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9.24-2021.09.30
각색으로 인해 원작과 견주었을 때의 결이 다소 달라졌다. 영화는 거인과 용, 사랑의 미약 등의 환상 요소를 제한 채 현대의 관객을 납득시킬 수 있는 개연성으로 승부하려 든다. 연인 간의 로맨스뿐 아니라 트리스탄과 마크의 관계, 그리고 그들이 몸담은 국가의 정치 상황과 외교적인 관계까지 강조하는 서사가 펼쳐진다. 물론 여전히 중심에는 불꽃같은 사랑이 있다. 결국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운명과도 같은 만남은 비극으로 끝을 맺는다. 《로미오와 줄리엣》등의 연애 문학에 영향을 준 원작 판본의 문학사적 입지를 실감케 할 만큼의 감상 포인트가 느껴지지는 않지만, 트리스탄을 연기하는 제임스 프랭코의 인물 소화력이 짙은 여운을 남긴다는 점은 곱씹어 볼 만하다.
P.S. 헨리 카빌에게 이런 시절이..?!
초국가적 위기 상황에 대응하는 것보다도 중요한 건, 다가올 운명을 수용하는 방식을 조명하는 일이다. <딥 임팩트>는 닥쳐오는 재난을 받아들이는 다양한 인간 군상에 주목한다. 각기 다른 가족 형태의 해체 및 재구성이 묘사되며, 세대 간 갈등 또한 담겨 있으며, 분열과 봉합을 거듭하는 드라마가 강조된다. 하위 플롯들이 다소 산만하게 얽혀 있는 듯 보이나 결국 예정된 끝을 인지하면서도 어떻게든 살아가야만 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꼼꼼하게 짚고 넘어가려는 담담한 무드가 구심점 역할을 한다. 영화 속 혜성 충돌이 인류의 멸망과 직결되는 중대한 사안임에도 오로지 미국의 상황만을 나열하는 불균형한 묘사가 달갑지는 않지만, 재난의 스펙터클에 매몰되는 다른 재난 영화와는 달리 사람들의 이야기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는 점이 <딥 임팩트>의 깊이를 더한다.
<007 스펙터>를 첩보 액션 장르라는 액자에 거칠게 끼워 넣은 채 응시할 때 느껴지는 아주 독특한 점이 있다. 아주 뚜렷한 성공과 실패가 공존한다고 해야 할까. 우선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순간을 꼽으라면, 두 가지 장면이 단박에 떠오른다. 오프닝 시퀀스 그리고 오버하우저가 회의에 참석하는 신이다. 오프닝 시퀀스에선 롱테이크가 존재감을 드러낸다. 인파로 북적대는 현장에서 관객은 본드 혹은 본드와 관련된 이를 찾으려고 들지만, 모두가 가면을 쓰고 있어 식별할 수 없다. 그래서 관객은 카메라의 시선에만 의지해서 추적 과정에 돌입해야 한다. 숏을 쪼개지 않았기 때문에, 관객은 프레임에 진입하거나 혹은 그로부터 이탈하는 모든 피사체들에 주의를 기울일 수밖에 없다. 그러면서도 이내 본드의 정체가 드러나고 그의 타깃이 드러나는 순간이 되면, 관객은 앞서 제시됐던 정보 가운데 부각됐던 지점을 곱씹어 보려고 한다. 우리의 지각이 어떻게 오인당하고 한편으로는 어떻게 강화되는가. 재밌는 포인트가 아닐까 싶다. 두 번째는 오버하우저가 조직 회의 때 친히 모습을 드러내는 장면이다. 조명의 톤과 세기, 인물 배치, 구도의 변주만으로 아주 명쾌하게 캐릭터를 설명하기 때문에 효율과 임팩트를 동시에 챙길 수 있다. 구구절절 대사를 읊지 않고도 미장센만으로 효율적인 묘사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잘 드러내는 구간이다. 오버하우저의 검은 실루엣이 살짝만 움직여도 그 포스가 전달되는 느낌이 들지 않았는가. 어둠에만 갇혀 있다가 모습을 슬쩍 드러낼 때도 얼굴 영역의 일부만 공개되는데, 이때의 하이 앵글은 오히려 오버하우저라는 인물의 섬뜩함을 강화하는 변칙적인 효과를 가져온다.
하지만 <007 스펙터>는 치명적인 실패의 구간들도 많은 영화다. 샘 멘데스는 기본적으로 검증된 연출력으로 승부하는 뛰어난 감독이다. 그는 영화를 통해 보여주거나 묘사하는 방식들이 어떻게 가공되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유독 <스펙터>는 영상 미학적인 요소들은 기대를 충족하지만, 다른 측면에선 엄청난 괴리감이 느껴질 만큼 엉성한 구간들이 많다. 특히 플롯을 연결하거나 서사를 전개하는 리듬이 너무나 허술하다. 시각적으로 구현된 매력을 선보였던 오버하우저의 경우가 안타깝다. 열등감과 패배 의식으로 똘똘 뭉친 빌런의 사연은 서사에 편입되는 수준도 아니고 겉도는 것도 힘겨워 한다. 본드의 이야기 역시 전혀 와닿지 않는다. 본드의 곁을 지나치는 여인들 역시 각자의 서사가 전혀 확보되어 있지 않다. 게다가 전반적인 액션 신의 완성도 역시 한껏 힘을 준 모양새에 비해선 초라한 지점들이 제법 있다. 오프닝 시퀀스의 헬기 액션 신에 비해서 카 체이싱 신의 매력은 그다지 와닿지 않는다. 맨몸 격투는 새롭지 않다. 크레이그가 아닌 다른 배우들이 맡았던 기존 007 시리즈에 대한 오마주가 많다고 들었지만, 그것만으로 관객들이 영화를 흥미롭게 봐주길 원한다면 판단 미스가 아닐까. 007 시리즈의 열렬한 팬이 아닌 관객들도 사로잡을 수 있는 영화는 아니다. <007 스펙터>의 본드는 에단 헌트든 제이슨 본이든 컨셉을 분명하게 하는 편이 좋았을 법한데, 결국 방황만 하다 끝나는 것 같다.
본드의 기구한 운명을 배웅하기라도 하듯, 이 영화엔 그의 곁에 잠시 동안 머물렀다 연기처럼 휙 사라지는 팔로마라는 풋내기 스파이가 등장한다. 상당한 러닝 타임 가운데 팔로마의 비중은 매우 적다. 그러나 가장 강렬하다. 007 코드네임을 물려받은 후임자 노미와 본드의 관계보다도, 찰나의 순간이지만 서로 교감에 성공한 듯 보이는 팔로마와 본드의 관계가 형성되는 장면이 영화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이 아닐까 싶다. 두 사람이 함께 했던 쿠바 시퀀스에선 눈물을 쥐어짜내라고 만든 가족주의 메시지도 없고, 최첨단 무기와 정보 싸움으로 무장한 현대 첩보전의 묘미도 없다. 하지만 절체절명의 위기 가운데에서도 술 한 잔을 기품 있게 따라 마시는 걸 잊지 않는 베테랑 첩보 요원의 여유가 있으며, 모든 걸 공유할 수는 없음에도 작전 상황에서만큼은 서로를 믿어야 하는 두 스파이 사이를 파고드는 미묘한 텐션이 있다. 감정적 울림을 남기는 본드의 퇴장보다도 할 일을 마친 뒤 쿨하게 인사를 건네고 유령처럼 사라진 팔로마의 퇴장이 어째서 더 뇌리에 남는 건지 모르겠다.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IM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