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영화

2021.10.29-2021.11.04

by 드플레

<내 마음을 읽어 봐(Sur mes lèvres)> (자크 오디아르, 2001)


칼라가 자신을 옭아매는 폐쇄성을 허물고 세계를 오가기 위해서 필요한 건 무엇인가. 서사 측면에서 영화는 사실 편의주의적인 선택을 내린다. 비일상공간에서의 범죄 행위가 개입이 되어야 하고, 낯선 이와 모종의 관계를 형성해야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때 영화에서 강조되는 건 경계를 넘나드는 인물의 내적 고뇌가 아니라 변모하거나 혹은 변화하는 모습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오디아르의 영화에선 인물에게 영향을 미치는 기저 의식 혹은 심리 요소들이 관객한테 친절히 제시될 수 없는 것 같다. 그들이 느끼고 생각하는 것들은 인물들 각자의 내면 혹은 개인 차원의 시공간에서 빠져나올 수 없고 관객은 이를 능동적으로 유추해야 한다. 그래서 오디아르의 세계에선 대부분 '왜' 보다 '어떻게'가 중요한 키워드로 작용한다. 원인과 인과를 밀도 있게 추적한다기보단 변화를 감각하는 인물들의 모습 자체에 주목한다.


그런 의미에서 <내 마음을 읽어 봐>는 칼라와 폴 사이의 권력 이동 및 전복이 형상화되는 과정을 음미하기에 좋은 영화가 된다. 역시나 중요한 건 신체와 맞닿은 시청각적인 이미지의 연쇄다. 특히나 청각에 문제가 있는 칼라가 자신의 존재성을 세계로 확장해나가려는 모습들은 장르 색채와 맞물리면서 텐션을 만들어낸다. 다만 의뭉스럽게 느껴지는 보호관찰관 마송의 서사는 검토가 필요해 보인다. 촘촘하게 빌드업되는 칼라-폴의 이야기와는 다르게, 마송은 폴을 매개로 극에 개입하고 있을 뿐이다. 이런 서사 배분을 옴니버스식 구성의 재치 있는 변주로 여기기엔 다소 버겁다. 예상치 못한 시점에 칼라와 마송이 서로의 서사에 개입하는 순간에 이르면 극의 밀도와는 다소 어긋난 배치라는 인상을 지울 수는 없겠다. 물론 마송은 칼라와 대비를 이루는 존재이기 때문에 영화 자체를 통속적인 멜로나 범죄 스릴러에만 머물지 않게 하기도 하며 테마의 확립을 도와준다는 점에서 필요하긴 하나, 상당히 거칠고 투박하게 칼라와 폴의 사연에 개입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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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을 읽어 봐(Sur mes lèvres)>



<시스터스 브라더스(The Sisters Brothers)> (자크 오디아르, 2018)


나는 웨스턴 장르와 그리 친하지 않은 것 같다. 서부극을 많이 접하지도 못했고 익숙하지도 않다. 유명한 고전이나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도 잘 모른다. 그런데 대놓고 서부극처럼 보이는 이 영화가 마음에 들었던 이유는 뭘까.<시스터스 브라더스>엔 땀방울 하나도 그냥 흘려보내기 어려운 극도의 긴장감도 없고, 흩날리는 모래먼지 사이로 잔혹하게 빛나는 복수의 카타르시스도 없다. 오디아르는 이 영화에서 늘 해오던 작업에 몰두하는 것 같다. 장르를 경유하면서도 특유의 화술과 리듬감을 잃지 않는다. 게다가 그가 재능을 뽐내오던 통상의 범죄 스릴러류와는 살짝 다른 장르임에도, 그의 테마와 융화되는 지점들이 굉장히 매끄럽게 펼쳐진다. 이 영화에선 서사에 종속되지 않는 몇몇 구간들이 유독 기억에 남는다. 어쩌면 영화 자체가 밀도 있는 서사 구축에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존 C. 라일리의 힘으로 만들어낸 몇몇 인상 깊은 장면들은 관객에게 아주 자연스럽게 스며든다. 베테랑 살인청부업자 시스터스 형제와 그를 피해 달아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중심을 이루지만, 어쩐지 그런 긴박한 추격전보다는 거기서 멀어져 가는 것들이 더 존재감 있어 보인다. 그래서 <시스터스 브라더스>의 소소한 에피소드들은 아주 오묘한 질감의 휴머니즘을 만들어낸다. 극단적인 갈등과 파국을 슬쩍 덜어낸 자리엔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인생의 굴곡만이 남는다. 결국 어떻게 지속할지에 관한 문제다. 그리고 언제 멈추고 무엇을 위해 멈추어야 하는지 느껴야 하는 문제다.


P.S. 찰리의 독백 비슷한 장면... 이 구간에 대한 나만의 해답을 아직 찾지 못했다.


P.S. 영자원 자크 오디아르 특별전 완료...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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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터스 브라더스(The Sisters Brothers)>



<쥬만지: 넥스트 레벨(Jumanji: The Next Level)> (제이크 캐스단, 2019)


어처구니없는 설정들로 둘러 싸인 영화의 작법을 보고 있자니 헛웃음이 나왔다. 자신감에서 비롯된 걸까 아니면 무리수라는 걸 알면서도 밀어붙이는 뻔뻔함에서 비롯된 것일까. 전편은 그나마 최소한의 명분과 당위를 갖춘 흔적이라도 보였던 전개였지만, <쥬만지: 넥스트 레벨>은 정말 사람을 당황하게 만든다. 사람마다 각기 다른 특성을 코미디 요소로 잘 써먹고는 있으나, 이런 설정들이 자칫 잘못하면 마냥 불순한 희화화로 귀결될 가능성도 있다. 이렇게 코미디 포인트를 적극 배치하는 화술로 인해 영화는 마치 플레이어들이 세 개의 목숨에 전전긍긍하는 것처럼 살얼음판을 걷는 듯하다.


사실 다른 요소들은 전작의 답습에다가 변주나 변형조차도 얄팍한 수준에 머무르기 때문에 딱히 할 말은 없지만 묘하게 나의 관심을 끄는 요소가 있었다. 주요 인물들이 아닌, 매우 비중이 적은 캐릭터다. 바로 나이젤이다. 그렇다. 쥬만지 게임 속 플레이어들을 안내하는 npc 나이젤 말이다. 전작에 이어 다시 게임으로 재진입한 인물들은 나이젤을 보며 잠시나마 반가워할지도 모르겠다. 그가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말이다. 나이젤은 전작에서 브레이브스톤 일행에게 쥬만지를 위기에서 구해달라고 말한다. 이번에도 똑같다. 대위기를 막아달라고 요청한다. 사실 게임에서 나이젤은 시작과 끝에서만 등장하는 존재다. 그로 인해 미션이 생기고 정보가 제시되면서 게임이 가동될 수 있으며, 게임의 엔딩 크레딧을 보기 위해선(통상의 비디오 게임들이 그러듯) 나이젤과 악수를 하면서 매듭을 지어야 한다.


나이젤 정도면 사실 npc치고는 굉장히 서사를 많이 부여받은 행운(?)의 인물이다. 마을의 시민 1, 시민 2와 같은 포지션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번 편에서 전작의 인물 네 명 중에 둘만 그대로 게임에 진입하고 나머지 둘은 새로운 멤버로 교체되는데, 이 새 멤버들을 향해 원년 멤버들이 나이젤은 npc니까 같은 대사만 반복한다고 알려주면서 앞으로 나이젤의 말을 듣고 이렇게 하시면 된다고 소개하는 장면에 이르면, 인물들이 나이젤을 철저한 배경으로서의 npc로 취급한다기보단 어떤 모종의 인격체처럼 여기는 듯한 인상을 살짝 받았다. 말하자면 나이젤의 npc로서의 속성이 곧 그의 정체성처럼 작용한다고 해야 하나. 나이젤의 대사를 예측하고, 나이젤이 남긴 말의 의미를 해석하려는 원년 멤버들의 모습에서 나는 현실에서 내가 게임하던 모습을 떠올렸다. 비디오게임이든 PC 게임이든 npc에게 퀘스트를 반복해서 받거나 계속 말을 걸어야 할 때, 나는 그의 대사를 예측하기도 했고 말 좀 그만하라는 식으로 보채는 마음을 가진 적도 있다. 어느 순간 가상 영역의 존재가 모종의 정체성을 희미하게 획득한 존재로 내 지각 체계에 개입하고 있다.


맥락은 살짝 다를지 몰라도 게임 속 npc를 서사의 주체로 내세운 <프리 가이>(2021)가 떠오른다. 2021년에 업데이트된 쥬만지 특별 DLC가 있다면, 나이젤 역시 가이처럼 자의식을 가진 채 자신의 루틴에 의문을 품게 될 날이 올까? 이를테면 쥬만지를 외치면서 게임을 클리어한 플레이어들이 엔딩을 보지 못하게 악수할 손을 절대 내주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인물들에게 일부러 잘못된 정보를 알려줘서 오류를 만들어낸다든지 말이다. 재밌는 상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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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쥬만지: 넥스트 레벨(Jumanji: The Next Level)>




<이터널스>(2021)에 대한 코멘트는 미리 올렸던 별도의 글로 대체합니다.


https://brunch.co.kr/@cena0223/141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IM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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