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2.10-2021.12.16
다섯 시간이 넘는 러닝 타임 내내 극의 호흡을 무리 없이 따라갈 수 있었다는 경험만으로도 괜히 마음에 두고 싶은 영화다. 걸작이나 대작 따위의 칭호를 붙이자는 취지가 아니다. 극장의 관객이 영화와 만날 수 있는 어떤 특별한 경험의 순간을 만들어준다는 점에서, <해피 아워>는 그저 좋은 영화가 아닐까. 워크숍과 낭독회 현장이 얼핏 봐서는 그저 일상의 한자락일지 몰라도, 적어도 <해피 아워>의 관객들에겐 더없이 중요한 여행지와 같다. 영화는 이러한 이벤트들을 서사에 아주 탁월하게 녹여내고 있다. 내면에 묻어뒀던 무언가가 발각되거나 공개되는 순간들. 이를테면 워크숍에서 사쿠라코가 준의 신체 변화를 알게 된다든가 낭독회에서 후미가 불편했던 감정들에 끝내 무너지는 모습 같은 것들. 물론 이 모든 게 관객에게 직설 화법으로 주어지는 건 아니다. 그래서 관객들은 감정의 레이어가 포개지는 지점들에 몰입하면서 영화를 따라갈 수 있다.
무심한 다큐멘터리 마냥 건조하게 인물들을 따라가는 듯한 <해피 아워>는 사실 누구보다도 섬세하게 인물들의 감정을 포착하고 있는데, 역시나 몇몇 인상적인 구간들이 존재한다. 이를테면 후미와 타쿠야가 낭독회 섭외 건으로 의견이 엇갈리는 상황. 대화를 대충 얼버무리고 타쿠야는 출근하는데, 이때 자동차 키를 잊고 나간 남편을 위해 후미는 키를 들고 문을 열고 나가 뒤쫓으려 하고, 타쿠야는 키를 가져오려고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이 장면에서 관객에게 도달하는 감정들과 그렇지 못한 감정들, 인물들이 숨기고 싶어 하는 것들과 의도적으로 드러내려는 것들이 실타래처럼 엉켜있지만서도 언뜻 봤을 때는 각자의 포커페이스로 인해 슬쩍 그 강도가 희석되는 듯한 느낌까지. 이뿐만이 아니다. 지하철에서 사쿠라코와 후미를 문 양쪽에 나눠 잡아 프레임을 분리시키는 구도들이라든가, 관객의 시간과 인물의 시간의 경계를 허물고자 하는 낭독회나 워크숍의 롱테이크들도 인상적이다. <해피 아워>의 긴 러닝 타임은 이런 사소한 감정의 역학 관계를 담아내기 위해서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현실과 비현실 혹은 일상과 비일상을 넘나든다는 사실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보다는, 어쩌면 그 경계를 오가는 상황에서의 감각 자체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고민하고 싶은 영화인 걸까. 따라서 마치 꿈이나 망상에서 깨어나는 장면을 다룰 때 유별난 편집점 없이 그저 숏과 숏을 슬쩍 이어붙이는 다른 영화들처럼, <엑시스텐즈>에서도 역시 접속 활성화-해제의 순간이 두드러지게 강조되지 않는다. 내가 그 때 느끼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파악한 뒤 적응해나가야만 하는 일이 우선 과제가 된다. 그래서 <엑시스텐즈>는 경계를 넘나들 때의 스펙터클 요소가 묘사됐던 <매트릭스>와 <인셉션>과는 다른 영화처럼 다가온다. 그리고 <매트릭스>나 <인셉션>은 각 세계의 속성을 암시하거나 상정해뒀지만, <엑시스텐즈>는 그조차도 은근슬쩍 거부하기 때문에 더욱 흥미롭다.
물론 <엑시스텐즈>를 통해 뽑아낼 수 있는 담론은 그리 번뜩이는 것들이 아니다. '메타버스', VR', 'AR' 등의 용어가 학계/언론/시장 등 여러 영역에서 본격적으로 대두되는(혹은 이미 자리 잡은?) 작금의 시대에, 너무나 당연하게도 <엑시스텐즈>가 관객에게 충격을 안겨줄 수는 없다. 가상/대체 현실로의 접속은 우리에게 더 이상 낯선 상황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엑시스텐즈>가 사회학적 담론을 새롭게 생성한다는 측면에서 유효한 건 아닌 것 같다. 그보다는 이 영화에 나타나는 감각의 문제들이 흥미롭다. 인물과 관객들 사이의 교류 혹은 관객과 영화 사이의 연결과 같은 관계에 있어, 이 영화는 감각이라는 요소를 어떻게 매만지고 있는가.
<엑시스텐즈>가 종종 선택하는 인과성의 소거와 생략은 스크린 외부로도 적용되는데, 관객들은 그저 기교 없이 단순하게 접합된 숏과 숏을 바라볼 수밖에 없지만, 인물들은 어느새 게임에 접속해 있고 관객 역시 이 경계 넘나들기의 순간에 관해 능동적으로 추론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여기서 발생하는 감각의 교란. 자신이 내던져진 세계의 존재 가능성과 그에 귀속되는 자신의 존재 가능성을 모두 가늠해 보는 일. 이는 똑같이 관객에게도 역시나 적용된다. 어디까지 현실이고 어디까지 게임인지 구분이 모호해지는 순간이 오면, 관객은 등장하는 인물들의 존재론적인 진위 여부까지 의심하게 될 수 있다. 감각의 혼재와 교란은, 이 영화의 독특한 미장센을 통해 매체적인 측면에서도 모호한 매력을 뿜어낸다. 가령 이 영화에선 현실 속의 돌연변이 종이 그래픽으로 처리되어 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에 반해 게임 속의 생체 총은 실체가 있는 유기물 요소들의 집합으로 배치되어 있지 않은가. <엑시스텐즈>는 곱씹어 볼수록 독특한 매력을 뿜어낸다.
물론 이건 냉정하게 봐선 그렇게 특별한 담론이 아니다. 그런데 동시에 나는 뜻하지 않게 이 영화의 함의가 확장될 수 있겠다는 징조를 발견하기도 했는데, 이건 바로 영화가 상영되는 장소 혹은 상영되는 매체의 속성의 문제에서 비롯된다. 나는 <엑시스텐즈>를 당연하게도 노트북으로 감상했다. 이 영화가 게임(비일상)-현실(일상) 구조를 뒤흔드는, 존재론적인 혹은 인식론적인 진위 여부를 계속해서 흔들고 있는 구조로 짜여 있기에, 결국 <엑시스텐즈>는 매체를 넘나드는 체험, 감각을 인지하는 방식의 조작 가능성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만 같다. 즉, 극장에서 상영되는 필름 버전의 <엑시스텐즈>와 PC에서 픽셀화된 디지털 파일로 재생되는 <엑시스텐즈>, 그리고 휴대폰 스트리밍으로 재생되는 <엑시스텐즈> 등이 각각 관객에게 인식될 때, 실체가 감각되는 일에 관한 이 모호한 영화의 실체가 과연 무엇으로 수렴할 수 있는 걸까.
영화 속에서 '게임'이라는 것은, '(콘솔)게임기'와 '접속 시의 모션'과 '게임 속의 플레이어들과 그를 둘러싼 세계의 일부'로만 설명되기 때문에, 그 '게임'이라는 실체의 A to Z가 관객들에게 감각될 수는 없지만, 현실과 비현실의 교차로 인해 '게임 속 세상'이라는 어떤 존재론적인 실체의 일부는 분명하게 구체화될 수는 있다. 그리고 그 실체가 관객에게 어떤 매체를 통해서 다가가는가의 문제. 아...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영화를 보고 난 직후 들었던 생각의 파편들에 관해, 최대한 당시의 느낌을 살려 남겨놓고 싶어서 퇴고를 많이 하지 않았습니다.
예전에 봤을 때는 사이퍼가 마냥 빌런처럼 보였는데, 지금 보니 세상의 진실 따위에 매달리는 것에 관심 끄고 싶어 하는, 잘 먹고 잘 자는 삶에서 벗어나지 않고 싶었던 그의 마음도 이해가 간다. 물론 앤더슨도 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만을 위해 네오의 삶을 선택했겠지만, 사이퍼 역시 자신을 위해서 선택했다. 어쩔 수 없이 딜레마의 문제고 언제나 선택은 각자의 몫이다. 그리고 그에 따른 책임도 각자의 몫이다. <매트릭스>가 탁월한 영화인 이유는, 인식과 선택 그리고 믿음이라는 서사적 동력이 이분화된 영화의 내적 세계 속 논리와 정확하게 연동된다는 데에 있다. 작중 인물의 대사로도 언급됐던 것 같은데, 결국엔 인식하게 되는 대상 혹은 세계의 진위 여부보다도,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들의 마음이다. 선택이라는 행위는 권장되는 게 아니라 필수적인 행동이지만, 그렇다고 선택이 모든 걸 담보해 주지는 않기에, 결국 주체는 끊임없이 자신이 믿고 싶은(또는 믿는 또는 믿으려 하는) 것을 위해 투쟁한다.
P.S. 의도치 않게 나름 유사 소재를 활용한 <매트릭스>와 <엑시스텐즈>를 연달아 감상했는데 어쩐지 더욱 모호하게 처리된 <엑시스텐즈>가 더 마음에 든다. 왠지 더 오래 붙들고 싶은 영화는 <엑시스텐즈>다. <매트릭스> 역시 내게 질문을 남기지만, 그 질문들이 도달해야만 하는 지점들이 너무 명확하달까... 반면 <엑시스텐즈>는 내게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흥미로운 쟁점을 부각하는 영화처럼 느껴졌다.
MCU 세계관에서 내내 공허에 사로잡혀 있던 빈약한 피터 파커의 서사를 예상치 못한 기획을 통해 매만지려는 스토리텔링이 어떤 선례로 남을지는 모르겠으나, 동시에 이러한 영화 제작사(들)의 골 때리는 선택이 어쩌면 향후 상업 영화판을 뒤흔들 패러다임 전환의 시발점이 될 수 있을 것만 같다는 생각도 함께 든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속의 이해관계가 영화 내부의 논리에 편입되는 방식이 가져오는 흥미로운 효과를 그냥 지나치기 힘들다. 또한, 멀티버스나 평행 우주 같은 초거대 규모의 시공간적 배경을 서사에 녹여내는 작법 자체가 흥미롭다기보단, 그로 인해 이 영화로 편입되는 것들이 이 영화의 서사와 어떻게 연동되어야만 하는지의 문제가 더 관심이 간다. 이 영화는 단독으로 보자면 텅 빈 영화다. 말하자면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은 어딘가에 기생하거나 어딘가에 올라타야만 한다. 이 영화는 단독으로 성립될 수 없다. 그런데 재밌게도 이 영화가 단독 작품으로서의 존재 가치를 획득하는 순간은, 바로 영화가 끝나는 시점부터다. 이건 피터 파커의 서사로 보아도, 소니 측에서 제작할 새로운 프로젝트로 보아도 어느 측면에서든 자명하다. 이런 방식으로 경계를 넘나드는 시도(?)가 과거에도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영화의 파급력을 상상해 보는 일은 분명 즐거울 것이다.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IM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