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0.22-2021.10.28
<아네트>(2021)는 자연스럽지 않은 영화다. 정말 기이하고 당혹스러운 무드가 영화에 내내 배어 있다고 밖에 말할 수 없겠다. ‘We Love Each Other So Much’를 아담 드라이버와 마리옹 코티야르가 함께 부르는 시퀀스의 도입부는 어떠했는가. 화사한 자연광과 다채로운 색상 배치로 구성된 미장센에 끼어들기엔 영 어울리지 않는 스코어의 비장한 멜로디가 괴리감을 유발한다. 두 사람은 섹스를 하면서도 열심히 노래를 부른다. 이건 서로를 향한 진실한 사랑의 고백일까 아니면 정해진 가사를 의무감에 읊조리는 기계적인 되풀이일까. 사실 나는 이 곡의 멜로디가 너무 좋아서 영화를 관람한 뒤 반복해서 들었다. 그러니까 이 시퀀스에 관해 의문을 제기하려는 시도는 스코어에 관한 호불호를 따지자는 말이 아니다. 다시 말해 장면 자체가 뿜어내는 무드의 문제다. 그들의 사랑이 진정으로 관객에게 스며들고 있는가? 오히려 더 와닿는 건, 중요 부위의 노출도를 의식하면서 열정적으로 연기에 임하는 배우들의 프로정신이 아닐까. 즉, 이 장면은 감정의 전달체가 되기에는 어색하고, 그 자체의 미학을 찾아내기에도 어정쩡하다. 이건 <아네트>의 ‘자연스럽지 않은’ 수많은 구간 가운데 하나다.
그렇다면 영화 내내 반복되는 부자연스러운 질감이 <아네트>를 수렁으로 내몰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 영화의 입구와 출구를 모호하게 처리하는 선택들, 무대의 중첩으로 인해 존재론적 성격이 불분명해진 영역들, 영화 내 장르의 혼용으로 경계를 무너뜨리는 화법까지. 오히려 나는 이런 요소로부터 나오는 생경함이 <아네트>를 특별하게 가공한다고 생각한다. 많은 이들이 주목하는 영화의 도입부를 떠올려 보자.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이 영화에서 가장 손쉽게 감지되는 건 제4의 벽을 깨는 시도들이다. 그런데 내레이션으로 시작되는 <아네트>가 과연 영사되는 스크린과 극장의 관객 사이의 그 벽을 제4의 벽으로 여기고 있는가? 내레이션은 숨죽여 이 쇼에 집중하라고 말한다. 방귀도 뀌지 말고, 웃거나 울지도 말고 급기야 숨까지 참으면서 쇼에 몰입하라는 식으로 익살스럽게 읊조린다. 그렇다. 이건 극장의 관객에게 던지는 메시지처럼 들린다...는 나의 착각이었다! 내레이션이 끝나면 개입되는 사운드가 있다. 내레이션의 주문에 맞춰서 실행되는 관객의 심호흡 소리다. 그렇다면 <아네트>가 경계를 허무는 시도는 통상적인 제4의 벽을 깨는 작업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의구심이 생긴다. 이 영화가 가닿고자 하는 지점들은 영화 속과 현실 영역 모두에 공존한다. 공연장에 있는 극 내부의 관객이 헨리와 소통하다가도 헨리가 질문을 던질 때 스크린으로 마주한 현실의 관객들이 고려되는 순간들도 존재한다. 그래서 이 영화를 지배하는 기운 혹은 에너지가 있다면, 그건 끊임없이 생산 주체로서의 예술가와 콘텐츠 수용자 사이의 상호 작용(극 내부든 스크린 너머든)을 의식하는 모종의 몸부림이지 않을까. 여러 번 곱씹어 보고 싶은 영화다.
<디판>에는 의아하게 느껴지는 변곡점이 있다. 급격하게 장르성이 짙어지는 듯한 이 거친 전환은 다소 아쉽다. 그런데 왜 그랬을지는 이해가 간다. 지금껏 그의 육체에 한껏 밀착해 사실성을 확보하려 했던 <디판>에서 후반부의 액션 시퀀스는 굉장히 이질적이다. 장르적 질감이 묻어난다는 점에서만 그런 건 아니다. 사실 디판의 모습을 카메라가 응시하는 방식을 살펴보고 싶다. 폭발로 인해 건물 내부는 연기로 가득하다. 카메라는 시야가 방해받는 상황을 그대로 담아낸다. 디판의 모습은 실루엣만 살짝 감지될 뿐 제대로 보이지 않는데 카메라는 그 연기를 뚫고 디판의 행위를 선명하게 담으려고 하지 않는다. 이 살육의 현장은 반군으로서 여러 참혹한 현장에 휘말렸던 디판의 과거가 트라우마처럼 되살아나는 곳이다. 카메라와 디판의 관계를 흩뜨려놓는 뿌연 연기는 바로 내부자들과 외부자들을 철저하게 분리하는 경계처럼 보인다. 외부자 오디아르는 절대로 내부자 디판이 겪었던, 겪고 있는, 겪을 참상을 공감할 수도 직시할 수도 없다. 관객들 또한 그간 디판의 사연에 한껏 몰입해 영화의 호흡을 따라왔다. 하지만 이런 장면들이 오히려 관객에게 "영화는 현실을 대체할 수 없다"고 일깨워 주는 듯한 효과를 유발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내겐 <디판>의 건물 내부 액션에서 활용된 촬영법이 장르 문법에 충실히 복무한다기보단 영화적인 재현과 연출 의식을 미약하게나마 고찰하려는 시도에서 비롯된 듯 느껴진다. 여전히 오디아르의 영화에서는 현실과 영화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의식해야 하는지에 관한 화두가 유지되는 듯하다.
왜 두 남자가 싸우는가? 영화는 두 남자의 혈투 장면과 이를 바라보는 마르그리트의 모습을 교차해서 보여준다. 하지만 굳이 이 영화에서 두 남자의 전투 액션을 서스펜스를 가미해 박진감 넘치게 담아냈어야 하는지는 살짝 의문이 든다. 이건 몰입감이 훌륭했던 것과는 별개의 문제다. 포커싱을 결투에 맞추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오히려 이 결투가 누굴 위한, 무엇을 위한 결투인지 허망한 심정으로 세상에 되묻는 마르그리트의 심정을 조금 더 강조해서 보여주는 편이 좋았을 법 했다. 물론 이 최후의 결투 자체는 이 답답한 상황을 역설적으로 강조하는 장치긴 하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영화를 지배하는 세련된 영상미, 익숙한 할리우드 배우들의 안정적인 연기 등의 요소가 몰입감을 살짝 안 좋은 쪽으로 매만지는 느낌이다. 그런데 한편으로 이 영화는 자신이 선택한 '진실'에 대해 모호한 입장으로 선회하지 않기 때문에 그 화법의 힘을 잃지 않는다는 점이 좋았다. 상황이 종료된 이후 사람들에게 환대 받는 자와 그 뒤를 초라하게 따라가는 마르그리트를 대비해 담아낸 장면, 그리고 마르그리트와 시어머니와의 중요한 대화 신(시어머니의 고백)을 배치하고 마르그리트의 리액션까지 분명하게 포착하는 구간들, 그리고 엔딩 숏에 담아낸 요소를 통해 이 영화가 어떤 태도로 이야기를 다루는지 파악할 수 있다. 영화는 서사 전개에 있어 필요한 지점들을 반드시 짚으면서도 적어도 중요한 지점의 진정성을 훼손하는 화법을 구사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런 맥락과는 별개로 모든 역사가 진실로 치환되는 건 불가능하다. <라스트 듀얼: 최후의 결투>의 각본조차도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각색된 산물인데다가 세 명의 관점을 경유하여 사건을 둘러싼 맥락을 정밀하게 쪼갠 뒤 응시한다 해도 여전히 순도 백 퍼센트의 진실은 확보될 수 없다. 따라서 남는 건 각자의 주장과 의견들, 그리고 목소리와 몸부림이다. 그리고 그걸 어떻게 바라볼지에 관한 문제다. 따라서 이 영화가 한 여성이 겪은 억울한 사건을 완벽하게 중립적으로 고찰할 수는 없다는 점 또한 분명하다. 그렇지만 <라스트 듀얼>은 목적과 의도를 선명히 함으로써 시시비비가 개입될 여지를 차단하려는 듯 보인다. 3막의 시작에 등장하는 'the truth'가 다른 글자가 사라짐에도 조금 더 오래 남아 강조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라스트 듀얼>은 적어도 자신이 가야 할 길을 분명하게 알고 있다. 그리고 이건 제작 비화에서 밝혀졌듯 분명한 협업의 결과물로서의 성취다. 관점과 화법의 변화는 있을지언정 꾸준히 관련된 소재를 자신의 영화에 녹여내왔던 노년의 남성 감독 리들리 스콧의 접근은 현재진행형처럼 보인다.
P.S. 라스트 듀얼 = 최후의 결투 ... 번역의 상태가...?
그 긴 시간의 롱테이크 가운데 편집점이 없었다는 사실이 매우 놀랍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 난 뒤 자연스레 떠오르는 의문, 왜 핸드헬드 원테이크여야만 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사실 나는 이 선택을 지지하는 편이다. 숏을 쪼개는 방식으로는 성취할 수 없는 이 영화만의 온전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1917>(2019)처럼 안정감이 확보된 스테디캠이 아닌, 울렁대는 핸드헬드로 담아낸 장면이 두 시간이 넘도록 지속된다는 점에서 호불호가 갈릴 수는 있겠다. 하지만 적어도 내겐 <1917>이 선택했던 롱테이크보다 <빅토리아>가 고집하는 롱테이크가 훨씬 유효한 접근처럼 보인다. 이건 영화가 무엇을 표현하려 들고 어떤 걸 담아내고 싶은지에 관한 문제다.
빅토리아는 마드리드에서 베를린으로 이주한지 얼마 되지 않은 이방인이며, 빅토리아가 클럽에서 만나는 사람들 또한 베를린 토박이라는 용어를 강조하면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늘 의식하는 주변부의 한량 청년들이다. 다섯 명의 청춘이 부유하는 베를린에서 가늠할 수 있는 건 타자와의 접속과 연대, 그리고 서로가 서로에게 위안이 되어줄 수 있는지의 여부다. <빅토리아>는 이런 테마를 인물에게 밀착한 원테이크를 통해 구현하려고 한다. 이 영화의 감정선이 끊어질 수 없는 이유는 당연히 분절되지 않은 장면들에 기반할 수 있으며, 그래서 이 영화의 촬영은 곧 화법이고 테마고 주제 의식으로 승화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빅토리아>는 치명적인 맹점 또한 품고 있는 영화다. 관객된 입장에서 인물들의 내면과 접속할 수 있는 통로는 당장 카메라가 핸드헬드 클로즈업으로 들이미는 생생한 얼굴뿐이다. 그리고 원테이크라는 방식 자체가 곧 영화 내 선택지를 제한하는 지점들도 엄청 많다. 플래시백이나 교차 편집 등을 동원할 수 없으니 당위성 확보를 위해서 공간이나 캐릭터의 활용도를 희생해야 하는 구간 또한 많아지기 때문이다. 이런 맹점들 덕분에 <빅토리아>는 자연스러운 감정선 구현 대신 부자연스러운 주입 효과를 유도하는 부작용에 노출된다. 게다가 이 영화의 즉흥성은 사전에 매우 치밀하게 기획된 즉흥성의 환영에 지나지 않는다. 즉, 인물이 자신에게 일어날 일을 예측할 수 없는 상태가 관객에게 전이되긴 하지만 그 자체의 몰입도와는 별개로 작동하는 프레임 외부의 원리들을 무시할 수는 없는 셈이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자신이 설정한 목적을 위해 선택할 것과 포기할 것을 명확히 인지한 뒤 내달린다. 그 뚝심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목표한 바를 성취한 듯 보인다. 촌극이 얼추 마무리된 뒤, 터덜터덜 걸어가는 인물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머릿속이 여러 생각으로 가득찬다. 저 배우가 보여준 퍼포먼스가 너무나 경이롭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저 혼란과 불안 그리고 억압에 둘러싸였던 젊은이가 낯선 땅 베를린에 과연 안착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기도 한다. 그리고 인물에게 밀착했던 카메라가 마침내 우두커니 서서 그 사람을 떠나보낸다. 이를 바라보는 그 뒷모습에서 나는 역설적이게도 인물의 공허한 내면을 아주 선명하게 볼 수 있다. 그리고 내가 느낀 이 감정들은 <빅토리아>가 고집했던 연속된 흐름에 동화되지 않았다면 느낄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 또한 분명하다.
노련한 이야기꾼인 자크 오디아르는 <러스트 앤 본>에서 의외로 투박하고 상투적인 화술을 선보이는 것 같다. 얼핏 보면 너무나도 평면적인 전개로 가득하고, 극적인 이벤트가 너무나도 손쉽게 동원됐다가도 금방 퇴장하는 듯한 인상도 풍긴다. 인물들에겐 너무나도 명확한 변화의 계기가 허락된다. 인물들이 서로를 구원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모종의 관문을 거쳐야만 하는 것일까. 그런데 <러스트 앤 본>은 사실 인물들에게 여러 지점에서 각자의 언행을 추동하는 당위 요소를 제공하고는 있지만, 그들의 경로를 재단하거나 제한하려 들지는 않는다. 다시 말해 서사 구조와 긴밀하게 결부되지 않는 구간들이 존재감을 확실하게 드러낸다고 해야 할까. 그런 의미에서 스테파니가 다시 범고래와 교감하려는 장면의 운동성이 기억에 남는다.
또 기억에 남는 구간은 아마도 여기서부터였다. 알리는 밖으로 나가 산책이라도 하자고 보채는데 스테파니는 단칼에 거절한다. 그런데 바로 다음 숏에서 스테파니는 알리와 함께 밖으로 나온다. 왜 영화는 스테파니의 고뇌를 충분히 담아내지 않고 슬쩍 생략한 걸까. 나는 여기서 이 영화가 인물들의 감정선에 몰입할 수 있는 단서를 일부러 비워놓으려고 하는 것일지 혹은 그저 소홀했던 것일지에 관해 고민에 빠진다. 영화를 한 번밖에 감상하지 않았기 때문에 단정 짓기는 어렵겠지만, 어쩐지 내겐 감독의 선택이 전자에 가까워 보인다. 결국 이 영화는 서사 구조를 탄탄히 하는 데엔 관심이 없는 듯하다. 그러면 무엇이 남는가. 많은 이들이 이야기했듯 육체만이 있다. 오디아르 영화 가운데 이토록 육체의 물성이 짙게 묻어 나오는 영화가 있었는가. 그러니까 이 영화의 육체는 무언가에 종속되었다기보단 그 자체로 최상위의 주체처럼 보인다. 서사 전개의 맹점들이 거슬릴 틈도 없이 육체 이미지들의 연쇄가 내게 파고드는 느낌이었다. 여기엔 정밀한 논리가 필요하지 않다. 그리고 이런 화법으로 인해 관객들의 호불호가 갈릴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시대상을 환기하는 고증이라든가 자연 풍광의 규모와 디테일을 동시에 담아내는 촬영이 인상 깊긴 하지만, 인물의 극적 변화만을 위해 변주되는 플롯의 나열은 피로감을 불러온다. 음악은 벅차오르는 감정을 섬세하게 유도하고 있지만 그런 장치들이 정신없이 인물들의 앞길을 재단해온 각본과 호응하는지는 모르겠다. 영화는 시종 인디언, 자연, 야생적 삶, 혼돈/백인, 도시, 교양 있는 삶, 규율 등의 대비로 표상되는 이분법을 거칠게 형상화할 뿐이지 그로 인해 중첩되는 세밀한 갈래 서사는 생략한 채 치정극 기반의 듬성듬성 구멍 난 전개를 고집한다. 가령 트리스탄은 이분화된 구도를 깨부수는 듯한 인물로 묘사되는데, 그가 경계를 넘나드는 과정에서 겪는 고뇌의 순간을 영화가 충분히 짚어내는 데는 실패하는 듯하다. 게다가 갈등의 봉합은 부적응자(수잔나, 이자벨 2세 등)가 소거된 상황을 전제로 한 뒤 급작스럽게 발생한다. 여러모로 오묘한 작품이다. 시대상을 관통하는 가족사를 다루는 데 있어 부각과 소거를 확실히 하면서 극을 마무리하는 데는 성공한 영화긴 하나, 오감을 붙드는 유려한 이미지들과 신비한 기운으로 둘러싸인 인디언의 내레이션이 관객의 내면 영역에 손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영화의 맹점들이 가려지는 건 아닐까.
P.S. 젊었을 적 장발의 브래드 피트를 스크린으로 접하니 역시 감탄만 나오더라...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IM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