를 이끄는 캐릭터와 서사의 배합 등의 요소가 전작에 이어 여전히 의문만을 남긴다. 가이 리치의 영화는 잔망스럽고 섹시한 영화 혹은 과욕과 방황이 한꺼번에 느껴지는 영화로 나뉘는데, 이 영화는 전자를 추구하려는 지독한 후자와도 같은 영화다.
<그린 나이트>는 영웅을 탄생시키려고 하지 않는다. 이 게임은 녹색 기사의 요구가 이행될 때 끝난다. 물론 영화는 그 끝을 정확히 묘사하지 않지만, 가웨인은 결국 실존에 관한 물음에 직면한다. 그는 무엇을 위해 집을 떠났고, 무엇을 찾고자 했으며, 무엇을 원했기에 녹색 기사와의 만남을 고대하였는가. 녹색 기사는 한결같다. 너는 내가 제안한 게임에 응했고, 나는 내가 제안한 방식대로 게임의 룰을 지킬뿐이라고 말한다. 가웨인의 선택이 잘못된 것이었을까? 중요한 건, 선택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문제가 아니다. 이 여정은 가웨인에게, 관객에게 무슨 의미로 작용할까. 한낱 허무주의로 귀결되는 걸지도 모른다.
<그린 나이트>는 시공간을 함부로 특징짓지 않는 듯 보인다. 검과 갑주를 두른 병사들, 왕과 왕비가 참석한 연회가 열리는 장면들을 보고 있으면, 분명 영화는 중세의 어딘가를 머금은 듯 보이나, 사실 영화는 명확한 시공간적 표지를 드러낸 적이 없다(버젓이 등장하는 '크리스마스', '1년 후' 등의 표현말고 무대가 되는 배경 말이다). 즉, 이 영화의 무대는 어딘가에 존재할 법한 가상 세계로 보이기도 한다. 그렇다면 아서 왕 전설과 얽힌 이야기를 각색한 <그린 나이트>는 고전이 현대에도 적용되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하나의 훌륭한 텍스트로 기능한다.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는 폼 나게 작전에 성공할 것만 같던 팀이 산산조각 나는 장면으로 포문을 연다. 영화는 스스로가 통념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몸부림을 선사한다. 통념이나 예측들, 이를테면 관객의 전형적인 기대 심리 말이다. 충격적인 오프닝부터 관객은 영화의 화법에 신선하다고 느낄지도 모르겠다(나도 그랬다). 영화는 계속해서, 일단 살육을 저질렀는데 알고 보니 불필요했다든가, 기껏 작전을 짜놨는데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졌다든가 하는 순간들을 배치해서 관객의 기대를 계속해서 무너뜨린다. 클라이막스를 처리하는 방식(우연한 폭탄의 연쇄 반응 등) 또한 터무니없어 보이지만, 영화가 기획해온 구간들을 떠올린다면, 수용하는 데 큰 무리는 없다. 다만 통념을 뒤엎으며 탈-메인스트림의 기조를 주장하던 영화는 막판에 결국 이럴 수밖에 없었다는 식으로 안전한 휴머니즘으로 복귀한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건 알지만, 이 선택으로 인해 영화가 주장하던 바가 희석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결국 감각적인 미장센, 살육을 다루는 영화의 거친 질감 등만이 잔상처럼 남는다.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