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영화

2021.11.05-2021.11.11

by 드플레

<쿵후 선생(推手, Pushing Hands)> (이안, 1992)


소통의 오류, 가족의 붕괴와 결합, 문화의 충돌이 어우러진 사회상을 간결하게 압축하면서도 날카롭게 해부한다. <쿵후 선생>은 이안의 자전적 요소가 녹아 있는 영화처럼 보인다. 그가 각본을 직접 쓴 데뷔작인데, 정제되지 않은 거친 질감보다도 관객의 몰입감을 조절하는 매끄러운 터치가 느껴진다는 점이 인상 깊다. 그런데 시종 치밀하게 갈등을 중첩하며 사회상을 반영하던 영화의 리얼리티가 다소 어그러지는 순간들이 있다. 츄 선생의 태극권이 극의 흐름에 개입될 때마다 묘하게 판타지 느낌이 난다고 해야 할까. 특히나 사장과 대치하는 시퀀스에 이르면, 내가 태극권의 위력에 무지한 탓이라 그런 건지 극의 전개가 다소 비현실적이고 당돌하다는 생각에 실소를 금치 못하게 된다. 직원들은 그만두겠다며 줄줄이 사표를 던지고 사장은 갱을 동원해서 그를 위협하고, 사람들은 태극권에 혼쭐이 난다. 어쩌면 이 영화는 지금껏 지켜온 츄 선생 평생의 신념과 가치들에 관한 이야기가 아닌가. 그리고 앞으로 지켜내야만 하는 것들을 위해 무엇을 포기하고 무엇을 수용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영화는 낯선 땅의 늙은 이방인들의 사연을 끈질기게 포착한 뒤 울림 있는 마무리를 선사하지만, 여기엔 따스함과 스산함이 함께 머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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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쿵후 선생(推手, Pushing Hands)>



<지존무상(至尊無上: Casino Raiders)> (왕정, 향화승, 1989)


그들은 끝내 타고난 운명의 노선에서 벗어나기 버거웠던 걸까. 선택하는 듯 착각하고 있으나 실은 받아들여야만 하는 선택지만 있는 건 아닐까. 동전 뒤집기 따위로 결정지을 수 있는 게 아닌 것처럼 말이다. 당대 홍콩 영화를 잘 모르긴 하지만, 분명 직관적인 감정의 덩어리들을 관객에게 강속구로 꽂아 넣으려는 투박한 화법이 매 장면 넘실대는 건 알겠다. 여기엔 고도로 조직화된 은유 따윈 없다. 담배와 사랑 그리고 우정, 신념에 따른 움직임만이 있다. 종종 영화는 중대한 기로에 선 인물들의 고뇌를 담아내려고 한다. 그리고 힘겨운 선택 직후의 여진을 형상화하는 특유의 질감이 편집과 음악으로 덧칠된 채 직선 코스로 내게 당도한다. 당도한다기보단 주입당하는 느낌이 더 크긴 하다. 호오를 따지기 전에, 이런 화법은 분명 거칠지만 수긍이 갈 법도 한 방식이다. 살짝 이 영화가 독특했다고 느낀 이유는, 예상을 뒤집는 듯한, 아니 정확히는 물음표를 느낌표로 바꿔주는 구간들이 극의 몰입감을 조절해 주고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은근히 사람을 골려 먹을 줄 아는 영화다. 광둥어 버전으로 보는 게 훨씬 좋은 듯하다. 중국어 더빙 버전은 원본이 가진 특유의 맛이 안 산다. 그리고 유덕화는 담배를 정말 맛깔나게 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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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존무상(至尊無上: Casino Raiders)>



<세버그(Seburg)> (베네딕트 앤드류, 2019)


문득 떠오른 영화가 있다. 존 카사베츠의 <영향 아래 있는 여자>(1974)를 보는 관객은 망가져 가는 한 여자 메이블의 모습을 통해 그녀를 둘러싼 가정 내부부터 시작해서 인간관계, 사회적 구성원으로서의 책무 등 여러 맥락과 요인을 짚어보고자 하는 능동적인 관람에 몰두할 수 있다. 그리고 관객은 마침내 메이블이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를 헤아리는 단계로 진입한 뒤 그녀의 내면과 동화되려는 시도를 할 수 있게 된다. 영화가 선택한 방식이 그렇게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존 카사베츠의 카메라는 인물의 고통을 대상화하는 방식을 통해 서사를 이끌어 가려고 하지 않고, 그저 메이블이 겪는 신경 쇠약 증상 등 이상 반응과 행위를 판단과 개입 없이 관조하면서 그녀를 탐구하려고 한다. 하지만 <세버그>(2019)에서 느껴지는 건, 그런 게 전혀 아니었다.


애초에 <영향 아래 있는 여자>는 메이블의 이상 증세를 집요하게 따라다니면서, 그 어떤 보충 설명도 없이 관객에게 이 여자의 모습만을 끈질기게 보여준다. 즉, 메이블의 행위와 동선을 예측하지도 않고, 그에 따라 서사에서도 이벤트가 함부로 개입되지도 않는다. 하지만 <세버그>는 목적지가 정해져 있기 때문에, 우리는 세버그의 언행에 '왜', '어떻게', '무엇을'과 같은 조건을 달아가면서 영화를 따라갈 수밖에 없다. 어쩌면 <세버그>는 실화 바탕이라는 교묘한 술수를 통해 인물에게 부여하는 고통을 정당화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세버그가 피폐해져 가는 모습들을 통해 우리는 그녀가 느끼는 것들을 간접적으로나마 감각할 수 있으나, 이 영화는 그마저도 모호하게 성취한다.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뛰어난 연기는 세버그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한다기보단 배우의 역량을 증명하는 데에만 그친다. 배우의 잘못이라기보단 연출의 미스 같다. 진 세버그의 선택과 결단을 존중하기 위해 기획된 듯 보이는 <세버그>는 야심차고 세련된 외관에 비해서, 내실을 전혀 다지지 못한 미완의 결과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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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버그(Seburg)>



<톰보이(Tomboy)> (셀린 시아마, 2011)


아무래도 시아마 감독은 일상의 단면이나 사소한 순간들을 섬세하게 캐치한 뒤 그 감정적 여파를 확장해나가는 데에 탁월한 센스가 있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그런 점들이 제대로 발휘되지 않았던 영화가 시대극인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이었다고 느낀다. 아무래도 이 영화나 <쁘띠 마망>에서 보여주는 화법이 마음에 든다. 인물을 존중하는 사려 깊은 시선, 접근하려는 소재에 관해 신중함을 잃지 않는 태도 같은 것들 말이다. <톰보이>에서 우리는 주인공의 마음을 헤아릴 기회를 제공받긴 하지만, 감독은 인물의 내면을 관객에게 무작정 내비치게 하지 않는다. 인물의 시점 숏이 동원되더라도 그건 내면을 형상화하기 위한 작업과는 거리가 있다. 인물이 겪는 크고 작은 이벤트들 가운데 모든 물적 혹은 심적 요소들이 관객과 공유되는 방식은 아니라는 점이 중요하다. 시아마는 자신이 선택한 인물을 내러티브 전개 시의 체스 말처럼 사용하지 않고 그들이 느끼는 것들을 그 자체로 보존하고자 한다. 이 점에서 <쁘띠 마망>과 <톰보이>는 공명한다. 인물이 겪는 혼란과 고뇌들을 통해 영화는 인물 자체에 집중하려고만 하지 사회나 세계로 그 담론을 확장해서 거시적인 차원의 이야기를 하려 들지 않는다는 점 또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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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보이(Tomboy)>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IM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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