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2.03-2021.12.09
보는 내내 다른 세계로 접속한 것만 같은 요상한 기운에 휩싸였다. 서사를 이어가는 리듬이 불규칙하게 다가오지만, 오히려 그런 예측불허의 느슨함이 어딘가로 승화됐다가 영화의 특기할 만한 리듬으로 환원되는 것만 같다. <다함께 여름!>에선 일상의 질감이 묻어나는 캐릭터들 하나하나가 전부 기억에 남으면서도 그와 동시에 인물의 특성이 배제된 어떤 율동적 상태 혹은 행위 그 자체가 감각되는 장면들 또한 유독 기억에 많이 남는데, 이때 인물의 특성이 사라져 보이는 이유는, 아마도 우리들의 삶에서 발견되는 모종의 일반화된 양상과 가깝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 속 인물들은 생각한다. 내가 휴양지에 왜 왔는지 모르겠지만, 지내다 보니 각자 나름대로 여행의 의미를 찾게 되더라는 식의 이야기. 여기서 우리는 대단히 특별한 걸 읽어낼 수 없으며, 그저 이들의 비일상(휴가)적인 일상 모먼트를 잠깐이나마 들여다볼 기회를 얻게 되는 셈이다. 애써 특별해지지 않으려는 점이 이 영화의 가장 큰 매력처럼 다가온다. 사소하면서도 소중한 것들 투성이인 이 영화에서는 셰리프와 엘레나가 함께 마이크를 사이에 두고 시선과 호흡을 교환하는 순간에 이르면, 그 장면을 맴도는 무드를 프레임 내부에 가둔 채로 사진으로 찍어 간직하고 싶은 어떤 순수한 충동이 생겨난다.
감독 특유의 터치가 반영된 듯한 스타일은 잘 알겠으나, 화려한 출연진들의 예측불허 퍼포먼스와 과잉된 풍자 요소들이 일사불란하게 늘어져 있다는 이유만으로 이 영화를 지지하고 싶은 마음이 생길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분명 나는 영화를 감상하면서 희로애락이 골고루 어우러진 인간상의 여러 단면에 몰입했던 것 같은데, 다 보고 나니 이상하게 영화에 태클을 걸고 싶은 기분이 든달까. 어딘가 핏(fit)하지 않은, 이 미묘하게 뒤틀린 느낌이 어디서 기인하는 걸까. <돈 룩 업>이 실화를 기반으로 하지 않기에 오히려 그런 태생적인 배경을 의식이라도 한 듯 아주 거침없이 현실 영역을 끌어다 오려고 한다는 점이 뭔가 마음에 걸린다. 재밌게도 이 영화의 매력은 일차적으로 여기에서 비롯되지만, 동시에 이 영화의 한계이자 맹점 또한 여기서 비롯되는 것 같다.
가상으로 축조된 세계관의 알맹이는 사라졌고, 스크린 너머 현실에 기댄 채 관객을 유혹하는 반영체 혹은 껍데기와도 같은 거울 속의 상만이 남는다. 물론 기본적으로 '풍자극'이나 '블랙 코미디'라는 게 현실과 연동되는 형식으로 구성된다지만, 이 영화는 '개콘'이나 'SNL' 등의 코미디 프로그램 속에서 보여주는 은근한 경계 뭉개기보다는 현실을 영화로 끼워 넣기만 하려는 욕망이 살짝 앞서는 것 같다. 현실과 영화의 경계를 오간다기보단 그 경계가 원래 없었다는 것 마냥 명확한 통로를 하나 뚫어놓은 채 관객을 인도하는 느낌이랄까. <돈 룩 업>은 우리가 사는 현실 영역의 담론이나 이슈를 그대로 반영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변주하거나 혹은 비틀어서 관객들로 하여금 스크린 너머와 접속할 수 있는 다양한 루트를 뚫어놓은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건 그저 풍자만을 위한 단순 명료한 목적의식이 반영된 영화의 작동 원리일 뿐이다. 현실적인 질감이 이 영화의 공허한 내적 세계관을 가릴 수는 있어도 채울 수는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영화 속 인물들은 인물로서 살아 숨 쉬지 못한 채, 가상의 시나리오 속에서 구축된 모종의 현실 반영적 인물 마냥 극을 영혼 없이 떠돌고 있는 것만 같다. 그런데 배우들 연기가 워낙 좋다 보니, 몰입감이 보장되어 있다는 점은 참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겠다.
<돈 룩 업>은 실화의 재구성이 아니다. 이 영화는 픽션에서 출발한다. 그럼에도 시종 현실에만 기대려고 한다. 영화 내 여러 장치들은 모두 스크린 너머의 관객이 인지할 법한 모종의 핍진성에 의존한다. 가령 정치인의 민낯이라든가 미디어와 대중의 관계가 가공되고 작동하는 방식들, 정부-국민 사이의 갈등이 빚어내는 딜레마와 같은 요소들 말이다. 이때 <돈 룩 업>은 영화 내적으로 구축된 세계의 핍진성을 전혀 어필하려 들지 않는 듯하다. 오히려 거의 모든 장면들에서 우리는 현실과의 접점을 읽어낼 수 있다. 인물 각각의 사소한 설정들까지도 정치적 올바름과 같은 현실의 주요 쟁점들이 디테일하게 반영되어 있다. 이 영화의 거의 모든 요소들은 오로지 관객들로 하여금 몸담은 현실을 환기하게 하려는 단순한 전략만을 추구하고 있다. 즉, 인물들을 보면서 우리가 적절히 반응할 수 있는 이유는, 영화 속 장치나 설정들이 실제 현실 영역에 부합하는 정도에 따른 심리 기제의 작동 때문이지, 영화가 만들어낸 세계관에 몰두하거나 접속해서 얻을 수 있는 것과는 관련이 크게 없다.
게다가 기시감도 든다. 이 영화가 소재로 삼은 혜성 충돌 이슈, 그리고 이 사건과 여러 음모를 둘러싼 다양한 인간 군상을 다루는 방식은 이미 1998년 재난 영화 <딥 임팩트>에서 작동된 적이 있었다. 재난 자체의 스펙터클을 강조하지 않고, 사건을 마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집중한다는 점 또한 두 영화가 비슷하다. 물론 <딥 임팩트>는 이 영화와 사뭇 다른 무드와 톤으로 전개되긴 했지만 말이다. 결국 <돈 룩 업>은 "미국 사회(혹은 인류 전체)를 겨냥한 날카롭고 통렬한 시선에다가 위트까지 챙기려는 맥케이 표 풍자극" 정도로만 귀결되는 작품이 아닌지 모르겠다.
그런데 한편으로 <돈 룩 업>은 다소 독특한 인상을 풍기면서 내 손아귀를 슬쩍 빠져나가려고 한다. 그건 바로 이 영화가 이질적인 요소들을 서로 충돌시키거나 공존시키려고 한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이 영화는 앞서 말했듯 논픽션인 척하는(혹은 그것이 되고 싶은) 픽션인 듯한데, 후반부에 이르면 아예 그래픽 처리가 티가 팍팍 날 정도로 픽션스러운 픽션으로 선회하는 듯한 이상한 면모를 드러낸다는 점이 흥미롭다. 어쩌면 <돈 룩 업>의 세계관은 이 지점이 되어서야, 생명력을 얻는다. 아주 묘하다. 후반부의 그래픽 묘사가 앞서 나열됐던 현실 반영의 흔적들보다도 더 진한 물성을 뿜어내는 것만 같다. 그리고 여기에 끼어드는 것들.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볼 법한 생물들의 클로즈업 이미지의 연쇄. 지구의 멸망을 감지한 동물들은 우왕좌왕 다투고 시간 낭비하는 인간과는 다르게 지구의 종말을 준비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어쩌면 이것들은 인간상의 이면을 들추면서 그들을 통렬하게 비꼬는 감독의 어떤 비판 의식과 대조를 이루는 자연물의 기능을 수행하는 걸까? 왜 이토록 불규칙한 몽타주의 작법으로 제시되어야만 한 걸까. 이 점에 관해서는 <돈 룩 업>이 넷플릭스에 공개된 이후 영화를 더 살펴본 다음에, 그리고 아담 맥케이가 현실과 영화를 함께 놓고 바라보는 시선을 조금 더 음미해 본 다음에 마저 적어보고 싶다. 우선 <바이스>부터 봐야겠다.
괴테라는 작가와 그의 책들을 둘러싼 비화가 많겠지만, 이 영화를 보면서 느꼈던 것들로만 생각을 채워나가고 싶다. 우선 배우들의 안정적인 배역 소화력 덕분에 몰입감이 제법 좋았다. 우연히 찾아온 불같은 사랑에 신음하는 사람들의 고단함, 크고 작은 낭만을 만끽하려는 청춘들의 몸부림이 인물들을 통해 잘 드러난다. 청년기 괴테와 로테의 삶을 지속하게 하는 것 혹은 멈춰세우는 것은 무엇이었는가. 광기와 충동에 휩싸일 때, 인간은 선택해야만 한다. 딜레마를 감각할 수 있다는 사실은 어쩌면 가장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요소가 아닐까. 나는 생각한다. 매번 올바른 선택을 할 수는 없을지라도 괴테처럼 무언가에 광기 어린 진심을 바친 적이 있었는가. 혹은 로테처럼 내가 아닌 가족과 타인의 안위를 위해 희생의 선택지를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
<티탄>의 강렬한 비주얼 요소를 걷어낸 자리엔 무엇이 남는가. 이것부터 나의 생각을 정리해나가고 싶다. 뒤틀린 결핍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치유할지에 관한 이야기. 그 과정에서 만난 두 사람이 서로를, 더 나아가 각자 자신을 어떻게 구원할지 나름대로 고민에 빠지는 이야기. 광기와 사랑 그리고 혐오로 마구 덧칠된 가족 영화이기도 한. 그러니까 <티탄>은 끝자락에 이르면 스타일과 어떤 테마적인 감흥 사이의 괴리가 크게 느껴지면서도 그 간극이 신기하게도 휴머니즘으로 봉합되는 묘한 영화 같다. 독특한 감상이었던 건 확실하다. 단지 마음에 걸리는 지점이라면, 이 영화의 스타일이 테마와 어떤 상관관계에 놓여 있는가의 문제다. 이 영화의 기괴한 이미지들은 무엇을 위해 도입이 되었을까. <티탄>이 주입하는 시각적인 자극은 서사 내적으로 인물들의 사연과 충분히 연동된 다음 스크린 너머의 관객에게까지 가닿아 그들을 설득할 수 있는가?
마지막 순간에 뱅상은 알렉시아가 출산한 아기를 자신의 새로운 아들로 받아들이려는 것처럼 보인다. 그에겐 아들이든 딸이든 인간이든 비인간이든 뭐든 간에 상관이 없다. 곁에 있어줄 누군가가 있으면 된다. 알렉시아가 소거된 자리는 그렇게 대체될 수 있다. 뱅상이 느끼는 빈자리를 채워줄 수 있는 존재는 계속해서 그 정체성을 바꾼다. 알렉시아가 위장 남자로 전입한 뒤 여성임이 들통난 다음 출산한 아기가 자동차의 아들이라는 점까지. 기존의 이분화된 통념이 차근차근 전복된다. <티탄>의 독특한 설정은 인물, 관객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두피 절개 수술로 박아 넣은 티타늄 장치, 차량과의 성관계로 잉태된 생명, 그리고 임신부터 출산을 매 순간 감각하는 과정들, 몸 곳곳에서 흘러나오는 기름들. 이와 같은 이미지의 나열이 과연 <티탄>에서 어떤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걸까. 앞서 나는 <티탄>이 내게 어떤 영화로 다가오는지 밝혔다. 그런데 이 영화의 스타일이 과연 테마적으로나 서사적으로나 영화에 자연스럽게 녹아드는지는 모르겠다.
<티탄>은 이미지의 충돌과 연쇄를 통해서 관객의 인지 체계를 매만지려 드는 영화다. 물론 유의미한 담론이다. 통념과 전형성의 철폐가 반영된 어떤 테마를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 편의 이야기로서, 한 편의 영화로서 티탄은 과연 매끈한 완성도를 보여주는지는 모르겠다. 이 영화에서 기괴한 인상을 풍기는 이미지를 모조리 제거한 뒤 서사를 다시 음미해 볼 때, 이 인물들이 자아내는 갈등이나 인물들 사이의 텐션과 관계가 과연 독창적이고 뛰어난 무언가처럼 느껴지는가? 결핍을 채우려는 인물들의 고군분투는 사실 닳고 닳은 이야기일 뿐이다. 그렇다면 다시 원점인데, 이 영화의 스타일 요소들이 과연 이 평면적인 서사를 어떻게 가공하는가의 문제가 된다. 이 서사에 신화와 종교라는 프리즘을 갖다 댄다면, 오히려 영화의 논조와는 어긋나는 듯한 괴리감이 피어난다. 해체를 부르짖으면서 어째서 그토록 전통적인 알레고리에 묶여 있는 서사여야만 했는지는 모르겠다. 메타포로 점철된 <티탄>은 해석의 여지를 열어둔 작품이라기보단 해석을 강제하는 영화 같다. 남성성과 결부된 티타늄-차량으로 확장되는 금속성, 불을 매개로 하는 생명-죽음의 교차, 젠더와 섹스의 기호를 뒤섞어 버린 정체성의 혼동과 오인 문제까지. 모든 상징 요소들이 테마를 위해 복무한다는 점이 어쩐지 영화의 매력을 조금 반감시키는 것 같다. 그럼에도 감독이 기어코 자신의 기획안을 관객에게 주입해 내는 데 성공한다는 점 또한 분명해 보인다.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