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8.27-2021.09.02
핏빛으로 물드는 인상적인 도입부는 감독 특유의 스타일을 짐작할 수 있게 만든다. 사운드와 비주얼을 배합하는 연출은 판타지 설정들로 얽힌 액션 활극을 빚어내는 데에는 분명 효과적이다. 상업영화에 많은 걸 바라는 건 아니지만, <블레이드>는 규모와 깊이를 동시에 챙길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포기한다. <블레이드>에는 안티 히어로 서사를 구축하는 방식에 관한 고민이 없고, 양 집단에서 배제된 존재인 프로스트와 에릭(블레이드)의 내면을 들여다보려는 노력이 보이지 않는다. 영화의 선택을 탓하는 건 아니다. 애초에 기획부터 <블레이드>의 관심사는 자극적인 장면의 나열과 현란한 액션 시퀀스, 웨슬리 스나입스의 비주얼 요소를 극대화하는 연출을 통해 관객을 끌어모으려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레미니센스>는 자신이 어떤 영화인지 입증해내지 못한다. 근사한 착장 속에는 빈약한 뼈대가 휘청이고 있다. 굳이 정교하게 구축된 시공간적 배경은 당위를 확보하는 데 실패한다. 공들여 배치한 조명과 자연광이 반복해서 화면을 지배하고, 문명이 무너져 가는 가운데에서도 매혹적으로 재단된 듯 보이는 풍광들은 영화의 무드를 끊임없이 조성하려 든다. 하지만 내 마음속에 남는 건 공허함뿐이다. <레미니센스>는 상대적으로 사소한 규모의 멜로드라마 서사를 쓸데없이 거대한 세계관에서 진행하기 때문에, 영화가 지속적으로 내미는 시공간의 매력을 맛본 관객들은 극이 진행될수록 배신감을 느끼게 된다. 내레이션의 활용 또한 판단 미스다. 허심탄회한 내레이션과 맞물리는 기억이라는 소재 탓인지, 이를 훨씬 근사하게(비교가 안 될 정도로) 다루는 왕가위의 영화만 괜히 떠올랐다. <레미니센스>는 <인셉션>과 <2046>의 매력적인 구간들을 적절히 배합하려고 했으나 끝내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다 침몰하는 영화처럼 느껴진다.
스콜세지는 이 영화를 꼭 만들고 싶었던 듯하다. 날카로운 시선으로 미국 사회의 단면을 짚어내는 스콜세지는 <갱스 오브 뉴욕>에서도 역시 현란한 저글링을 선보인다. 개인의 복수심이 사회상과 연동되는 지점을 짚어내고, 개인-사회-국가라는 단계적 층위마다 존재하는 갈등의 중첩 구조를 폭로하고 응시한다. 각각의 개인(혹은 집단)에 내재된 양가적 면모 또한 적나라하게 드러내면서 어느 한쪽 진영에 매몰되지 않는 균형감도 놓치지 않는다. 노련한 거장의 손길은 규모와 깊이를 모두 품은 영화를 만들어 내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워낙 방대한 서사를 전개하는 탓에 스콜세지가 극을 진행시키기 버거워 하는 게 느껴졌다. 내게 스콜세지의 70, 80년대 영화들은 소박한 규모로도 얼마든지 농밀하고 풍부한 논의를 생성하는 훌륭한 텍스트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 영화에선 거대 담론을 끌고 오는 시도 자체가 영 위태롭다. <갱스 오브 뉴욕>은 다루는 소재라든가 화법에 있어서 지극히 스콜세지스러운 면모를 풍기지만 한편으로는 완급조절에는 실패한다.
영화를 보면서 마음에 들었던 점은 딱 하나다. 웬우의 존재감, 아니 양조위라는 배우의 관록. 심지어 몇몇 장면에선 왕가위 영화에서 매력을 발산하던 시절이 떠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프레임 내부에 머무르는 순간을 빼면, 남는 게 없는 영화처럼 보인다. <샹치...>의 가장 큰 문제는 서사의 규모와 거대한 자본이 동원된 영화의 제작 환경이 전혀 호응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게다가 <샹치...>의 가족 서사는 소설이든 영화든 기존의 수많은 텍스트를 짜깁기한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마저도 굉장히 얄팍하다. 영웅의 면모를 강조하는 대신 집안싸움으로 끌고 가려는 전략은 좋지만, 후반부로 향할수록 적용되는 연출 방식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다. 오로지 근사한(정확히는 근사한 척하는) 효과에만 사로잡혀 있다. 본격적인 판타지 요소가 개입되는 순간부터는 급격하게 전개의 규모가 커지기 때문에, 무엇을 위해 기획된 영화인지 파악하기 힘들 정도로 어수선하고 너저분하게 진행된다.
복지 제도의 사각지대를 고발하는 영화의 화법에는 선명한 의도가 담겨 있다. 존엄성을 지키려는 노인의 선택, 이웃과의 연대 등 영화는 자신이 어떤 지점을 부각해야 하는지 노선을 분명히 한다. 다만 그 과정에서 고려되지 않은 지점들이 있다. 너무나 명확하게 재단된 대립 구도는 메시지를 우선시하는 영화의 진정성을 성숙하게 뒷받침하지 못한다. 제도의 허점을 강조하고 싶었다면, 제도에 따를 수밖에 없는 공무원들의 고충 또한 충분히 묘사했어야 한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 점을 소거해버린다. 희생되는 건 오로지 서비스를 이용하는 계층뿐이다. 나랏밥을 먹는 이들은 악마 같은 냉혈한처럼 보이게 만들어 버린다는 점이 비극을 강조하고 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가 추구하는 리얼리즘이 현실의 공기를 영화에 편입시키고자 함이라면, 현실에서의 비극을 영화로 치환하고자 함이라면, 과연 이런 맹목적인 구도 설정이 영화의 현실성을 높여줄 수 있는 방식인지는 따져보아야 하는 문제가 아닐까.
질병 수당이 반드시 필요한 심장병 노인 환자와 두 아이를 힘겹게 키워야만 하는 싱글맘의 연대, 그리고 종종 감지되는 이웃과 이웃의 유기적 연결은 그 자체로 <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울림 있는 휴먼 드라마로 치환한다. 그러나 이 영화가 종국에 선택한 방식, 항고에서 승리할 경우 결국 국가의 지원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는 그 일말의 가능성마저 차단해버리는 이 방식은 어쩐지 교묘한 설계처럼 느껴진다. 그의 최후가 기능적으로만 소비된 건 아닐까. 물론 영화의 목적을 고려했을 때는 당연한 선택이다. 기본적으로 배려 없는 제도가 만들어낸 비극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몇몇의 구간들은 켄 로치의 영화 혹은 켄 로치의 리얼리즘을 온전히 지지할 수 없게 만들지도 모른다(이번이 첫 켄 로치 영화 감상이다). 이건 영화를 단순히 감상하는 것과는 다른 문제다. 나 역시 이 영화를 보면서 한없이 먹먹해졌고 눈시울을 붉힌 채 여운을 감각했다.
이미지 출처: 네이버영화, IM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