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영화
2021.08.20-2021.08.26
<꿈의 제인> (조현훈, 2016)
의지하고 싶었던 이들과의 결합은 현실이 아닌 꿈에서야 이루어지는 걸까. 과거와 현재든, 현실과 꿈이든 불분명한 건 매한가지다. 시공간을 뒤트는 <꿈의 제인>은 촬영 방식과 조명 등 미장센을 의도적으로 다르게 적용하여 경계를 넘나들고 있다. 플롯의 재배열은 인물과 인물을 연결하는 과정에 크게 기여하면서 영화를 지탱한다. 오묘하게 웅웅대는 일렉트로니카 사운드와 반복되는 소현의 내레이션 또한 영화의 특정 구간마다 특별한 무드를 생성한다. 어쩌면 이는 당연히 동반되어야만 하는 시도들이다. 사실 나는 그보다도 반복과 차이라는 요소에 끌렸다. <꿈의 제인>을 보고 난 뒤의 여운은, 여러 인물들의 관계를 감싸는 시청각적 표지의 반복과 차이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소현은 지수가 운전하는 오토바이에 탑승한 채 함께하는 순간을 만끽한다. 전자음은 몽환적인 질감을 불어넣는다. 현실에 녹아들 수 없는 소현이 만끽하는 찰나의 행복은 그렇게 몽롱한 음악을 통해서 지탱될 수 있다. 이는 초반부 제시됐던 지하철 속 소현과 제인의 투 숏과 사운드를 매개로 연결될 수 있다. 비록 꿈-현실, 제인-지수, 허구-실재로 구분될지라도, 누군가와 함께한다는 감각 자체가 음향을 통해 느슨하게 연결된다. 소현에게 필요한 건 거창한 게 아니라, 그저 함께하는 순간을 감각하는 것뿐이다. 영화는 소현의 염원에 관해서는 경계를 소거하는 듯한 모호한 접근법을 취하고 있으나, 소현이 느끼는 괴리를 다룰 때는(꿈과 현실을 분명하게 구분해야 할 때는) 아주 선명하고 생생한 방식으로 그 차이를 형상화(제인과 지수의 최후를 각각 다르게 묘사)하고 있다. 그래서 <꿈의 제인>은 마냥 감상에만 매몰되지도 않은 채 관객을 열린 사유의 장으로 이끈다.
<남편들(Husbands)> (존 카사베츠, 1970)
존 카사베츠의 영화를 볼 때면, 그가 영화 바깥의 것들을 영화 내부로 편입시키는 방식에 관해 늘 생각하게 된다. 그의 영화에선 두 가지가 충족된다. 즉흥적인 계획과 계획된 즉흥. 이 모순처럼 보이는 두 요소가 일사불란하게 줄지어 있는 영화가 바로 카사베츠의 영화다. <남편들>은 <얼굴들>의 변주처럼 보이기도 한다. 다른 영화도 그렇지만, <남편들>에서도 역시 서사성을 포기한 채 나열되는 지독한 롱테이크가 자주 발견된다. 그래서 이 영화는 몇 편의 연극이 엮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연극에서 누군가가 배역을 연기하는 행위는 그 자체로 철저한 허구일까?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가상의 인물을 연기하는 배우가 현장의 관객과 교감하는 순간만큼은 진실처럼 감각되지 않는가.
그래서 <남편들>은 <얼굴들>과 유사한 방식으로, 관객으로 하여금 연출된 진실성을 느낄 기회를 제공한다. 하지만 그 가상의 진실은 마냥 연출에만 머무르는 걸까.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게 카사베츠 영화의 묘미다. 이것이 카사베츠의 전략이라면 역시 그에게 카메라를 들고 연출하는 작업은, 삶과 분리될 수 없는 영역이다. <남편들>에서 카사베츠는 거스라는 가상의 인물을 연기하지만, 영화 속 거스는 실제 카사베츠의 분신처럼 보이기도 한다. 영화에는 실제 부인인 지나 롤랜즈(롤랜즈는 남편과 함께 작업하며 그의 영화에 꾸준히 출연해왔다)가 잠시나마 사진과 목소리로 등장한다. 또한 거스는 마지막에 아들의 이름을 부르는데, 그 이름은 닉이다. 실제 카사베츠의 아들인 닉 카사베츠가 자연스레 연상된다. 그래서 <남편들>은 현실과 허구를 동시에 점유하는 중년 가장의 일탈-회귀극이고, 카사베츠가 남긴 또 한 편의 뛰어난 연극 같은 영화(혹은 영화 같은 연극)다.
<로스트 하이웨이(Lost Highway)> (데이빗 린치, 1997)
음악은 매혹하고, 내러티브는 탈주하다가, 어느새 강렬한 이미지가 손짓하지만 끝내 관객은 길을 잃는다. 순환하는 폐쇄 회로에 갇혀 버리는 남성의 기묘한 행적을 분절적으로 해석하려 들다가는 린치의 미로에서 영영 빠져나오지 못하리라는 생각이 든다. 옹졸하게 외면하겠다는 말이 아니다. 그만큼 린치의 세계는 확고해 보이고, 관객은 그 세계를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숲이 아닌 나무들 틈에서 허우적댈 운명에 놓일 수밖에 없다. 꼬리를 확 물어버리면서 끝나는 영화의 서사 구조는 영원한 폐쇄성을 표상하는 듯 보인다. 그렇다면 과연 영화는 영화로만 남겨야만 하는 걸까. 현실과 환상을 오가는 줄타기는 오로지 영화 내부에서만 유영하고 있는 것일까?
린치에게 영화는 무엇일까. 그보다 선행되어야만 하는 질문, <로스트 하이웨이>에는 무엇이 없는가. 여기엔 현실의 질료를 스크린으로 불러내는 시도가 없다. 즉, 영화를 현실처럼 보이게 하려는 욕망이 부재한다. 또 무엇이 없는가. 실제와 허구를 얽어낼 때 발생하는 균열이 없다. 따라서 이 영화를 통해서는 환상으로 대체된 영화 이미지 이면에 자리한 현실 요소를 응시하기 힘들어 보인다. <로스트 하이웨이>는 그저 꿈과 망상과 내면을 어지럽게 질주하는 미로이자 거울이다. 이때 이 영화는 끊임없는 운동의 상태를 유지하려들 뿐, 종착지이자 목적지이길 원한 적이 없다(사실 특정 지점으로 가려고도 하지 않는다). 즉, <로스트 하이웨이>는 선언하지 않는 영화다. 그에 따라 미완의 상태로 보존된 무언가를 찾아내려는 관객들의 광기 어린 탐독이 동반될 수밖에 없다(나 역시도 그 관객 가운데 한 명이다). 하지만 나는 그 탐독을 중단하고 싶다. 이 세계는 균열을 내기 힘든 린치만의 세계고 내가 접근이랍시고 하는 일은 온전한 소화가 아닌 겉핥기에 불과하다. 과연 나는 비겁한 관객일까? 영화를 재감상할 때는 생각이 달라질까?
<프리 가이(Free Guy)> (숀 레비, 2021)
<프리 가이>는 굉장히 복잡하게 얽혀 있는 정보량을 비교적 간명하게 재단해서 관객에게 납득시킬 줄 아는 영화다. 메타버스, 오픈월드 게임(자유도가 높은 GTA 류) 산업, AI 딥 러닝 등 현대 사회를 대표하는 패러다임을 영화라는 대중 매체에 매끄럽게 녹여내는 화술은 분명 인상 깊다. 더군다나 현실의 유저가 게임에 접속한 뒤 가상 세계를 구출한다는 전개를 비틀어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게임 속 NPC에게 주체성을 부여한다는 전략은 AI의 학습이라는 서사적 연료와도 잘 부합하는 설정처럼 보인다. 게임 속 세상과 우리의 현실을 동등한 층위로 놓고 바라본다면, 이 영화 또한 소외자에 주목한다는 점에서 타자성을 구현하는 다른 현대 영화들과도 호응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서사 전개에 있어서 불필요한 구간이 포착되는 점과 '보여주어야 할' 구간을 아무렇지도 않게 대사 몇 마디로 처리하는 등 미학적인 측면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은 상당히 아쉽게 느껴진다.
<서스피션(Suspicion)> (알프레드 히치콕, 1941)
<서스피션>은 못 미더운 심정이 불신과 의심으로 확장되는 과정을 담아낸다. 몇몇 구간에선 리나의 의심을 정당화하는 듯한 조명과 편집이 동원된다. 이를테면 우유를 가져다주는 조니를 둘러싼 그림자가 생성하는 특유의 분위기 말이다. 게다가 영화 내내 조니의 표정을 주목하다 보면, 신의 전환점에 가까워질 때 그의 얼굴이 유독 미묘하게 일그러지는 순간들이 있었다. 명백히 관객의 내면과 리나의 내면을 동기화하려는 의도가 반영되어 있다고 느꼈다. 하지만 그 모든 의심들이 편향적 사고에서 비롯되었다는 단출한 맺음 방식이 제시된다. 갈등은 봉합된 듯 보이나, 리나의 심리에 스며든 채 영화를 감상하던 관객이 그 손쉬운 해소법에 선뜻 동의할 수 있을지는 살짝 의구심이 남는다.
<300> (잭 스나이더, 2007)
그래픽 노블의 질감을 성공적으로 이식한 듯 보이는 <300> 특유의 미장센은 분명 매력적이다. 액션을 연출하는 방식 또한 거침없는 쾌감을 자아낸다. 마음에 걸리는 부분들이 있다면, 오롯이 영화의 내적인 측면에 있다. 역사 왜곡과 설정 오류 등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앞서 따져보아야 할 것이 있다. 이 영화의 스파르타인들은 숭고해 보인다. 하지만 동시에 이들은 모순으로 가득한 존재다. 자유로울 권리는 선별될 수 없다. 그러나 스파르타가 군대를 통해 자유를 지켜내는 방식은 차별과 배제의 폭력으로 둘러싸인 기형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 스파르타 전사들의 무장된 정신 상태가 거침없는 액션을 곁들인 채 근사하게 가공되어야만 하는 이유가 딱히 없다. 이 영화의 호쾌한 스타일은 그 자체로는 매력을 발산하고 있으나, 어째서 채택되었는지 스스로가 그 의의를 입증하지 못한다.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IM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