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9.03-2021.09.09
<블루 재스민>을 보면서 굉장히 인상 깊었던 점은, 정교하게 짜인 영화임에도 영화를 보는 내내 현실에서의 경험을 곱씹어 볼 수 있는 때가 굉장히 많았다는 점이다. 쉴 새 없이 등장하는 플래시백, 연극적 공간 활용, 패닝하는 카메라, 감독 특유의 입담이 반영된 찰진 대사들, 의도된 구간에 삽입되는 음악들까지. 영화는 시종 영화처럼 보이기 위해 애쓰고 있지만, 어쩐지 매우 자연스럽게 영화와 현실을 가르던 경계선이 무너진다. 우리들 중 누군가는 재스민이거나 진저가 된다. 우리는 재스민에게서 나의 모습, 지인의 모습, 혹은 어딘가에 존재할 법한 누군가의 모습을 본다.
모든 건 한낱 손바닥 뒤집기에 불과하다. <블루 재스민>은 경계에 관한 영화다. 희극과 비극은 분리될 수 없다. 그저 그 경계를 오갈 뿐이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인간은 후회하거나 만족할 수 없는 때에 과거의 망령에 사로잡힌다. 현실에서의 이탈 혹은 망상으로의 접속은 경계를 넘나드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회상 또한 경계를 넘는 행위다. 재스민이 불현듯 과거를 떠올리는 순간, 영화에선 편집점이 생겨난다. 이는 인과에 따라서 발생되는 서사의 전개가 아니다. 오로지 재스민이라는 사람의 개인적인 흔적을 따라 현재와 과거가 교차될 뿐이다. 현실에서 재스민은 늘 욕망하고 결핍을 느끼고 망상과 상상에 사로잡혀 경계를 넘나든다. 재스민의 자의식과 영화의 화법이 서로 호응하고 관객은 이를 통해 자신의 현실과 재스민의 삶과 영화 속 세상의 경계가 흐려지는 듯한 묘한 체험의 기회를 얻는다.
사람은 늘 생각한다. 내가 그렇게 잘 나갔었는데, 그때 그 선택을 하지 않았더라면. 시간의 흐름은 이어져 있지만, 인간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나눈다. 그리고 임의로 설정된 시간대로 접속하여 잠시나마 결핍을 감추고 허상을 좇는 것으로 만족을 얻으려 한다. 하지만 실재하는 건 오로지 지금 이 순간을 감각하는 나 자신이다. 하지만 지금도 흘러가고 있는 이 실재하는 현재의 시간을 온전히 수용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완벽한 현재는 없다. 그러기에 인간은 늘 과거에 매달린다. 생각을 고쳐먹든, 관점을 바꾸든 간에 달라지는 건 많지 않다. 인간은 늘 선택하고 후회함을 반복한다.
마리안 부세주르, 아니 정체를 숨긴 자, 아니 우리가 아는 인기 배우 마리옹 코티야르가 공존한다. 영화 속 마리안은 그만큼 불투명한 인물이다. 단지 그녀가 첩보 공작에 능통하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그녀가 읊는 대사 한 마디 때문이다. 마리안의 말처럼 감정을 연기하는 일은 진실을 대체할 수 있을까. 위장 연인은 서로 밀착한 채로 숨소리를 듣고 입을 맞추며 포옹하지만, 그 이면에는 끝내 지워낼 수 없는 긴장감이 맴돌고 있다. 나도 상대를 속이고 상대도 나를 속이는 쌍방의 가면극. 경계를 늦추지 않은 채 서로를 탐색하던 남녀는 문득 진솔한 감정선을 확인하고 연극을 끝내려고 한다. 영원할 것만 같은 미래를 기약하면서 사랑을 확인한 두 사람. 하지만 <얼라이드>는 일부러 두 사람이 공유하는 에피소드를 예상보다는 적게 나열하고 있다. 그렇다면 문제는 지금부터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평생을 첩보와 공작 활동에 몸담아 왔던 두 사람에게 진실과 거짓을 구분 짓는 일은 일종의 숙명이면서 동시에 가장 진절머리 나는 장애물과 같다. 이들 세상엔 감상이 개입될 여지가 없다. 그들의 세계를 지탱하는 건 의구심과 냉혹함이다. 마리안과 결혼하려는 맥스를 향해 동료들은 임무로 맺어진 인연은 위험하다며 회의감을 표출하지 않는가. 맥스와 마리안이 서로의 감정을 공유하고 사랑을 나누는 순간들은 그래서 불투명하다. 순도 높은 진실 혹은 거짓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할 수 있는 건 불투명의 세상을 온전히 수용하는 일뿐이다.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따지려 드는 순간, 사소한 일상의 순간들이 모두 검열과 판단의 대상으로 돌변하기 때문이다.
사막의 모래바람이 몰아치는 가운데, 차 안에서 두 사람이 사랑을 나누는 모습을 떠올려 보자. 카메라는 아주 천천히 돌면서 두 사람을 응시한다. 이들의 시공간에 녹아들고자 하는 욕망이 반영되어 있는 걸까. 하지만 이 장면은 호흡이 긴 롱테이크가 아닌, 짧은 숏이 계속해서 분절적으로 이어 붙은 형태로 구성된다. 이건 마치 이들의 관계를 형상화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들만의 세계 속에서 그들은 서로 감정을 나누고 있지만, 그들의 소우주에서 벗어난 외부의 시선이 개입되는 순간 이 불안정한 세계는 온전히 유지될 수 없다. 따라서 영화는 순순히 인정하는 셈이다. 그들의 관계 자체를 바라볼 때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는 일은 중요치 않으며, 우리는 그들의 시선과 몸짓을, 그리고 그들 사이의 무드나 기류 등을 바라볼 수는 있지만, 그 자체로 불완전한 상태에 놓여 있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
첩보 영화의 인물은 두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교란하거나 교란당한다. <39 계단>은 평범한 자가 스파이가 되도록 강제한 뒤 인물이 어떻게 위기를 극복하는지 나열하고 있다. 전문 첩보 요원이 아니기 때문에 생기는 빈틈들이 극의 전개를 예측하기 어렵게 만든다는 점이 영화를 재밌게 가공한다. 남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쫓겨야 할 운명에 처한다. 일단 생존의 위협을 느끼니 어떻게든 살고 보자는 식으로 직면한 위기를 피해가는 데에만 집중한다. 확실한 건 없다. 국가 기밀이 유출된다는 정보를 터무니없이 여기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진위 여부를 가리는 일보다 훨씬 중요한 건, 나의 생존 가능성이다. 그런데 빠른 속도로 우발적인 사건들이 정신없이 나열되는 서사 가운데서도 영화가 의도적으로 속도를 늦추는 구간이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도망과 탈출을 반복하던 주인공이 타인의 신분을 빌려 연설하는 장면 말이다.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 그냥 하고 싶은 말을 의식의 흐름 따라서 뱉어내는 인물의 모습은 그 자체로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능청스러워 보이기도 한다. 해니는 연단에 서서 자신의 경험과 사유를 풀어내지만, 사람들은 해니를 연사로 오인하고 그의 말에 경청한다. 해니는 자신을 노리는 이들이 점점 옥죄어 오는 긴박한 상황 속에서 어떤 선택을 내려야 하는가. 그저 연단에서 말을 뱉어내는 선택지 말고는 없지 않은가. 그러면서도 최대한 시간을 오래 끌려고 말을 쉬지 않는다. 어차피 잡힐 거라고 예상은 가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리를 뜨고 순순히 잡히기는 싫지 않겠는가. 이 연설 신은 자신의 말에 집중하는 군중과 자신을 잡으러 온 이들을 끊임없이 번갈아 바라보는 해니의 고뇌가 잘 드러나는 구간이다. 그러면서도 원치 않는 스파이가 된 채 계속해서 신분을 위장하고 상대를 교란해야 하는 해먼드와 무의식중에 겪었던 일들에서 비롯된 속내를 고백하는 평범한 시민 해니로서의 양가적 면모가 압축된 채 관객에게 가닿는 구간이기도 하다.
영화 속 프레임 내부는 그 자체로 매혹적인 세계가 된다. <슬리피 할로우> 역시 그런 점에서 관객에게 생동감이 한껏 넘치는 자태를 뽐낸다. 머리가 잘려나가는 오싹한 장면이 많음에도 어쩐지 헛웃음 나올 정도로 매끄럽게 설계된 환상의 마을. 이 영화에선 원작 소설의 영향 때문인지 장소 하나하나가 매우 중요한 모티프로 작동하는 듯 느껴진다. 네덜란드계가 모여 사는 외딴 마을, 죽음의 나무, 마녀의 집, 교회와 같은 장소들 말이다. 세기말 즈음 제작된 영화라서 그런 걸까. 영화를 지배하는 기이한 무드는 감독 특유의 색채와 맞물려 더욱 음산하고 기괴한 인상을 준다. 죽어서도 세상을 떠도는 목 없는 기병의 사연에는 질척대는 흑막이 자리한다. 주술과 영적 체험 같은 초자연적인 현상을 믿지 않는 자가 기병을 맞닥뜨릴 때 그의 신념이 무너지는 모습이 그가 간직한 트라우마와 함께 관객에게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IM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