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영화

2021.10.01-2021.10.07

by 드플레

<쁘띠 마망(Petite Maman)> (셀린 시아마, 2021)


<쁘띠 마망>의 화법은 사려 깊다. 영화 속 인물들은 관객과 접속되기 이전에, 그들의 만남을 충분히 감각한다. 이는 특히 음악의 활용을 통해 두드러진다. 두 아이는 헤드셋을 나누며 교감할 수 있지만 영화는 그 순간 관객에게 그 음악을 들려주지 않는다. 그래서 두 사람의 소우주는 균열 없이 오롯이 보존될 수 있다. 그 이후 장면에서 관객한테 음악이 들리는데, 마치 직전에 두 사람이 공유했던 음악처럼 느껴진다. 극 중 인물들을 서사적 도구로만 소비하는 방식을 피한 채 그들의 감각을 존중하는 일을 잊지 않는 것. 이것이 <쁘띠 마망>을 특별하게 만든다. 이제 도입부의 넬리가 엄마에게 과자와 음료수를 건네주던 숏을 떠올린다. 넬리는 외화면에 있고 관객에게는 엄마의 모습만 보인다. 관객은 넬리의 마음을 손쉽게 헤아릴 수 없다. 넬리는 화면 바깥에서 엄마를 향한 자신의 심정을 곱씹을 수 있지만, 관객은 이를 상상해야 한다. 따라서 <쁘띠 마망>은 관객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감정에만 주목하는 영화가 아니다. 영화가 구현된 인물들을 각본과 스크린에만 가두지 않으려고 한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그래서 그들이 감각하는 사소한 순간들은 인물 바깥으로 쉽사리 빠져나가 소멸되지 않는다. 이것이 가상으로 만들어낸 인물들을 향한 시아마의 철학이다. 창조된 인물들은 그 어디에도 속박되지 않은 채 독립적으로 살아 숨 쉴 수 있고, 스크린, 극장의 객석, 카메라의 눈이 미치는 공간들을 포괄하는 그 어딘가를 유영할 수 있다.


<쁘띠 마망>은 간결한 러닝타임(약 70분)에도 불구하고 여느 장편 못지않은 풍성한 텍스트처럼 보인다. 영화 내 공간이 많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 등으로 미루어 보아 여러 제약 조건 속에서 소규모로 제작된 영화겠지만, 영화의 화술을 통해 느껴지는 깊이와 규모는 이러한 외연과 다르게 놀랍도록 풍부하다. 규모가 작아도 충분히 좋은 영화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입증하는 사례 중 하나다. 아버지와 넬리의 대화에선 남성을 배제하지 않는 꼼꼼함이, 넬리가 할머니와 인사를 나누는 장면에선 내러티브를 낭비하지 않는 치밀함이 엿보인다. 아이를 중심으로 하는 영화임에도 아이의 시선에만 머무르지 않고 성인 세대를 포용하는 화법을 통해 전 세대가 공감할 수 있도록 한다. 시공간을 초월한 만남의 장은 놓쳐 버린 무언가를 다시금 꺼내들 수 있게 한다. <쁘띠 마망>은 이 기묘한 경험의 목적을 함부로 설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인물들을 응시한다. 이곳은 위로와 소통의 무대가 된다. 모녀 관계는 전형적인 논의에만 머무르지 않고 다른 층위로 확장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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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쁘띠 마망(Petite Maman)>



<유령 신부(Corpse Bride)> (팀 버튼, 2005)


인간(혹은 우리들의 세계 자체)을 달갑게 바라보지 않는 감독의 시선이 깔려있다. 어딘가 뒤틀린 인간의 신체적 형상들을 통해 우리는 그런 점을 엿볼 수 있기도 하다. 팀 버튼의 초창기 단편 <빈센트>와 영화 속 인물이 동명(빅터=빅센트)인 건 우연이 아닐 것이다. 배우 빈센트 프라이스를 동경하는 단편 속의 소년 빈센트는 곧 팀 버튼 본인이 된다. 그리고 <유령 신부>의 빈센트는 이들과 만난다. 더욱 기묘한 건, 빅터의 혼인 상대 빅토리아(빅터: 남성형, 빅토리아: 여성형) 역시 또 다른 빈센트가 된다는 점이다. 인간을 풍자의 대상으로 삼고 조소의 대상으로 취급하는 팀 버튼의 세상. 이곳에서 빈센트이자 빅터이자 빅토리아는 팀 버튼의 면모가 한껏 녹아든 인물이 된다. 그들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 형성에 어려움을 겪는다. 배제, 분리, 이탈, 혼돈과 같은 요소들이 언제나 그들을 감싸고 있다.


산 자를 향한 냉소와 죽은 자를 향한 따스함. 이 양가적 시선이 영화 속에 녹아 있다. 두 세상은 명백한 대립 구도로 재단된다. 근데 한편으로는 견고한 경계가 눈 녹듯 사라지는 감동의 순간도 묘사된다. 이 점이 애니메이션을 흥미롭게 만든다. 미추(美醜)는 상호의존적 관계에 놓여 있다. 두 관념은 절대 독립해서 존재할 수 없다. 팀 버튼은 아름다움만을 추출하고, 정제하고, 세공하려 드는 시도를 거부한다. 그는 추함을 직시할 때 아름다움을 찾아낼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그가 그려낸 자기 반영적 인물들, 그의 기괴한 판타지 세계에서 배어 나오는 아름다움은 인위적으로 가공해낸 것과 다른 층위에 놓이는 셈이다. 에밀리의 기구한 사연을 소개하는 장면을 떠올려 보자. 슬픈 이야기임에도 절대 비통하게 풀어내지 않는다. 죽은 자들은 이승의 논리를 신경 쓰지 않고 자신들이 생각하는 죽음과 사랑에 관해 흥겨운 노랫말과 함께 이야기한다. 그들의 법칙이 산 자들의 세상에 편입될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유령 신부>는 이승을 환멸의 세상으로만 남겨두지 않는다. 경계를 무너뜨린 뒤 묻는다. 이분화된 것들이 공존할 수 있는지 말이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레 발견되는 아름다움은 너무나도 소중하다.


P.S. 그대로 번역한 '시체 신부'가 훨씬 좋은 제목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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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 신부(Corpse Bride)>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Ailce in Wonderland)> (팀 버튼, 2010)


앨리스는 계속해서 되뇐다. "이건 꿈이야!". 자신이 어디서 무얼 하는지 파악하려는 앨리스에게 그 누구도 의견을 내지 않는다는 게 흥미롭다. 그녀가 이 세계를 인식하고 감각하고자 하는 시도는 전혀 중요하지 않은 걸까? 이때 후반부 압축적으로 제시되는 장면을 떠올려 본다. 앨리스가 마침내 이곳이 자신의 기억 속에 있던, 예전에도 와 봤던 친숙한 공간임을 깨닫게 되는 그 장면 말이다. 원더랜드는 앨리스의 무의식 영역 혹은 내면 요소를 기반으로 생성된 세상처럼 느껴진다. 두 여왕의 대립은 앨리스의 내적 자아가 분열하여 싸우는 구도처럼 읽히고, 기이한 크리처들과 인물들은 현실 속 주변인들의 면모가 반영된 존재들처럼 보인다. 지금 이 순간, 앨리스는 꿈을 꾸는 게 아니라 망상 혹은 상상 속에서 여행을 하는 셈이다. 토끼굴은 심연에 도달하기 위한 입구가 되는 걸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세계의 존재들이 뱉는 말도 앨리스에 의해 결정된다. 즉 앨리스는 자신이 관장하는 세계 속에서 스스로 헤매면서 답을 찾아가는 기이한 여정에 몸담은 셈이다. 현실을 도피하고자 하는 이가 도달한 판타지 세상이 곧 자신의 내면일 때, 분열과 봉합을 몸소 체득하면서 새로운 자아를 향해 발을 내디딜 수 있다. 그래서 앨리스는 세계의 운명을 짊어지는 영웅이 된다, 아니 되어야만 한다. 이 무대는 그녀의 내적 성장을 위해 마련된 자리다. 그렇다면 문제는 무엇인가. 바로 전술했던 압축된 장면에서 비롯된다. 매우 중요한 순간을 대사 몇 마디와 빠른 템포의 몽타주 구성으로 처리해버렸다는 점이 상당히 아쉽다. 저런 방식을 통해서는 앨리스와 이 세계가 어떤 요소로 연결되어 있는지 인상 깊게 와닿지 않는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시종 강조하는 건 그저 감독 특유의 터치가 반영된 미장센뿐이다. 단순히 시각적인 매혹성이 뛰어나다는 이유만으로 이 세계관 요소들이 관객을 사로잡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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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나라의 앨리스(Ailce in Wonderland)>



<오필리아(Ophelia)> (클레어 맥카시, 2018)


희곡 《햄릿》의 제목이 '햄릿'인 이유는 햄릿의 서사를 통해서 논할 수 있는 가치가 생성된다는 데에 있다. 물론 이는 인물의 이름을 제목으로 삼는 수많은 텍스트들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이때 만약 '햄릿'의 이름을 소거한다면, 그 저작물에선 더 이상 햄릿의 서사를 통해 생성되는 가치가 유효하지 않다. 아니, 유효할 수 없다. 예를 들어, '햄릿'이라는 제목이 '유령과 독약'이 된다면, 햄릿의 실존적 고뇌로부터 뽑아낼 수 있는 사유의 단초들이 '햄릿'일 때만큼 존재감을 발휘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오필리아>(2018)의 전략은 무엇인가. 이 영화가 오필리아의 서사를 구축하는 방식은 어떤가. 탄탄한(갈등 관계라든가 스토리텔링의 균형감 측면에서) 원전 속 햄릿의 서사에 기댄 채 오필리아의 이야기를 얄팍하게 편입시키려고 하는가? 아니면 햄릿의 비중을 대폭 줄이고 오필리아의 서사를 통해 생성되는 가치에 주목할 수 있게 만들었는가? 물론 두 사람의 사랑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점에서, 햄릿은 여전히 오필리아의 서사 속 핵심 인물이 된다. 그렇다면 이제 필요한 건 오필리아의 서사가 햄릿의 사연과 어떻게 연동하는지 살피는 작업이다.


오필리아의 가치관은 햄릿과의 대비로 인해 아주 뚜렷하게 드러난다. 후반부 대화는 두 사람이 각각 추구하는 가치의 우선순위를 잘 나타내는 장면이다. 오필리아의 선택과 햄릿의 선택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가. 사실 얼핏 보면 오필리아의 최우선 가치는 사랑처럼 느껴진다. 그녀는 햄릿을 운명처럼 찾아온 사랑으로 여기면서 결국엔 그와 함께 하는 삶을 목표로 한다. 하지만 햄릿은 자신의 혈통과 가족, 그리고 정치가 어지럽게 얽힌 문제를 과감히 포기한 채 오필리아를 따라나서지 않는다. 그에게 오필리아는 목숨보다 귀한 사랑이 아닌 듯하다. 이때 오필리아의 선택은 무엇인가.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과 함께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자의 선택은 무엇인가. 간단하다. 자신 앞에 놓인 경로를 재수정한 뒤 미련 없이 떠나는 것이다. 영화 속 오필리아의 여정은 말 그대로 생존의 문제다. 어떻게 하면 이 험난한 세상에서 잘 살아남을 것인가에 관한 문제가 되는 셈이다. 그래서 그녀의 최우선 가치는 사랑이 아닌 삶이 된다. 그저 살아가기 위해 살고, 죽을 수 없어 산다.


흔히들 죽음과 맞바꿔서 얻는 가치가 있다고 말한다. 전장에서 명예롭게 전사했다면, 그 죽음은 명예라는 가치로 치환되는 듯 보인다. 게다가 우리는 여러 문학 작품들이 죽음을 불사한 사랑을 다뤄왔다는 사실을 안다. 하지만 오필리아에겐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장 살아가야 한다는 본능이 다른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그래서 오필리아만이 유일하게 광기의 현장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속 오필리아가 연기하는 장면. 즉, 실성해버린 모습을 클로디어스와 거트루드한테 보여주는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오필리아는 살기 위해 미친 척 연기를 한다. 햄릿 역시 미친 척 연기를 했던 상황이 있다. 햄릿은 복수를 계획하기 위해 미친 척 연기를 한다. 광기의 가면 속 두 사람이 품고 있던 모습은 달라도 너무나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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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필리아(Ophelia)>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IM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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