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2.31-2022.01.06
<바람아 안개를 걷어가다오>(이하 <바람아>)에서 감독은 엄마와 아들을 중심으로 극을 전개하면서도 아빠와 동생까지 무대로 불러들인다. 아마 <바람아>를 이끄는 핵심 모티프는 가족에 가까이 있는 무언가처럼 보인다. 여기서 나는 ‘가족’이 아닌 ‘가족에 가까이 있는 무언가’라는 모호한 표현을 굳이 사용했다. 그만큼 이 영화는 분명한 화법으로 관객을 사로잡지 못한다. 영화는 자꾸만 관객의 손아귀를 빠져나간다. 어쩌면 <바람아>는 단일 범주로 규정되길 바라지 않는 영화가 아닐까. 엄마와 아들이 공유하는 일상과 대화를 걷어내면, 가족의 분열이나 응어리진 마음 같은 것들이 드러나기도 하고, 인생의 궤적을 스크린에 재현하는 것과 가상의 영역을 현실처럼 보이게 하려는 시도들이 뒤섞이기도 한다.
아들의 시점이 종종 동원되는 1부에선 엄마를 향한 자식의 마음이 드러나지만, 아들을 향한 엄마의 심리는 쉽사리 표상되지 않는다. 연이어 따라붙는 2부의 배치는 이런 맥락에서 1부의 연장으로 보아도 좋다. 엄마의 시점 숏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람아>는 ‘엄마의 영화’가 아니라, 아들이 생각하는 ‘엄마에 관한 영화’가 되는 것만 같다. 그렇다면 각각의 장마다 엄마가 교체되는 건 그렇게 이상한 일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감독의 기억 어딘가에 자리한 엄마의 모습을 스크린을 통해 재구성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인과율이 헐거워진 자리에 무엇이 스며들고 있는가. 1, 2, 3부의 관계를 음미하면서 우리는 특정 이미지들이 연쇄되거나 겹친 모습을 본다. 유사성의 측면이든 이질성의 측면이든, 엄마와 엄마, 엄마와 아들, 그리고 사라진 아빠의 존재감이 지속해서 환기되는 양상까지. 이렇듯 <바람아>에는 가족을 분열시키는 프리즘 그리고 몇몇 매개물(사진, 캠코더 등)이 있다. 우리는 감독의 개인 사연이 담긴 물건들을 만날 때, 관련된 당사자들이 느꼈던 것들에 관해 가늠하기 어렵다. 영화 속 그것들이 실제 감독의 소유물인지도 알 수 없기도 하다. 영화를 통해서 가공되는 엄마의 사연들도 그렇다. 묻어뒀던 정서의 발굴과 복원, 재현이 곧 당사자가 직접 느꼈던 심리 요소와 정확히 대응할 수는 없다. 현실과 영화 사이의 경계는 흐릿해질 수는 있을지언정 사라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바람아>는 추억을 보존하고 가공하는 방식에 관한 감독의 고민이 반영될 수밖에 없는 영화가 된다. 그리고 감독은 이 고민을 관객과 함께 나누고자 한다. 그래서 이 영화는 ‘가족 영화’라기보단 ‘가족에 가까이 있는 영화’다. 가족의 구성/해체로 귀결되는 화소(話素)를 염두에 둔 내러티브는 <바람아>의 관심사가 아니다. 그리고 관객은 이 영화의 플롯을 재배열하는 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아도 괜찮다. 어쩌면 불완전하게 조립되었다는 사실을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도식 짜 맞추기에서 벗어날 때, <바람아>는 극화된 인공성에 치우치지 않으면서도 영화 언어의 특성을 저버린 논픽션의 영역에 매몰되지 않을 수 있는 동력을 얻는다. 균형감과 이질감으로 둘러싸인 <바람아>는 이 시대의 가족 영화가 가닿을 수 있는 또 하나의 탐색 지대를 가늠하고 있는 건 아닐까.
<바운드>에선 배우들이 돋보인다. 사실 지나 거숀을 <쇼걸>에서의 모습으로 기억하고 있는 나로서는, 터프한 수리 기사로 분한 거숀의 색다른(?) 모습을 유의 깊게 살펴보려 했지만, 바이올렛 역을 맡은 제니퍼 틸리의 아우라에 압도당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나 바이올렛의 관능적인 목소리 톤이 극의 무드 자체를, 인물과 인물 사이의 공기를 바꿔놓는다. 틸리의 연기가 흔히 이런 장르에서 종종 등장하는 전형적인 캐릭터상을 구현한 것에 불과할지라도, 극에 표출되는 그 존재감만큼은 압도적이다.
두 사람은 서로가 뿜어내는 섹슈얼한 본능과 직관 같은 것들에 무의식적으로 이끌렸고, 서로 생판 모르는 상황임에도 막연한 호감에서 비롯된 희망을 믿어보려고 했으며, 계속해서 깊어지는 사랑이 결국 그 어떤 이해관계나 쟁점들보다도 강력하게 자리 잡을 수 있었다. 두 여인은 서로 신뢰하는 듯 보이지만, 영화는 종종 편집으로 그것을 교란시켜 관객에게 전달하므로, 인물 사이의 관계가 계속해서 분기점을 맞이할 때(어떤 흐름이든) 그 쾌감 역시 극대화된다. 극 중 인물들은 자신이 겪지 못했거나 볼 수 없는 것들에 관해 자의적인 판단을 내려야 할 때가 많은데, 이때 이 영화에서는 그 점을 범죄 행각과 연루시키면서 간결하고 몰입감 있는 상황을 계속해서 관객에게 제시한다. 두 사람의 작전이 무엇을 동력 삼아 전개되고 있는가. 일단 네가 나를 배신하지 않은 것이 확인된다면 나도 너를 배신하지 않겠다는 신뢰 관계 구축. 이것이 살얼음판을 딛게 하는 실행력을 불어넣는다.
* 제작 당시의 이름으로 표기하였음.
1.
<해탄적일천>이 계속해서 중첩되는 액자식 플래시백을 극의 중심 화법으로 선택했어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면 무엇인가. 오랜만에 만나 회포를 푸는 자리에서 과거의 기억들을 끄집어내는 일들. 현실이 각박해서 잠시 과거를 추억하는 상황들. 어찌 됐건 회상이나 추억이라는 행위에는 그 자체로 불완전한 속성이 내포되어 있다. 이때 영화 속 플래시백으로 재현된 인물들의 사연은 매체적인 특성상 관객에게 그 시절의 그 감성이나 그 느낌을 생생하게 펼쳐놓을 수 있는데, 이로 인해 영화 내적 세계 속의 인물과 스크린 외부에 위치한 관객 간의 정보 격차가 생긴다. 인물들 각자의 기억과 스크린을 통해 제시되는 장면들이 동치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린자리가 과거를 떠올릴 때, 관객이 마주하는 린자리의 과거와 린자리 본인이 떠올리는 과거의 이미지는 같아질 수 없다. 본래 기억이라는 것은 매개되거나 가공될 운명을 타고났기 때문이다.
그때 이런 일이 있었는데, 가만있자 그 지점에서 생각해 보니 이런 일도 무시할 수 없겠다는 식으로 꼬리를 엮어내며 전개되는 <해탄적일천>에서 우리는 인물들이 살아온 과거의 모습을 직시할 수 없다. 재현되려고 하거나 혹은 보존되는 것처럼 보이는 기억의 덩어리들을 보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현시점의 인물이 무엇을 감각하는 것인가의 문제다. 그런데 기묘한 건, 액자식 구조로 인해, 과거 어느 시점의 인물이 마치 현재에서 과거를 떠올리는 듯한 방식으로 무언가를 감각하는 모습이 포착된다는 점이다. 시간성의 경계가 사라지는 듯한 인상을 준다. 이 영화의 독특한 면모는 이런 지점들로부터 나오는 것 같다. 이에 관해서는 다회차 감상 이후 생각을 정리하고 싶다.
2.
사실 후반부에 단정 짓는 듯한 포인트는 쉽사리 동의할 수 없었다. 온갖 사건을 경험하고, 고난과 역경을 지나고 난 뒤 찾아오는 것을 우리는 성장이라고 딱 잘라 단정 지을 수 있을까? 그럼에도 이 영화가 채택한 액자식 구성은 영화에 녹아든 정서와 연동되는 지점이 많았기에, 극 중 인물이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면 그들을 존중해 주고 싶은 마음도 든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성장했다고 말하는 부분이 없었다면 훨씬 좋았을 것 같다. 어차피 인간은 매번 비슷한 선택을 하면서도, 더 나은 가능성에 목매는 불완전한 존재들이다. 회의론적인 시각에서 하는 말이 아니다. 인간은 결핍과 미숙함을 필연적으로 안고 살아가야 하며, 우리는 그것들을 최소화하기 위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분투한다. 남편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확신하는 린자리에게 오빠가 말했듯, 너는 지금 똑같은 고민을 하고 있는 건 아닌가. 그래서 인생에 성장은 존재하지 않는다. 더 나은 내일, 더 나은 삶을 기대하는 마음과 그걸 위한 몸부림만이 있을 뿐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탄웨이칭이 굳이 스케줄까지 취소해가면서 린자리를 만나려던 이유가 무엇이었는가. 분명 이유가 있었다. 그런데 탄웨이칭은 린자리와 헤어질 때가 되어야 문득 그 이유를 떠올린다. 물어보려고 했던 것을 까먹고 만 것이다. 이런 상황 역시 묻어뒀던 과거를 떠올리며 이들이 나눴던 대화 상황과 다를 바 없는, 일종의 에피소드의 연속이다. 매번 매 순간 우리 인생은 원했던 대로, 내 뜻대로, 생각한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영화 속 인물은 몇 십 년이 지나서야, 고향을 훌쩍 떠나 도시에 정착했다가 끝내는 해변에 당도하고 나서야 깨우치게 된 걸까. '삶'이라는 거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느슨한 운명적인 굴레의 작동 원리를 가늠하는 방법 말이다. 그럼에도 인간은 여전히 불완전한 존재들이 아닐까. 그래서 우리네 삶은 과거에도 오늘도, 앞으로도 당면한 것들을 쉽사리 헤쳐나갈 수 없다. 그래서 나는 화면을 정지해버리는 구간에는 동의할 수 있다. 영화는 그 너머를 해결해 줄 수 없기 때문이고, 현실의 관객들이 그것에 관해 각자의 접근법을 적용해야 한다.
스포일러 있습니다.
<당신 얼굴 앞에서>는 하루 남짓의 시간을 담아내기로 한다. 영화는 어째서 이즈음의 시점에서, 이 정도 분량의 시간만을 담아내려고 한 것일까. 그러니까 인물이 몸담은 세계의 맥락을 관객이 납득할 필요가 있다면, <당신 얼굴 앞에서>가 선택한 시간은 관습과 필연의 논리에서 벗어날지도 모른다. 이 영화는 여생을 마무리하러 귀국한 여인의 하루를 슬쩍 관객에게 펼쳐놓는데, 영화는 극을 이끄는 데 있어 앞뒤 맥락과 구체적인 정황 묘사에 굳이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이다. 아직 죽음의 시간은 당도하지 않았다. 아니 죽음의 시간이 도래할 것이라는 정보마저도 그저 담담한 발화에 의해서만 포착될 뿐이다. <당신 얼굴 앞에서>는 비유하자면, 상옥의 여생이라는 적절한 길이의 테이프가 있는데, 그것의 절단점을 대강 눈대중으로 잡은 뒤 극소량의 테이프를 잘라내어 관객에게 보여주려는 영화 같다. 여기서 테이프가 끝나는 지점이나 시작하는 지점은 찾을 수 없다. 그렇다면 상옥의 여생 가운데 그와 공유할 수 있는 이 '하루 남짓한 시간'은 죽음과 결부되지 않은 어떤 상징적인 시기로 작용할 수 있는 것일까? 아직 정리되지 않은 단상들이 내 머리를 맴돌고 있다.
상옥의 내면이 종종 독백으로 불쑥 개입되지만, 과연 이것을 죽음을 그 자체로 수용하는 초연한 목소리로 받아들일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기엔 이 영화가 인물이 떠안은 시련(시한부 선고)을 극의 동력으로 삼으려는 것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점이 흥미롭다. 이때 인물의 고통이 극 흐름의 주체로 자리하는 흔치 않은 순간 가운데 하나가 바로 재원과의 미팅 자리인데, 여기서 상옥은 아무렇지도 않게 죽음이라는 화두를 끌어들여 재원을 당황시킨다.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던 정보가 극적인 가공을 거치지 않은 채 술기운에 실린 몇 마디 말로 재원과 관객에게 노출된 셈이다. 그런데 술자리가 종료된 이후, 다음 날이 되었을 때 관객은 어쩌면 상옥과 재원이 약속했던 작업 겸 여행의 성사 여부에 관심을 두고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의외로 영화는 죽음의 장막이 아른거리는 상황에 관해서는 전혀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생전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상옥과의 단편 작업을 정중하게 철회하는 재원의 음성 메시지가 흘러나오면, 상옥은 뜬금없이(혹은 마치 예측했다는 듯) 한바탕 웃음을 늘어놓는다. 그리고 똑같이 전날과 다름없이 동생보다 먼저 일어난 상옥의 모습이 카메라에 담기면, <당신 얼굴 앞에서>의 일탈 혹은 소동(그렇지만 일상 같기도 한)은 마무리된다. 아니 마무리라기보단 그 끝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모호한 경계를 머금은 채 중단된다. 그리고 문득 생각해 보았다. 영화에 여전히 남아 있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이 죽음을 앞둔 존재의 결연한 의지 따위로 귀결될 수는 없다고 느꼈다. 그렇다면 내게 남는 것은 어쩌면 상옥의 읊조림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다. 담담하게 지금 주어진 이 순간에 감사하는 몇 마디 독백 말이다.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