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1.19-2021.11.25
<파워 오브 도그>는 매우 간결한 서사를 펼쳐놓는다. 목장주 형제가 누려왔던 일상이 낯선 과부와 그의 아들로 인해 어떻게 변화되는지에 관한 이야기이다. 영화는 애초에 모든 패를 은근슬쩍 드러내놓고 단서들을 차근차근 매만지면서 관객들을 이끈다. 영화는 인물의 정서를 손쉽게 형상화하지 않고 그들의 비언어적 표현이 엇갈리거나 충돌하는 지점들을 차근차근 쌓아가는 데 집중한다. 성의 없이 대사 몇 마디로 처리하거나 툭 던져주는 방식이 아니라는 점에서 이 영화는 관객을 보기 좋게 사로잡는다. 그와 동시에 거의 모든 구간의 감정선이 여백과 소거를 동반하기 때문에, 관객은 벌어져가는 영화의 틈새를 능동적으로 짚어나가야 한다. 그런데 재밌게도 그 끝에 다다르면 완벽하게 봉합된 것들이 있고 그로부터 배어 나오는 정서의 여운이 관객을 휘감는다.
<파워 오브 도그>는 누군가의 세계를 비집고 들어가는 자의 이야기이면서 자신의 세계를 침범당한 자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필은 자신의 세계와 소중히 여기는 것들을 지켜내야만 하는 자다. 피터 역시 무언가를 지켜내야만 한다. 그래서 매우 흡사한 두 사람이 만났을 때 생성되는 기류는 '긴장'이나 '불편함'과 같은 단일한 요소로 환원될 수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여기서 한 남자는 종이꽃을 향해 비아냥거릴 수밖에 없고, 다른 한 남자도 토끼의 행방을 말할 수 없는 운명에 놓인다. 그런데 피터와 필은 균열에 다르게 대처한다. 한 명은 도태되지 않기 위해 두터운 가면을 쓴 채 자신을 고립시킨다. 다른 한 명은 자신의 고유성이 사회와 만나면서 생기는 마찰과 잡음에 고통스러워할지언정 그런 순간에 직면하는 일을 마다하지 않는다. 그래서 한 남자는 자신의 세계가 노출되더라도 생존할 수 있지만, 다른 한 남자는 갑작스러운 균열에 원만하게 대응할 수 없다.
<파워 오브 도그>가 관계를 응시할 때 동반되는 사운드는 관객을 쥐고 흔든다. 그에 따라 관객은 오인하거나 의심한다. 그들의 갈등에 내재된 감정들을 직시할 수 있는가? 드러나지 않아야 할 것들이 공개되는 순간들, 공개되어야만 하는 것들이 묻힌 채로 보존되는 순간들이 공존한다. 이 영화엔 무엇을 보고 보지 않을지에 관한 운명론적인 선택의 테마가 녹아 있다. 예견된 불안이 실행될 때 감정의 파형과 잔영이 생성된다. 이걸 관객에게 반드시 전달해 내고야 마는, 아니 전달하겠다는 의지를 관철하는 <파워 오브 도그>는 무엇을 선택해서 가공한 뒤 관객에게 전달할 것인가에 관한 고민이 녹아 있는 영화다. 이 영화가 화면 영역과 사운드를 배합하는 방식은 그저 관객을 혼란스럽게 하거나 낯선 곳으로 인도하기 위해 도입된 것이 아니라, 다루고자 하는 바를 어떻게 하면 정서적으로 극대화할지에 관한 고민이 반영된 산물처럼 느껴진다.
흥미로운 영화다. 나는 집안 환경에 따라 독실한 개신교인(물론 <베네데타>는 가톨릭 영화다)으로 약 이십 년간 반강제적으로 살아왔고, 최근 몇 년 동안에서야 종교에 구속되지 않은 무교인의 삶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슬쩍 지난날을 떠올려 보면, 어쩌면 믿지 않을 때 '믿음'에 관해서 더욱 깊게 생각하게 되는 것 같기도 하다. 아니 진정으로 신을 믿었던 적이 있었나 싶기도 하다. 종교인과 비종교인의 영역에 모두 몸담았던 내게 <베네데타>는 연출의 미학을 따져보기에 앞서 나를 매혹하는 영화처럼 느껴진다. <베네데타>에서 주인공은 예수의 행적을 재현한다, 아니 재현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표현이 맞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베네데타를 거쳐 표출되는 모종의 특징적인 언행은 신약 성경에 묘사된 예수의 일대기와 일치한다. 그렇다면 이 기이한 현상을 목도하는 이들의 리액션이 중요하다. 영화는 이런 맥락에서 관객에게 지속적으로 질문을 던지고 있으며, 동시에 자신이 무엇을 말하려는지도 분명히 하는 스탠스를 취한다.
어떤 시점부터 우리는 베네데타의 의중을 도저히 파악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그러다가도 특정 지점에선 베네데타의 언행이 어떤 걸 의도하는지 알아차릴 수 있기도 하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관객이 베네데타에게 휘둘릴 수밖에 없는 영화인데, 이 기묘한 인물은 내면을 마냥 오픈하는 것 같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을 향한 접근조차 허용하지 않는 양가적인 면모를 계속해서 발휘하고 있으며, 관객은 이로 인해 진실에 다가설 수 없다. 간헐적으로 제시되는 환상들은 신의 신성성과 권능을 드러낼 수 있는가? 어쩌면 그 환영 이미지들은 망상의 총체일지도 모르는 일이 아닌가. 그러나 단언할 수는 없다. 영화는 답을 제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주변인들의 리액션 또한 이를 방증한다.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는 <베네데타>에서 진실은 절대 수면 위로 드러날 수 없다. 왜 그런가? 애초에 무엇이 진실인지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진실과 거짓을 찾을 수 없는(혹은 그것들이 존재할 수 없는) 자리엔 확률만이 남는다. 믿음의 영역 말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믿음을 논함으로써 종교라는 체계의 근간 혹은 이것이 가지는 맹점들로 향한다.
<베네데타>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테마는 신의 존재 가능성을 묻는 게 아니라, 더 나은 믿음의 가능성 혹은 믿음의 방법론을 가늠해 보는 일이다. 베네데타의 믿음은 오프닝 신 속 어릴 적의 경험에서 출발한다. 사실 정확히 그 타이밍에 그런 일이 벌어진 건 순전히 우연이 아닌가. 하지만 베네데타의 간절한 바람을 정말 신이 들어준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문제는 이걸 따지는 게 무용하다는 것이다. 신의 존재보다도 중요한 건, 신의 존재(로부터 파생되는 종교적 믿음)가 어떻게 인식되느냐에 관한 문제다. 어떤 것이 존재하지 않을지라도 그것이 인지되거나 인식될 수 있는 것 아닌가. 베네데타는 이런 사실을 자신을 통해 형상화하는 과정에 놓인 인물이 되는 셈이다. 그래서 무언가의 진위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관한 문제만 남는다. 베네데타를 성녀로 여긴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각자의 믿음 영역에서 어떤 일들을 겪게 되는가. 어떤 일을 겪게 되든, 각자의 선택 아래 합리화 혹은 수긍의 프로세스가 진행되거나 그것 자체가 부정되거나의 문제다. 예수를 대리하는 듯한 베네데타를 부정하는 인물조차도 위기의 순간이 오면, 자신의 믿음을 순간적으로 철폐하고 더 나은 믿음의 방식에 관해 몰두하려 들면서 혼란에 빠진다. <베네데타>는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라기보다는 '어떻게 믿음을 이어나갈 것인가'를 꾸준히 환기하고 있다.
<자마>는 매우 간략한 서사 구조를 지녔고, 말하고자 하는 것들 또한 분명해 보인다. 식민지에 파견된 치안 판사 자마가 겪는 고뇌와 권태, 그의 소박한 욕망들, 그리고 그가 겪는 몇몇의 에피소드들. 자마는 하루빨리 다른 지역으로 발령 나길 고대하고 있으며, 이곳에서의 업무를 수행하는 것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다. 그는 여성의 육체를 향한 공허한 욕망과 무기력하게 나열된 일상의 파편들이 만들어내는 공회전에 전염된 사람처럼 보인다. 그런데 <자마>는 자꾸만 관객들의 손아귀를 빠져나가려고 한다. 통상적인 인식 체계로 받아들이기엔 난해한 구간들이 왕왕 산재해 있기 때문이다. 가령 동일한 말을 두 번 읊는 남자라든가, 장사꾼의 아들이 자마의 신상 정보를 요약하듯 되뇌는 장면들이 그렇다. 프레임을 덧대거나 의도적으로 외화면을 의식하게 만드는 방식 또한 무대의 성격을 핍진성과 구체성에서 벗어나게 만들려는 시도들처럼 보이기도 한다.
자마의 말로는 비참하기 짝이 없다. 오랜 기간 손에서 떠나보내지 못했던 감투는 결국 신체가 절단되는 순간에 이르면 한낱 종잇 쪼가리에 불과하다. 사실 몇몇 기호들이 영화의 정치적인 맥락을 환기하고 있다는 건 명확하지만, 어쩐지 감독은 <자마>가 그런 작법에 포섭되지 않기를 바라는 것 같다. 관객을 교란하는 것 자체가 이 영화의 목적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러한 교란을 두고 나는 지지할 수 있는가? 시공간적 특성을 무화한 채 인간과 자연 사이에서 진동하는 어떤 감각적인 요소들을 끊임없이 소환하려는 <자마>는 충실히 자신의 화법을 관객에게 납득시키고 있는가? 아니 이렇게 질문을 바꿔보고 싶다. 모든 관객은 <자마>에 성공적으로 접속할 수 있는가? 영화를 향한 접속법을 찾아내는 것으로부터 <자마>에 관한 이야기가 가능할 것이다. 이 영화를 한 번만 본 입장에서, 나는 이 영화에 온전히 접속할 방법을 찾아내지 못했다. 어쩌면 이 영화는 관객 각자의 감각 체계를 가공하는 전략을 통해 모종의 보편성을 획득하려는 것처럼 보이나, 과연 그 화법이 모든 관객에게 유효했는지는 모를 일이다. 영화의 형식이 스타일로만 극의 주변을 맴돌고 있는 것인지 형식이 곧 테마를 성공적으로 구체화하는지 고민에 빠지게 하는 영화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옐라>(2007)를 마주할 때와 <자마>를 마주할 때 나의 감각은 왜 다르게 반응하는가? <자마>는 여러 번 감상해야만 비로소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 같은 영화다.
사소한 대화로만 들어차 있음에도 관객을 끝까지 자리에 붙들 줄 아는 영화다. 각본 구성이 흥미로운데, 여러 인물들의 사연이 시공간을 오가면서 액자식으로 전개되는 방식은 뻔하디 뻔한 일상 연애 토크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게다가 적절하게 삽입된 스코어 또한 몰입을 돕는 훌륭한 조력자가 된다. 그리고 사실 영화에서 다루는 것들이 뻔한 이야기처럼 보여도 뻔하지 않다. 인물들이 자신의 감정 상태를 탐색하는 과정들을 관객 또한 함께 플래시백이 동원된 흥미로운 서사 구조에 따라 음미할 수 있다. 사랑이란 이름 아래 자행되는 불륜이라든가 육체를 향한 욕망으로 손쉽게 환원될 수도 있는 사랑(같은 것)이라든가... 내가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사랑의 형태를 정의 내리거나 감각할 수 있기는 한 걸까. 그 어떤 것도 명확히 할 수 없어서 혼란에 빠지고 고민에 사로잡히는 인물들은 각자 더 나은 관계를 위해서 저마다의 견해를 내놓는다. 파국으로 치닫는 치정극이나 난잡한 감정 난투극으로 귀결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 영화를 통해 어떤 관객들은 뭔지모를 따스한 충만감을 획득할 수도 있을 것만 같다. 일종의 힐링 불륜극이랄까...?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