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영화

2021.09.17-2021.09.23

by 드플레

<내가 속한 나라(Die innere Sicherheit)> (크리스티안 페촐트, 2000)


부모의 사정으로 인해 원하지 않는 삶에 처한 소녀의 행적을 조명한다. 떠돌 수밖에 없는 운명. 이때 영화는 배경이 될 법한 사연을 소거해버린다. 부모가 무슨 일을 했는지 언급하지 않고, 가족의 삶이 어땠는지 플래시백으로 짚지도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이 정착하지 못해 계속 이동하는 가족의 초상을 목격한다. 그리고 혼란한 상황에 계속해서 노출되는 소녀의 심리를 따라간다. 그런 의미에서 오프닝과 엔딩의 조응 방식이 기억에 남는다. 사실 페촐트의 영화에선 인물이나 배경 등의 소재가 늘 대유물로써 기능한다. 역시 초기작인 이 영화에서도 그런 흔적들이 보인다. 주인공 잔의 정체성과 성장에 관한 문제가 통독 이후의 정치, 경제, 사회 상황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듯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 영화에선 어쩐지 스릴 넘치는 탈출극, 로드무비 등이 들러붙은 장르적 질감이 다소 강하게 느껴져서 그런 접근이 덜 유효해 보인다. 이후 페촐트의 영화들이 본격적으로 하나의 우화처럼 작동한다는 사실을 떠올렸을 때 이 영화는 그런 시도들의 거친 원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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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속한 나라(Die innere Sicherheit)>



<옐라(Yella)> (크리스티안 페촐트, 2007)


붉은 색채는 언제나 옐라의 주위를 맴돈다. 그녀가 입은 옷과 자동차, 심지어 기차의 비상등까지.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깨닫지 못하는 옐라를 비웃기라도 하듯 이 위험과 경고의 전조들이 곳곳에 출몰한다. 이 여정이 현실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일까. 눈을 뜬 뒤의 일들은 옐라의 환상이나 꿈일 수도, 실제 겪은 일일 수도, 아니면 그것들마저 어지럽게 뒤섞인 기묘한 경험일 수도 있다. 사실 <옐라>에서는 근거를 확보해서 현실과 허구를 가르는 경계를 따지는 일이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정체불명의 사운드를 예측할 수 없는 순간에 개입시키고, 시공간의 논리나 인과율을 어긴 채 도발적으로 숏을 접합한 뒤 관객을 교란하려 들기 때문이다. <옐라>는 여인의 삶에 관해 말하지만, 관객은 아주 자연스럽게 여인의 삶에 개입하는 요소들과 그 삶을 재단하려 드는 근간을 발견하길 원할 것이다. 그리고 영화 바깥의 맥락을 가늠해 볼 때 자본 및 가정 구조와 결부된 현대 독일 여성의 불안과 공포를 발견할 수 있다. <옐라>는 확인 사살을 통한 비극이다. 그 처절한 환상극을 통해 강조되는 건, 오로지 니나 호스가 연기하는 옐라의 리액션이다. 그 무엇보다도 결말부에 제시되는 옐라의 표정, 마치 모든 걸 알고 있었다는 듯 체념하는 그 얼굴이 카메라에 잡히는 순간을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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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옐라(Yella)>



<열망(Jerichow)> (크리스티안 페촐트, 2008)


오인과 혼동. 크리스티안 페촐트의 영화를 지탱하는 동력 가운데 하나다. 치정극의 외피를 두른 남녀의 대립과 갈등은 시종 서스펜스를 자아낸다. 이때 영화 속 세 사람의 갈등이 곧 통독 이후 현대 독일 사회에 내재된 불안과 연결된다는 사실은 자명해 보인다. 후반부로 갈수록 그런 속성들이 인물들을 통해 명확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런 적나라함이 감독의 작가적 사유와 밀접한 관련이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한국의 관객에게 인상 깊게 다가갈지는 모르겠다. 그럼에도 나는 페촐트 영화가 좋다. 감독이 매달리는 유령적 존재들 때문도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미학적인 특성 때문에 그렇다. 프레임 내부를 떠도는 피사체들, 인물을 배치하는 구도들, 내(외)재적 사운드의 활용 말이다. 그런 점에서 <옐라>와 <열망>은 돌출점이 감지된다. 확실히 모든 면에서 페촐트의 영화는 <바바라> 이후 매끈해졌다고 생각하는데, <열망>은 <바바라>의 전작이라는 점에서 그 유려함과 거친 질감이 공존하는 듯 보이기도 한다.


터키계 이민자가 맞이하는 최후의 방식, 그리고 그걸 바라보는 두 토착 독일인들. 이 영화가 제시하는 결말은 무엇을 표상하는가. 페촐트의 유령들은 늘 모종의 알레고리 하에 묶인 은유적 존재들인데, 이 영화의 세 사람은 <트랜짓> 속의 유령들이 아니라 주변부로 밀려난 소외된 존재라는 명확한 속성을 부여받은 소수자 포지션에 처한다고 보는 편이 맞다. 이는 곧 인물들을 정치사회적 메신저로 활용하는 감독의 의도와 호응하게 된다. 어쩌면 모호함보다는 선명함이 부각되는 영화다. 결국 녹아들지 못한 채 소멸하는 자를 향한 두 독일인의 응시, 우두커니 멈춰 있는 남자와 홀린 듯 달려가는 여자. 페촐트는 자신의 생각을 명확히 정리하지 못한 채 그저 바라만 보면서 영화를 끝내지만, 두 인물의 행위가 갈라지는 지점을 담아냈다는 점에서 <열망>은 오히려 솔직한 사회 보고서이자 반성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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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망(Jerichow)>



<바바라(Barbara)> (크리스티안 페촐트, 2012)


다층적인 갈등은 없고 동서독의 선명한 대립에 짓눌리는 사람들의 갈래 서사만이 산재한다. <바바라>는 1980년이라는 통독 이전의 시대를 대놓고 소환한다. <바바라>-<피닉스>-<트랜짓>이라는 시대극 트릴로지의 출발점이기도 한 이 영화는 페촐트의 최근 연출작 가운데 가장 묘한 인상을 풍긴다. 이 점이 영화에 대한 감상을 쓰기 어렵게 만든다. 페촐트의 영화를 탐독하지 않은 채 이 영화를 보았을 때는, 이 영화가 그저 시대의 구조적 한계에도 작동하는 실존적인 고뇌와 울림 있는 휴머니즘을 표현한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다시 본 <바바라>는 뭔가 묘하다. 페촐트가 바바라를 다루는 방식이 그렇게 단순해 보이지 않는다.


이 영화는 제목부터 한 인물에 매달릴 거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인물의 이름을 타이틀로 쓰는 영화에서 인물 탐구가 이루어지지 않는 건, 기획 자체에 어딘가 결함이 생긴 것이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가 다니엘 블레이크에게 시종 충실한 영화였다는 사실은 너무나도 당연하지 않은가. 어쨌든 이 영화는 그 논리에 맞게 바바라의 일거수일투족을 따라가지만, 어쩐지 그녀의 내면 탐구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 후반부 바바라의 선택은 물론 단서가 충분히 표현되었음에도 살짝 갑작스러운 인상을 주기도 한다. 음산한 블루 톤 화면과 잔잔한 열기를 뿜어내는 바바라의 결단이 대비된다는 점을 읽어내는 것 또한 매력 있다. 하지만 <바바라>의 방식은 완성도 높은 서사와 거리를 두는 듯하다. 바바라 개인의 이야기로서는 미흡한 구석이 많아 보인다.


그래서 오히려 이 영화에서 불필요하게 보이는 순간들을 붙잡고 싶어졌다. 바바라가 자전거를 타고 이동하는 장면이나 의자에 앉아 담배를 피우는 모습들이라든가 당직을 서거나 진료를 본 뒤, 잠시 벽에 기대서 허공을 응시하는 순간들 말이다. 바바라의 내면을 굳이 짐작해 보고자 한다면 우리는 그런 순간들에서 단서를 찾아야 할지도 모른다. 이 시간들은 시공간적 표지가 명확하게 재단된 동서독의 대립과는 잠시나마 동떨어질 수 있는 그녀만의 시간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제된 채 매끄럽게 유영하면서 인물의 감정선과 선택을 따라가는 영화의 리듬과 호응하지 않는 구간들이 오히려 당위를 만들어내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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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바라(Barbara)>



<보이스> (김선 & 김곡, 2021)


정신없이 관객의 심리를 구석으로 몰아붙이는 액션 스릴러. 추석 극장가를 겨냥해서 제작된 상업성이 짙은 영화. <보이스>는 그런 요소를 한껏 부풀리다가도 목표 지점으로 가려는 욕망을 드러낸다. 이 불균질함을 어찌 받아들여야 할까. 범죄 조직의 수법을 다각도로 조명하면서 피해자의 잘못이 아니라고 강조하는 영화. <보이스>는 우리들의 현실과 만나려는 의도를 분명히 한다. 극 중 뜬금없게 느껴졌던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경찰의 브리핑이 마치 특별 캠페인 영상의 그것처럼 느껴졌던 순간 말이다. 그 숏에는 현실의 관객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을 분명히 해두려는 소망만이 보였다. 이 얼마나 직접적인 발화인가. 그렇다면 <보이스>가 선택한 화법의 정체는 무엇인가. 우리는 과연 이걸 두고 영화스럽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까. 숏과 숏의 연쇄 등으로 보여주려고 하기보다는 대사 몇 마디로 던지는 식이라는 이유만으로 영화적이지 않다고 단정 지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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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스>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IM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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