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영화

2021.10.15-2021.10.21

by 드플레

<듄(Dune)> (드니 빌뇌브, 2021)


두 편의 SF 영화를 연출하며 쌓아온 감독의 노하우가 적극 발휘된다. 초대형 피사체를 화면 안에 어떻게 배치하는가의 문제, 어느 구도에서 어떤 심도로 피사체들을 잡아내야 비장미와 우아함이 극대화되는가의 문제들. 빌뇌브는 적어도 이 요소들을 자신의 기획대로 구현하는 데 있어서는 거의 통달한 듯한 면모를 보여준다. 그만큼 <듄>은 화면비를 교차하는 과감한 시도의 위험성을 안고 있음에도, 그 시각적인 위용을 관객에게 제대로 표출하는 영화다. 특히나 그린 스크린을 최소화했다는 제작 비화는 마치 옆 동네 동년배 감독 크리스토퍼 놀란이 옥수수밭을 키우던 걸 떠올리게 한다. 빌뇌브 또한 이 영화에서 로케이션에 심혈을 기울이고 모래 폭풍을 CG가 아닌 천연 물질을 통해 구현하는 등 아날로그 기반의 물성을 재현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고 들었다. 디지털 카메라로 찍은 뒤 필름의 질감과 비슷하게 변환 과정을 거쳤다는 이야기도 들은 것 같다. 그만큼 <듄>의 무대는 빌뇌브의 야심과 욕망이 투사된 완벽한 세계가 된다.


원작을 읽지 않은 나의 불완전한 감상에 기인한 것일 수 있겠지만, 적어도 영화 <듄>의 각색된 시나리오만으로 보자면, 자신을 둘러싼 운명과 예언에 직면한 세계의 구원자가 정체성에 관해 고뇌한다는 스토리는 너무나 진부하게 느껴진다. 미성숙한 구원자는 각성을 통해 거듭나고, 그 자의 노정에는 역경과 고난이 따를 것이고, 그리고 정해진 결말로 갈 것만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든다. 지배-피지배 집단 간의 갈등에 녹아 있는 다층적인 테마들을 파고드는 작업도 물론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결국 영웅 서사가 메인이다. 장엄한 시각 요소와 원시성을 살린 스코어의 합작으로 만들어낸 매혹적인 세계관을 빼놓고 생각한다면, 이 영화를 지탱하는 건 도대체 무엇일까. 대자연에 종속된 인간의 무력함을 엿볼 수 있다고 하기에도 그 시청각적인 재현의 표면에만 머무른다. 그러니까 내게 <듄>은 소설을 성공적으로 영상화한 산물로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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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듄(Dune)>



<토니 에드만(Toni Erdmann)> (마렌 아데, 2016)


<토니 에드만>은 감정을 함부로 주무르지도 않지만, 한편으로는 한곳에 머무르게 하지도 않는다. 이 영화는 어쩌면 감정의 레이어를 탁월하게 응시하는 영화처럼 보인다. 서로의 안부를 묻는 자리의 표면에선 웃음과 관심이 떠돌고 있지만 그 얇디얇은 막을 걷어내면 극도의 어색함과 불편함이 고개를 내밀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리고 영화는 감정과 감정이 교차하는 사이, 그 여백의 존재감을 절대 지나치지 않는 섬세한 면모를 드러낸다. 이 영화가 무언가를 포착하는 방식은 상당히 흥미롭다. 말과 호흡, 육체 이미지나 비언어적 표현들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요소들이 어우러지는 장면들을 아주 자연스럽게 바라본 뒤, 관객의 마음에 스며들도록 한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어떤 방법으로 관객들의 인식 체계를 어디로 집중시켜 어떤 감상을 유도하고 있는가. 여기서 중요하게 짚어야 할 포인트는 바로, 이 영화가 내러티브 전개에 있어서나 촬영에 있어서나 그 어떠한 기교도 부리지 않은 채 인물들의 시선과 감정과 호흡을 담아내고 있다는 점이다. 이를 방증하듯 영화는 빈프리트와 토니가 서로를 오가는 순간을 강조하지 않는다. 틀니는 갈라지고 헐거워진 탓에 잘 끼워지는 만큼 잘 빠지기도 해서, 우리는 그의 입으로 틀니가 들락날락하는 순간을 수도 없이 목격할 수 있다.


<토니 에드만>은 엇갈림에 관한 영화처럼 느껴진다. 모든 엇갈림에 관한 영화 말이다. 시공간의 거시적인 차원부터, 대화나 시선의 교환에 이르기까지, 우리 삶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는 사실상 엇갈리거나 겹치는 영역에서 떠돌고 있다. 순수한 혹은 온전한 것들이 존재할 수 없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나라는 사람이 정의되는 방식은 나를 관통했던(혹은 나와 충돌했던) 것들과 나를 비껴갔던 것들을 통해서만 구현될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빈프리트는 언제나 순수한 빈프리트일 수 없고 언제나 완벽한 토니일 수도 없다. 그의 입을 들락날락하는 틀니 같은 것들이 우리들의 인생을 감싸고 있다. 인물들의 물리적, 심리적 거리는 가까워졌다가 멀어졌다를 반복하는 상태를 벗어날 수 없다. 이것은 치유나 성장 따위로 귀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렇기에 카메라는 틀니와 모자를 장착한 이네스와 그걸 다시 벗은 뒤 상념에 잠긴 이네스의 모습을 함께 잡아내야만 한다. 그리고 일정 시간이 지나면 툭 끊어야만 한다. 무언가를 느끼는 순간들은 단일한 무언가로 수렴될 수 없다. 우리가 보고 듣고 맛볼 수 있는 건, 연속하는 감정의 흐름을 인위적으로 잘라낸 편린들로부터 비롯된다. 그 편린들은 결코 웃음이나 분노 등의 단일 키워드로 귀결되지 않기에, <토니 에드만>이 감정을 담아내는 방식은 지극히 당연하면서도 동시에 그만큼 성취되기 어려운 탁월한 작업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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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 에드만(Toni Erdmann)>



<베놈 2: 렛 데어 비 카니지(Venom: Let There Be Carnage)> (앤디 서키스, 2021)


심비오트 생명체와 인간의 공생. 이 매력적인 설정은 <베놈> 시리즈의 동력이 된다. 에디와 베놈의 관계를 엿보는 데에서 오는 재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베놈 2>는 전작의 연장선 상에서 버디 무비의 질감을 더욱 강화하려는 듯한 묘사들이 많다. 그래서 내게 이 영화는 에디와 베놈이 투닥거리는 로맨틱코미디로 보이기까지 한다. 함께 있으면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다가도 떨어져 있으면 문득 서로 빈자리를 느끼는 두 존재의 사랑싸움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영화의 섬뜩한 부제가 아른거렸다. 대학살이 도래한다는 영화치고는 톤과 톤의 매칭이 굉장히 어긋난 느낌이 든다. 사실 영화의 패착은 카니지와 슈릭의 사연을 굳이 끌고 왔다는 점에서 시작된다. 이 영화에서 캐서디-카니지는 에디-베놈의 대립항이자 거울 이미지로 명확한 지위를 부여받지만, 그 지위는 매우 설득력도 떨어지고 위태롭기만 하다. 안 그래도 호흡이 빠른 플롯의 연결 속에서 서사의 깊이는 찾아볼 수 없다. 각자의 사연은 표면에서 나열될 뿐, 인물 내면에 융화될 수 없다. 게다가 드라마에 공들이지 않고 시원한 액션으로 승부를 보겠다는 의지에서 러닝타임을 짧게 가져간 듯하나 어처구니없게도 이 영화의 액션 묘사는 전혀 매력이 없다. 편집은 최소한의 일관성도 없이 난잡한 인상만을 남기고, 베놈과 카니지의 위용을 느낄게 해줄 촬영은 부재하고, 나름 곳곳에 배치된 액션들은 너무나 빠르게 컷되는 장면들 때문에 존재감을 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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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놈 2: 렛 데어 비 카니지(Venom: Let There Be Carnage)>



<그들이 어떻게 추락하는지 보라(Regarde les hommes tomber)> (자크 오디아르, 1994)


시점이 다른 두 서사가 병치된다. 정확히는 매너리즘과 공허감을 곱씹는 위태로운 중년 시몽의 서사에 다른 사연이 끼어드는 방식이다. 미키를 향한 시몽의 마음은 복잡하다. 공권력에 기대지 않고 미키를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복수하는 것. 아니 정확하지는 않다. 그가 복수를 이행할지 말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미키를 끔찍이도 아낀다는 마음은 느껴진다. 이때 보란 듯 끼어드는 다른 사연이 있다. 여기도 두 남자의 이야기다. 마치 미키가 겪었던 일에 관한 전사라도 되는 듯하다. 노인과 청년은 우연히 만났지만, 뜻하지 않게 서로에게 의지할 수 있는 관계가 된다. 사립 탐정처럼 진실에 다가가려는 시몽의 모습 그리고 이 두 남자가 함께하는 삶에 적응해나가는 과정이 교차되면서 점점 정황은 명확해진다.


그렇다면 중요한 건, 어긋났던 플롯들의 시공간이 합쳐지는 순간일까. 시몽이 내리는 선택, 그리고 두 남자가 상황을 대처하는 방식. 결국 시몽과 막스와 조니 각자에게 결핍된 것들은 무엇이었나. 그들은 무엇을 위해서 사는가. 영화의 제목을 떠올린다. 그들(hommes=men)이 '추락'하는 걸 보라는 제목 말이다. 결국 영화의 서술 트릭, 즉 플롯의 교차와 병치를 통한 조작은 결국 인물들이 소중히 여겼던 것들이 무엇인지에 관해 강조하기 위해 도입된다. 영화는 사실 시몽이 미키에게 가졌던 마음에 관한 상세한 부연 설명 없이 그 자리를 비워둔 채 그의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그렇다면 그 빈자리는? 그렇다. 막스와 조니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굳게 닫힌 시몽의 내면까지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게 되는 셈이다. 물론 시몽의 선택은 관객 각자가 받아들이기 나름이겠지만, 적어도 영화가 선택한 전략 자체는 극의 테마를 강조하는 화법으로써 전혀 부족함이 없다. 그리고 이에 덧칠되는 요소들이 인상적이다. 이들을 파고드는 감정들, 이들을 맴도는 감정들 그리고 이들이 표현하는 감정들 말이다.


오디아르의 영화를 보고 있으면, 그가 스스로 이야기꾼의 자질을 숨길 생각이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확신에 가득 찬 스토리텔링, 과감하면서도 이음새가 매끄러운 편집술이라든가 그리고 특히나 음악을 자기 입맛대로 영화에 녹여내는 세련된 손길은 장편 데뷔작에서부터 존재감을 드러낸다. 이 영화 역시 재기 발랄한 모양새로 그 특유의 스타일의 시초를 알린다. 이 영화는 한편으로 마티유 카소비츠의 영화이기도 하다. 청년 시절 마티유 카소비츠의 연기가 매우 인상 깊다. <위선적 영웅>(1996) 속 카소비츠의 퍼포먼스 또한 매력이 넘쳤지만, 이 영화에서 배역을 소화해 내는 모습은 정말 뇌리에 남는다. 그의 눈빛에는 많은 것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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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어떻게 추락하는지 보라(Regarde les hommes tomber)>



<나쁜 피(Mauvais sang)> (레오스 카락스, 1986)


<나쁜 피>는 제멋대로 흩날리는 영화다. 내러티브 구성이나 장르 문법에 묶여 있는 영화임에도 그런 것들에 전혀 관심이 없다는 듯이 내지르는 당돌한 태도가 묘하게 마음에 든다. 장르성이 필연적으로 삽입되어야만 하는 순간들은 그저 인물들의 감정과 육체를 면밀히 담기 위해서, 사람들을 한자리에 모이게 했을 때 생길 수 있는 일들을 관찰하기 위해서만 존재한다. 그래서 바이러스의 이름이나 범죄 작전 계획 같은 요소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혜성의 접근으로 기상 이변이 생겼다는 설정마저도 그저 감독이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뒷받침하기 위한 배경에 지나지 않는다. 살이 익을 듯 더웠다가 갑자기 눈이 오는 상황마저도 인물들의 감정 묘사를 다층적으로 가공하는 과정에 소모된다. 그러니까 이 영화에서 느껴지는 건 젊은 시절 카락스의 패기 그 자체다. 그리고 내겐 그게 당황스럽다거나 꼴불견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우울해지기 전에 레코드를 골라달라는 안나를 향해 라디오가 좋다고 말하는 알렉스의 모습. 그리고 알렉스는 즉흥으로 선택한 라디오 채널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언제나 마음에 든다고 말한다. 그가 음악을 느끼다가도 잠시 사색하는 순간들. 그리고 힘차게 달리는 드니 라방 혹은 알렉스 혹은 카락스의 운동 그 자체. 어디까지 뛰었을까, 알렉스는 결국 있던 자리로 되돌아온다. <나쁜 피>의 인물들은 모두 저마다 어긋난 사랑을 하는 듯 보여도 결국은 인물들이 함께 느슨한 그물망에 걸려 몸부림치고 있다. 그들은 사랑을 말하고 육체를 맞대면서도 고독할 수밖에 없다. 누군가에게 향하는 운동, 그리고 어딘가로부터 벗어나려는 운동, 그리고 그 사이엔 닿을 수 없는 것들을 절실히 동경하거나 혹은 힘껏 감각하려는 인물들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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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피(Mauvais sang)>



이미지 출처


- 네이버 영화

- IMDb

- https://www.filmaffinity.com/au/filmimages.php?movie_id=579956

- http://zeohealer.blogspot.com/2012/09/regarde-les-hommes-tomber.html

- http://rarefilm.net/regarde-les-hommes-tomber-see-how-they-fall-1994-jacques-audiard-jean-louis-trintignant-jean-yanne-mathieu-kassovitz-crime-dra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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