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0.08-2021.10.14
삶 같은 영화 혹은 영화 같은 삶. 그냥 <위선적 영웅>을 보고 떠올릴 수 있는 말이 이것뿐이었다. 완벽한 진실도, 완벽한 허구도 없다. 그 둘을 오가는 흐릿한 무언가만이 손에 잡힐 듯 말 듯 평생을 우리 곁에 머무는 셈이다. 오디아르는 매우 치밀해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우연으로 가득한 이 알 수 없는 파편들의 총체를 만들어냈다. <위선적 영웅> 속 알베르는 영웅 서사 속 주체로 보인다. 하지만 이 자가 영웅이 되는 방식은 갈등-해결의 구조가 아니다. 알베르는 스스로가 갈등을 생성하고 뛰어들고 있다. 그리고 그 연쇄 작용 속에서 알베르는 종착지를 가늠하지 못한 채 당면한 문제들만 헤쳐나간다. 결국 의뭉스러운 파편들을 잔뜩 두른 알베르의 외피를 벗겨 내고 그의 나체를 응시한다면, 남아서 그의 곁을 맴도는 건 '성장'이 맞을까? 아니 어쩌면 우리는 그 외피를 영영 벗겨낼 수 없는 건 아닌가. <위선적 영웅>은 얼핏 보면 전후 프랑스-독일의 관계가 엿보이는 혼란한 시대상을 관통하는 인물의 일대기적 구조를 취하는 듯하다. 하지만 이 영화는 진실과 허구의 관계를 계속해서 흔드는 방식으로 관객이 시대극 혹은 장르극의 감상에만 머무르지 않도록 인도한다. 기회가 된다면 여러 번 감상하고픈 영화다. 아직 이 영화의 매력을 온전히 소화하지 못했다.
감독의 전작 중 하나인 단편 <새들이 돌아오는 시간>(2016)을 장편으로 늘여놓은 듯한 영화다. 주요 설정과 배역의 이름들만 봐도, 두 영화가 공유하는 지점들이 간명하게 드러난다. 현대 한국 사회의 가족을 응시하는 두 편의 영화. 지극히 한국적이면서도 범세계적 보편성을 획득할 것만 같은 영화. 작금의 이슈를 대담하게 꺼내들고 있는 듯 보이나 한없이 개인적인 차원으로도 귀결될 수 있는 영화. 가족과 사회를 골고루 비추는 영화라는 점에선 <기생충>(2019)이 불현듯 떠오르기도 한다. 정승오의 가족 군상극이 과연 어떤 양상으로 전개되는가. 그리고 무엇을 동력 삼아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가. 툭 까놓고 말해 <이장>을 대하는 나의 마음은 상당히 복잡하다. <이장>은 <새들이 돌아오는 시간>보다 훨씬 많은 갈래 서사를 품고 있으나 스스로가 가미된 설정들에 짓눌려 살짝 방황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이 영화에 관해 떠올린 미묘한 생각들을 쉽사리 떨쳐낼 수가 없다.
<이장>은 개구쟁이 소년 동민의 모습을 담아내면서 시작한다. 오프닝 신에서 우리는 자연스레 이 아이와 결부된 가정 환경과 부모의 양육에 관해 생각할 수 있다. 담임 선생님께 아무렇지도 않게 육두문자를 뱉는 초등학생의 모습은 그 나잇대의 아이가 가질 법한 천진난만한 면모와는 조금 다르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이의 첫 마디는 친구가 그린 아빠 그림을 헐뜯는 대사다. 아이의 컴플렉스가 뭔지는 몰라도 아버지와 관련한 사연이 깃들어 있다는 점이 감지된다. 그리고 이어지는 자동차 안에서 동민이의 이모들, 즉 동민이의 엄마를 포함한 자매들의 사연이 한 겹 한 겹 쌓여간다. <이장>은 가부장적 체제의 존속과 관련한 담론을 끌어오고 있지만, 무작정 진영 싸움으로만 끌고 가려는 영화처럼 보이진 않는다. 감독은 집단 내부의 결속이 무너지는 순간 또한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다. 막내 승탁을 제외한 자매들 간에 생겨나는 불화와 갈등을 놓치지 않고 담아내면서 인물 배치 등을 통해 대립 구도를 표현하기도 한다. 각각의 독립된 인물들이 서로 날을 세우면서 싸우는 장면들도 종종 포착된다. 그래서 이 영화는 균형감을 확보하는 듯 보인다. 하지만 문제가 바로 이 지점에 있다는 사실이 아이러니다. 가부장 질서에 억눌려 온 여성들의 갈등과 이들이 사회 구성원으로서 겪는 고충들이 연동되는 순간들을 영화가 유려하게 배합해서 늘어놓는 데에는 실패한다.
남편의 부재로 인한 경제활동과 육아의 병행이 가져오는 압박 때문에 휴직 후 퇴사를 권고받은 혜영, 경제적으로 종속되었다는 이유로 당장은 남편의 외도를 눈앞에서 묵인해야 하는 금옥, 결혼 준비금을 마련하기 힘들어하며 생활고에 시달리는 금희, 페미니스트로서의 활동을 방해받은 채 날선 시선을 견뎌내야 하는 혜연. 그리고 승락으로 인해 원치 않는 임신을 하게 된 윤화까지. 다양한 사연의 근간에는 물론 남성 중심 사회의 논리가 일정 부분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방식, 즉 인물의 상황을 지속적으로 환기하는 데 집중하는 전략과 영화가 포커싱한 서사의 모티프가 서로 호응한다고 볼 수 있는지는 의심스럽다. 두 가지 논조가 공존한다. 사회 속에 녹아든 가부장 질서를 풍자하고 꼬집으려는 논조가 가정 내 가부장 질서를 비판하려는 논조와 묘하게 병치된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즉, 이 영화의 방황은 바로 여기서 비롯된다. <이장>의 후반부 선택, 그럼에도 우리는 가족의 자장을 벗어날 수 없으며 가족주의 휴머니즘으로 퉁치고 다시 살아가야만 하는 게 아니냐는 뉘앙스의 묘사들을 보고 있자니 영화가 조금 무책임하다는 생각도 든다. 이건 관객에게 질문을 던지는 행위가 아니라 선택한 소재에 관해 발화하길 포기한 선언과도 같다. <이장>은 영화에 몰입하게 만드는 훌륭한 지점들이 제법 많았음에도 결정적인 몇몇 선택들로 인해 방황하는 영화처럼 느껴졌다. <이장>을 보고 난 뒤, <기생충>이 얼마나 치밀하고 정교한 저글링을 선보이는 영화였는지 다시 한번 깨달았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즉흥적으로 연출된 순간이 없게 느껴질 정도로 치밀한 설계가 돋보이는 영화다. 사회와 유리된 외딴섬으로 인물들을 몰아넣은 채 젠더 담론과 사회적 계급 등 주요한 쟁점을 하나씩 건드리는 방식 또한 영화의 목적이 분명하게 설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영화는 대상화를 거부하고 감정이 오롯이 피어나는 순간을 긍정하는 화법을 곳곳에 배치한다. 그를 통해 사랑과 연대를 자연스럽게 연결하고 있다. 셀린 시아마는 이런 맥락 가운데 인물들 사이의 감정이 고양되는 순간들을 총천연색으로 빛나도록 가공하는 데 있어 그 누구보다도 탁월한 감각을 발휘한다. 감정을 시종 절제하다가 단번에 몰아치게 세팅한 방식은 확실히 인상적이다. 나 역시 엔딩 숏을 곱씹으며 정념의 소용돌이 속에 오래 머무르고 싶었다.
하지만 불현듯 느껴지는 돌출점들이 감흥을 살짝 식게 만들었다. 영화가 소피를 다루는 방식이 의뭉스러워 보인다. 시아마의 선택에 의문이 생긴다. 엘로이즈와 마리안느가 꾸려나가는 서사에 슬쩍 편입된 소피의 사연. 시아마는 세 인물을 통해 사회 구조와 맞닿은 부조리와 한계를 극복해가는 연대의 장을 형성하려 하나 여기서 소피는 여전히 소외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소피는 낙태 행위와 결부된 담론을 관객에게 매개하는 역할만을 수행하는 게 아닌가. 세 사람의 연대가 성립되기 위해선 각자의 가치관과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존립 여부 등 많은 요소를 서로 충분히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 엘로이즈의 엄마가 자리를 비운 이 아늑한 집에서 과연 연대가 실행될 수 있을까? 이 영화의 연대는 단순히 거시적인 차원 혹은 피상적인 논의에만 머무르는 듯하다. 세 사람이 함께 책을 읽고 서로의 역할을 바꾸는 묘사들이 분명 존재하지만, 소피의 존재감은 오히려 없을 때 강화된다. 소피가 없을 때 두 사람은 서로의 시공간을 온전히 공유할 수 있으며, 두 사람은 관계의 전도를 경험할 수 있다. 하지만 소피는 마리안느와도 소통할 수 없고 엘로이즈와도 소통할 수 없다. 소피가 가사 노동을 하면서 겪는 고초는 두 사람에게 그저 잠시 체험하는 일탈 정도로만 소비되는 게 아니었나. 오히려 낙태 시술을 받을 때 곁에서 천진난만하게 코를 만지던 아기만이 소피와 진정으로 교감하는 게 아니었을까.
세 사람의 관계 전복 및 해체에 따른 재구성으로 표상되는 모종의 연대는 결국 영화의 최종 지향점이 아니다. 이 요소는 그저 경유지로서만 얄팍하게 서사 구조에 들러붙어 있는 셈이다. 또한 이 영화는 두 인물이 직면한 문제에 대해 저항하거나 극복하려는 격렬한 운동을 보여주지 않는다. 두 사람은 바꿀 수 없는 현실을 수용한 채 애틋한 감정만을 남긴다. 마리안느는 사랑하는 사람의 곁에 남아 투쟁하지도 않고 엘로이즈는 정략결혼을 파기하려는 결단을 내리지도 않는다. 그저 강조되는 건 두 사람의 비극적인 사랑이 아닌가. 따라서 이 영화가 스스로가 많은 담론을 머금으려고 하려는 시도들이 오히려 영화의 맹점을 두드러지게 만든다. 제한된 시공간에서 벌어지는 간결한 서사임에도 작금의 시대상을 환기하는 이슈가 많이 묻어나기 때문에 텍스트가 풍부해진다는 점은 좋다. 게다가 신화를 매력 있게 재해석하여 서사에 배합하는 전략도 훌륭하다. 그만큼 시아마의 각본과 영화가 많은 매력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진 않겠다. 하지만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감독이 다루고자 하는 모든 지점에서 충분한 깊이를 획득하지는 못한 듯하다. 뛰어난 연출력이 돋보이는 영화였기에 이런 사소한 돌출점들이 치명적인 약점이 되는 듯 느껴진다. 그럼에도 이 영화의 이미지와 사운드가 관객을 설득하는 방식은 여전히 매력이 넘치기에 참으로 생각이 복잡할 뿐이다.
다른 영화를 굳이 끌어오고 싶지는 않지만, 영화가 끝난 뒤 유독 세 편의 영화가 내 머릿속에 맴돌았다는 사실을 부인하진 않겠다. <W의 비극>은 <오프닝 나이트>(1977)와 <쇼걸>(1995)의 잔상을 머금은 연극판 <블랙 스완>(2010) 같은 영화였다. 비슷한 소재를 다룬 영화는 많겠지만 내가 봤던 영화들에 한해서 저 세 편을 적절히 배합한다면 이 영화에 가까워질 것만 같은 생각이 본능적으로 들었다. 그만큼 이 영화는 공간의 이동에 따라 인물의 속성에 변화가 생기는 지점들을 놓치지 않고 묘사한다. 그리고 거칠게 말해 한 편의 성장 드라마가 되기도 한다. 이 영화에는 앞서 언급했던 영화들의 테마가 골고루 녹아 있다. 현실과 허구 사이를 오가는 배우의 고뇌, 쇼비즈니스의 적폐와 고루한 관습을 나열하는 방식, 현실과 이상의 괴리로부터 꿈틀대는 욕망. 그리고 이 영화엔 형언할 수 없는 특유의 감성이 있다. 촬영 시 렌즈에 필터를 입힌 건지 후처리를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프레임 내부에서 뿜어져 나오는 그 아릿한 질감 덕분에 영화의 이미지들이 유독 기억에 남는다. 비록 매끈한 완성도를 자랑하고 있지는 않지만 거칠게 몰아붙이는 데에서 오는 특유의 매력이 80년대 일본의 시대상을 환기하듯 녹아 있는 영화다.
아마도 자크 오디아르의 세계를 파고들기 위해선 불완전한 자가 경계를 넘나드는 양상에 주목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하는 듯하다. 이 영화와 다음 작품인 <예언자>는 자신이 몸담은 곳과 다른 데 위치한 세계를 관통하는 자의 이야기인데, <예언자>가 보다 명확한 공간 속성을 끌어들여 성장을 논한다면, 이 영화에선 그보다는 일반 관객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핍진성이 확보되어 있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몰랐던 요소들이 하나둘씩 나의 앞을 가로막는다. 어렸을 때 몰랐던 부모의 이면, 사회에 녹아드는 과정들, 일과 사랑, 욕망과 타협 등등. 그리고 우리는 꿈도 꾸면서 산다. 꿈을 이루지 못한 채 묻어뒀던 지난날들. 이 영화는 어쩌면 <라라랜드> 속 인물들과 만날 수도 있겠다. 삶을 추동하는 예술, 예술을 지속하게 만드는 삶. 어느 쪽이든 둘은 독립된 채 존재할 수 없다. 우리는 그 점을 주인공의 신체 이미지로 확인할 수 있다. 떨리는 손, 호흡과 눈빛들 말이다.
<내 심장이 건너뛴 박동>은 이 불안정한 젊은이의 인생에 개입되는 요소들이 뿜어내는 리얼리티를 풀 숏 대신 클로즈업으로 포착하고 있다. 오디아르의 핸드헬드는 인물의 감정을 관객과 연결하기 위해 투입된다. 그런데 대개 많은 상황에서 클로즈업이 동반된다. 전체를 포괄하거나 온전한 형상을 포착할 수 없다는 걸 전제로 까는 이 타이트한 핸드헬드 클로즈업을 활용하는 전략이 마음에 든다. 마치 존 카사베츠의 그것과 유사한 느낌을 준다. 이것이 바로 영화를 함부로 현실과 치환될 수 없게 만드는 탁월한 묘사다. 현실과 영화는 늘 긴장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둘 사이의 불투명한 영역이 있다는 걸 인지해야 한다는 표현을 정한석 평론가의 비평집에서 읽었던 기억이 있다.
이미지 출처
- 네이버 영화
- IMDb
- http://blog.livedoor.jp/jikogisei212/archives/2100179.html
- http://dvdtoile.com/Film.php?id=1404&page=4
- https://lecinemaavecungranda.com/2021/05/08/critique-un-heros-tres-discret-1996/
- https://www.festival-cannes.com/en/films/un-heros-tres-discr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