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8.13-2021.08.19
관계와 낭만에 관한 영화다. 내겐 알렉스의 기행이 순수해 보였다. 미셸과 함께하는 다리 위의 삶을 포기할 수 없다는 본능적인 욕망, 그 티없는 충동에서 비롯된 행동들 말이다. 까락스는 영화 내내 알렉스(혹은 드니 라방)를 향한 애정과 연민을 줄기차게 드러낸다. 그래서 이 영화는 솔직하게 하고 싶은 말을 늘어놓는 듯 보인다. 나 또한 그런 점이 영화를 가치 있게 만든다고 느꼈다. 세상과 분리된 (공사 중인) 퐁네프는 알렉스에겐 어떤 공간이었나, 미셸에겐 어떤 공간이었나. 비록 두 사람이 각각 지향하는 사랑의 형태는 다를지언정 함께 하는 시간만큼은 낭만과 순수로 가득하다는 점을 곱씹어 보게 된다.
P.S. 사프디 형제가 <헤븐 노우즈 왓>을 만들면서 이 영화를 참고했을까?
능력을 얻게 된 남자는 세상을 등지려 한다. 마침내 그가 세상에 힘을 행사하려 들 때, 그 능력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가. <데드존>은 정의를 실현하는 영웅의 탄생기가 아니다. <데드존>의 초인(혹은 기인) 자니 스미스는 사회의 안전을 염려한다. 주치의에게 질문을 던지는 신을 통해 그 염려는 실천으로 발전한다. 자니의 행동은 예정된 미래에 균열을 가할 수는 있지만, 현재의 세상에서 그는 철저하게 고립될 수밖에 없다. 크로넨버그는 이 인물이 어떤 지점에서 변모하고 고통을 받는지 섬세하게 조명하면서 영화의 호흡을 재단한다.
P.S. 크로넨버그 영화에선 실내를 촬영할 때 대개 카메라의 움직임(주로 패닝)이 상당히 효율적이다. 굳이 그런 스타일을 고집하는 이유가 있는지 조금 더 고민해 보고 싶다.
감독이 이 영화에서 천착하는 소재 자체는 명확하게 감지된다. 레픈은 순수함을 말하고 싶어 한다. 지옥에서 피어나는 순수함 말이다. 내가 본 그의 영화는 <드라이브>와 <온리 갓 포기브스> 단 두 편이지만, 두 편만으로도 특유의 인장이 묻어 나온다는 점 또한 애써 피력할 필요가 없어 보인다. 레픈은 솔직한 영화를 만들지만, <온리 갓 포기브스>와 같은 방식은 지지하기 어렵다. 영화의 미학적인 측면은 세련된 질감과 치밀한 구성에 힘입어 강력한 에너지를 발산한다. 그런데 이미지와 사운드의 전달력을 극대화하는 몇몇 구간들이 감각을 자극하는 데에만 성공할 뿐, 수용자의 능동성을 제한한다는 점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게다가 레픈의 영화는 은유로 가득하다. 이 해석의 루트가 비교적 명확하게 설정되어 있다는 점 또한 내 취향과는 맞지 않는다. <온리 갓 포기브스>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차용한다. 줄리안은 결여와 상실을 떠안은 채 무언가를 갈구하는 인물처럼 보인다. 줄리안의 행적을 통해 구체화되는 요소들이 곧 레픈이 매달리는 테마다.
P.S. 라이언 고슬링이 레픈과 계속 작업하는 이유가 궁금해지기도 한다.
열심히 패닝하는 카메라를 따라가면, 관객은 문득 시간이 훌쩍 지났음을 체감할 수 있다. 비정상적인 시간의 흐름은 인물들의 노화 정도로 판가름이 나는데, 영화는 관객에게 이 시간의 경과를 '불연속적'으로 제시한다. 영화는 기이한 현상을 강렬한 시청각적 체험으로 치환하는 방식에만 신경을 곤두세운다. 이런 접근은 시간 앞에 속절없이 무너지는 인간의 무력함을 형상화한다기보다는 서스펜스 등의 장르적 쾌감만을 극대화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근데 그 쾌감마저도 영 시원치 않다.
언젠가는 죽어야만 하는 유한적 존재인 인간의 실존적 요소를 조명하는 구간이 한 군데(기억하기로는) 있다. 바로 박물관 관련업(과거)에 종사하는 여자와 보험료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미래)하는 남자가 함께 현재를 감각하는 순간이다. 문제는 이 진중한 무드가 영화의 전반적인 톤과 겉돌면서 피상적인 사유의 잔상만을 남긴다는 점이다. 게다가 불연속적으로 제시됐던 시간의 절대성(에 따른 인간의 필멸성)과 현재를 응시하는 이 구간의 촬영은 서로 어우러지지 않는다. 서사를 닫는 방식 또한 지나치게 획일화된 감상을 요구하며, 결국 방황하는 영화의 면모를 여과 없이 드러낸다는 점도 아쉽다.
데이비드 던은 초인으로 태어났으나, 범인으로 살아가길 원했다. 그는 비범한 영웅의 삶을 절대 원하지 않는다. 일상을 만끽하며 눈앞의 행복을 추구하려는 던에게 강화된 신체나 특수 능력 따위는 사치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가 망각하고 부정해 온 정체성을 깨닫고 수용하는 순간, 그의 삶엔 균열이 생긴다. 더 이상 일상을 지속할 수 없겠다는 염려도 피어난다. 샤말란은 아예 던에게 이타적이고 선한 심성까지 부여해 버린다. 따라서 던은 운명에 순응할 수밖에 없는, 강제된 영웅으로 변모한다. 따라서 던의 경우에는 '내가 왜 사람들을 위해 내 능력을 써야 하지?'라는 의문이 성립될 수 없는 걸지도 모른다.
주어진 운명에 따라, 걸어야만 하는 길을 걷게 되는 던의 내면을 자극하는 사람은 바로 엘라이자다. 엘라이자는 자신의 존재 의의를 찾기 위해 던을 찾아내려고 했다. 던을 영웅으로 만들어내야만 자신의 삶이 부정당하지 않는다. 엘라이자에게 던을 찾아내는 일은 평생 과업이자 운명이다. 엘라이자는 삶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가 끔찍한 악당이 되려고 했다. 자신과 대척점에 던이 서 있다고 가정한 뒤, 그래야만 자신이 이 세상에 나온 이유가 정당화될 수 있다고 믿었다. 악당이 없으면 영웅은 없다. 영웅이 없으면 악당도 없다. 어쩌면 대척점에 선 이분화된 구조 대신, 서로 엉겨 붙어 있는 거울과 그림자만이 존재하는 건 아닌가.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IM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