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영화

2021.11.12-2021.11.18

by 드플레

<프렌치 디스패치(The French Dispatch of the Liberty, Kansas Evening Sun)> (웨스 앤더슨, 2021)


<프렌치 디스패치>는 한 권의 잡지가 완성되기까지의 과정을 재기발랄하게 담아낸 영화이기도 하고 잡지의 활자들을 스크린으로 불러들여 매체적인 성질을 환기하는 기묘한 영화이기도 하다. 첫 관람 때는 컨디션 난조로 제대로 감상하지 못했지만, 두 번째 감상 이후 확신했다. 여러 번 감상할수록 이 영화를 향한 애정이 커지게 될 것만 같다는 사실을 말이다. 우선 옹호 아닌 옹호를 하는 걸로 시작하고 싶다. 인물들은 챕터에 따라 세 가지 이야기 속, 그리고 그 외부에서 감독의 설계 아래 정확히 주어진 역할들만을 수행하는 기계들처럼 보인다. 웨스 앤더슨 영화를 잘은 모르겠지만, 이 영화만 놓고 보면 수많은 인물들이 굉장히 도구적으로 소비되는 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는데, 적어도 이 영화에선 인물들이 잡지 속의 사연을 떠돌고 있기 때문에 이런 맹점이 문제가 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 우리는 이들의 사연을 특정한 저작물로만 접할 수 있지 않은가. 즉, 감옥의 예술가가 겪어온 삶의 풍파는 비평가의 입을 통해 가공되고, 그가 그린 그림들은 각종 사연을 덧입힌 상품으로 변모한다. 외국에서 건너온 이방인들은 각자의 고충을 그저 몇 마디로 축약해서 내뱉는다. 우리는 이러한 사연들의 편린만을 음미할 수 있지, 진실은 알 수 없고 그들의 내밀한 지점까지 건드릴 수는 없다. 그런 점에서 인물들이 도구적으로 다뤄지고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이 영화의 성격과 잘 맞아떨어지는 느낌이 든다.


이 영화는 냉소를 한 움큼 머금고 있지만 한편으론 한없이 사랑스럽고 따스하다. 마치 앤더슨의 선언 같다. 자신의 취향이라든가 선호 영역에 관한 애정이 진하게 묻어나는 영화가 아닐까. 그래서 이 영화에서 감독이 선택하는 화법에 동의하거나 지지하기 힘든 구간이 존재할 수는 있어도, 적어도 그의 의도만큼은 이해하고 싶어진다. 우리는 세 가지 이야기에서 모두 결핍을 안고 살아가거나 소외된 채 꾸역꾸역 삶을 견뎌내는 인물들을 만난다. 그들의 이야기는 비록 순도 백 퍼센트로 관객에게 도달할 수는 없다. 글과 삽화, 영상과 각종 소리들을 통해서만 관객에게 가닿는 듯 보인다. 그리고 세 가지 이야기를 둘러싸는 또 다른 이야기꾼들이 있다. 이들은 타자의 사연을 어떻게 또 다른 타자에게 매개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자들이다. <프렌치 디스패치>는 아주 정확히 자신이 의도한 바를 성취하는 영화이면서 동시에 감독의 변태적인 취향이 다분히 드러나는 영화처럼 느껴진다. 어쩌면 타란티노가 <원스 어폰...>을 내놓은 것과 비슷해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이 영화가 마음에 드는 이유도 순전히 내 개인 취향이 반영된다. 글에 가까이 있는 자들에 관한 영화가 아닌가.


<프렌치 디스패치(The French Dispatch of the Liberty, Kansas Evening Sun)>



<프란츠(Frantz)> (프랑수아 오종, 2016)


프랑스 영화 주간을 맞아 극장에서 재관람했다. 진작에 스크린으로 맞이했어야 하는 영화였는데, 역시나 너무 좋았다. 다시 이 영화를 본 뒤 머릿속을 맴도는 질문. <프란츠>는 안나를 위한 영화일까? 오종의 각본에선 사실 아드리앵의 서사를 납득 가능할 정도로 밀도 있게 구성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안나의 서사를 신경쓰지 않은 듯한 인상을 지워내기 힘들다. 그의 시나리오는 과연 인물에 대한 탐구를 은근슬쩍 방기하고 있는 걸까? 여기에 대한 검토가 영화를 대하는 나의 태도를 좌우하게 될 것이다.


비록 후반부에 안나가 겪는 일들이 아드리앵이 타지 독일에 와서 겪었던 고초들에 대한 다분히 의도적이고 도식적인 대립항이라는 인상을 지우긴 어렵다는 걸 부정하진 않겠다. 하지만 용서를 받아야 하는 아드리앵이 스스로가 원했던 바를 달성하는(달성하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이 안나에게는 전혀 비슷하게 찾아올 수 없다. 죄책감과 상실감은 동치가 아니기 때문이다. 상실을 극복하거나 혹은 채우려는 숱한 시도들은 함부로 재단되어서도 안되고 그럴 수도 없다. 그래서 영화가 안나에게 제시하는 선택지들은 폭력적으로 보이면서도 방법을 찾기 위해 고뇌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떻게 해야 안나가 삶을 지속할 수 있을 것인가에 관한 고민 말이다. 이때 각본상의 선택지들이 상실감을 무엇으로 채워야 하는가에 몰두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렇지만 영화는 이내 정신을 차린 뒤 안나의 경로를 함부로 재단하지 않으려고 한다. 영화가 제시하는 결말은 안나의 고뇌를 슬쩍 해결해 주려는 게 아니라는 점에서 탁월하다. 어쩌면 너무나도 복잡한 문제다. 안나의 상실감을 무엇으로 채워야 하는가, 라는 질문은 해결될 수 없다. 그래서 고쳐져야 하는 질문, 안나가 자신을 옭아매는 상실감을 더 이상 쳐다보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에 관한 가능성을 가늠해야 하지 않을까.


사실 <프란츠>는 상실감처럼 어려운 감정 영역을 묘사하려는 영화임에도 절대 추상적인 것들을 손쉽게 구체화하지는 않는다. 사랑과 슬픔 등과 같은 감정들은 육화되거나 발화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무언가의 결여가 동반되는 상실이라는 감정은 그렇지 않기에 우리는 비언어적 표현들로부터 그걸 감지해낼 수 있다. 그래서 흑백을 선택한 영화의 화법에 동의한다. 우리는 안나와 아드리앵의 눈동자가 아주 조금이라도 굴러가는 순간에, 채도가 온전히 빠진 화면 영역에서 섬세하게 진동하는 비언어적 표현이 어떻게 다른 요소들보다 손쉽게 우위를 점하는지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프란츠(Frantz)>



<퍼스트 카우(First Cow)> (켈리 라이카트, 2019)


어딘가를 경유해야만 하는 시선과 불완전한 형상을 포착하는 일들. <퍼스트 카우>는 시작부터 이걸 숨기지 않는다. 해골을 거쳐야만 우리는 이들의 진한 우정을 바라볼 수 있지 않았나. 묻혀 있던 해골을 발견해 내야만 우리는 그제서야 플래시백으로 그들의 일상을 들여다볼 기회를 얻게 되는 것이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해골은 두 사람의 우정과 관객을 매개하고 있는 일종의 필터인 셈이다. 인디언과 백인 그리고 중국인이 함께 하는 대화에서 통역을 거쳐야만 성취되는 소통 장면도 묘하게 떠오른다. 알레고리를 굳이 담아내려는 시도들이 딱히 없었는데도 겹겹이 쌓인 소소한 플롯과 설정들이 알아서 영화를 풍성하게 가꿔주는 느낌을 받았다. 인물들은 살기 위해 이동하고, 생계를 위해 모종의 행위를 반복하고, 자본 논리에 종속될 수밖에 없는 사회 흐름에 편입되어야만 한다. 그들의 이야기는 굳이 상징과 장치들을 잔뜩 배치하고자 하는 욕망을 경유하지 않더라도 매우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구축될 수 있다. 이때 놀라운 건, 물 흐르듯 묘사되는 소박한 소동들을 통해 삶과 죽음을 아우르는 규모와 깊이를 동시에 획득하는 데 성공한다는 점이다.


한편 건축물의 창틀, 문의 개폐 여부, 벽의 판자 사이의 빈틈 등이 얽히면서 생성되는 다중 프레임 구조들은 단번에 관객을 사로잡는다. 이 영화에서 종종 시선은 어딘가를 거쳐야만 한다. 우리는 나무 위에서 망을 보는 킹 루의 뒷모습 일부 형상을 통해 쿠키의 모습을 포착할 수 있기도 하고, 걷는 인물이 창틀과 문틈에 편입되며 생성되는 불완전한 형상들을 지켜봐야만 할 때도 있다. 영화에서 킹 루와 쿠키가 각자 다르게 구획된 프레임에 위치할 때가 있다. 이때 관객에게 두 사람이 존재하는 공간은 다르게 인식되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그들이 같은 공간을 공유한다는 점이 매개물로 인해 재단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매개물로 인한 프레임 재구획이 무엇을 표상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이 남는다. 구획된 프레임이 인물들의 연대를 끊어놓은 것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이건 오히려 인물들이 서로 연결되길 바라는 소박한 욕망을 관객에게 색다른 방식으로 전달하는 것처럼 보인다. 인물들의 시공간을 잠시 붙잡아 둔 창문이나 문의 여백에는, 풍경과 사회적 맥락이 희석된 채 인물의 움직임만이 부각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관객들은 인물들이 각자의 프레임 내부에서 묵묵히 일상을 영위하는 모습을 목도할 수 있다. 그리고 인물들이 공유하는 일상성은 그들이 실제로 공유하는 모종의 공간 속성을 뛰어넘어 프레임의 조합으로 재구축된 화면 영역의 동일한 표층에 위치하게 되는 것 같다. 이런 장면들은 안 그래도 느슨하고 간략한 서사 구조 내에서도 굉장히 비중이 얕은 사소한 순간들이지만, 그런 사소함 자체를 따스하게 응시하려고 고민하는 것이야말로, <퍼스트 카우>의 미학이 아닐까.


<퍼스트 카우(First Cow)>



<사구(Dune)> (데이빗 린치, 1984)


영화를 둘러싼 제작 비화나 감독의 견해 등 외적인 사연을 배제하고 싶다. 드니 빌뇌브의 <듄>(2021)과 나란히 놓고 비교하고 싶지도 않다. 그저 감상했던 두 편의 편집본(136분의 극장판, 177분의 확장판)에 관해 종합적으로 느낀 것들을 짧게나마 남겨두고 싶다. 너무나도 뚜렷한 장단점이 공존하는 기묘한 영화다. 방대한 원작을 각색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겪게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일까? <사구>는 너무나도 많은 구간을 내레이션과 독백에 의지한다. 사실 이런 전략을 잘 활용하고 구사하는 영화는 너무나 많지만, 적어도 이 영화에선 그렇지 않다. 영화가 선택한 방식, 소설의 그것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화법의 남발에는 동의하기 힘들다. 인물들의 내면을 그대로 송출하는 독백이 매우 직관적으로 상황과 맥락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수단임에는 틀림없지만, 소수의 구간을 제외하고는 지지하기 힘든 방식으로 쓰이고 있다. 물론 그 대서사를 두 시간 남짓 세 시간으로 압축해야 하니 불가피한 선택이긴 하겠다.


영화는 도입부부터 정치 싸움을 예고한다. 황제와 길드, 두 가문 간의 갈등과 그 모든 관계의 중심에 놓이는 아라키스에 관해 제시되는 압축적인 정보들, 황제가 처음 등장하는 신이 이를 뒷받침한다. 그래서 영화는 숨 쉴 틈 없이 캐릭터들의 개인 서사는 배제한 채 서사를 전개하는데, 특히 후반부 편집은 정말 성급하다 못해 납득이 어려울 정도의 리듬감을 보여준다. 제작자나 관계자들의 잘잘못을 따지자는 게 아니라, 그냥 내가 직면한 영화의 모습이 그랬다. 간간이 펄떡대는 기괴한 이미지들이나 텁텁한 매력을 자아내는 사막의 풍경들은 대규모의 서사를 완수해야만 하는 거친 리듬에 짓눌려 있다. 매력적이면서도 불균질한 저글링을 위태롭게 선보이는 것만 같은 영화다. 폴의 꿈이나 환상을 매개로 전달되는 이미지들이나 초현실적인 묘사들은 그 자체로 관객을 매혹할 수 있지만, 영화의 정신없는 전개와 긴밀히 연동되지는 못하는 것 같다. 물론 영화 곳곳에 데이빗 린치의 감각적인 터치가 은은하게 배어 나오고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감독이 구상했던 매우 긴 시간의 풀버전 영화가 어쩔 수 없이 궁금해진다. 난도질당해야만 했던 영화의 운명이 안타깝게 느껴진다.


P.S. 극장판과 확장판은 다른 구간이 많다. 추가 혹은 삭제된 장면들이 각각 다르다. 내가 접할 수 없는 판본 또한 있을테니, 이 영화에 관한 온전한 감상은 불가능하다.


<사구(Dune)>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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