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영화

2022.01.07-2022.01.13

by 드플레

<피터와 드래곤(Pete's Dragon)> (데이빗 로워리, 2016)


숲은 늘 그래왔다. 미지의 공간,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장소. 그래서 숲 속에선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숲은 알다가도 모를 곳이다. <쁘띠 마망>의 넬리가 숲을 넘나들며 엄마와 마주하고, 해리와 론이 아라고그를 만났던 것처럼 말이다. 이 영화 속 숲에서도 신비한 존재가 산다. <피터와 드래곤> 속의 엘리엇은 날개가 달린 불을 뿜는 (서양의 전형적인) '드래곤'이다. 그런데 엘리엇을 가만히 살피다 보면, 드래곤의 정형화된 이미지에 가둬놓기엔 애매한 구석이 많다. 신묘한 존재의 위엄을 제대로 갖췄다기엔 너무나 엉성하고, 사람을 잘 따르는 애완동물처럼 보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과연 소년과 드래곤이 서로에게 어떤 존재로 기능할 수 있는가. 그리고 두 존재가 다른 세계의 존재들과 충돌할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사실 <그린 나이트>(2021)를 통해 로워리의 영화를 처음 접했던 탓인지는 몰라도, <피터와 드래곤>을 보며 로워리 특유의 인장을 괜히 찾아보고 싶었다. 빛이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찍어내는 장면들, 그에 따른 자연 풍광을 어떻게 담아낼 것인지의 문제들, 삶과 죽음 사이의 진동 같은 요소들이 생각보다 잘 느껴진다. 디즈니식 클리셰에 속박되지 않는 듯한 오묘한 돌출점들이 감지될 때마다 상당히 흥미롭기도 했다. 물론 <피터와 드래곤>은 어떻게 본다면 엄청 뻔하고 게으른(?) 영화다. 피터와 엘리엇의 교감을 담아내는 장면들에선 <이웃집 토토로>가, 인간과 초자연적 존재 사이의 갈등을 보고 있으면 <모노노케 히메> 같은 작품이 너무나도 자연스레(굳이 힘들이지 않고도) 떠오른다. 주절주절 예시를 열거하지 않아도, 이 영화는 그만큼 많은 콘텐츠를 통해 공식화된 안정적인 화술을 디즈니 설계 아래 전개하고 있다. 그럼에도 소박한 마음가짐 아래 담아낼 것들을 확실하게 담는 장면들을 그 자체로 음미하는 맛이 있기에, 내게 있어 <피터와 드래곤>은 디즈니와 지브리가 믹스된, 동서양의 감성이 오묘하게 뒤섞인 따스하면서도 스산한 영화로 남을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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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청춘> (정창화, 1966)


<위험한 청춘>은 저마다의 문제를 안고 살아가는 인물들을 한자리에 모은 뒤 갈등을 엮어낸다. 이때 영화는 누나를 위한답시고 구상한 계획 같지도 않은 계획을 당당히 실천하는 덕태를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가. 그리고 마찬가지로 양면성을 가진 민 전무에게 어떤 스탠스를 취하고 있는가. 그리고 이들에게 휘말려 애꿎은 피해자가 되고 마는 인물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어쩐지 영화는 덕태를 마냥 감싸지도, 그렇다고 마냥 타박하지도 않는 듯한 묘한 저울질을 선보인다. 그렇다면 덕태가 불안정한 줄타기에 노출된 청춘들의 모습으로 환원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덕태뿐 아니라, 다른 이들 역시 혼란스러운 상황에 직면한 채 이리저리 휘둘리고야 마는 '위험한 청춘'들이 될 수 있는 것일까.


밀도 높은 심리 묘사가 가능할 법한 소재였음에도, 인물들의 내면에 충분히 진입하지 못한 채 겉도는 전개로 인해 그 매력이 퇴색되는 듯하다. 오로지 배우 본연의 매력(신성일 등의 당대 청춘 스타 캐스팅)으로 크고 작은 구멍들을 가리려고 하는 것 같다. 후반부 영아가 당신을 죽도록 사랑하겠다며 진심을 성토하는 장면은, 그간 이 캐릭터를 감싸왔던 여러 맥락을 소거한 채 그 자체만으로 의미를 획득할 수 있을까. 인물의 경로를 따라가면서 그저 단편적인 에피소드를 이어붙이는 데에만 관심 있는 이 영화의 심드렁한(어쩌면 무책임한) 태도는 어쩐지 영아의 진심에 호응해 줄 수 없을 것 같다. 그래서 아무리 남자들이 주먹을 교환하고, 남녀 관계를 둘러싼 치명적인 이벤트들이 발생할지라도, 영화는 인물들의 심리를 묘사하기보단 전시하고 나열하기만 했기에 관객이 그들과 동화되도록 하지 못한 것 같다. 그래서 종종 웃음을 유발하는 구간들, 애틋한 감정선이 구현되는 지점들이 존재감을 드러낸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런 장면들을 온전히 음미하기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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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스 오브 구찌(House of Gucci)> (리들리 스콧, 2021)


파트리치아와 마우리치오가 서로 처음 만난 파티에서, 남자의 풀네임을 듣자마자 잠시 멈칫하는 여자의 눈빛과 표정을 카메라는 분명하게 포착한다. 거기서부터 <하우스 오브 구찌>는 모든 패를 내놓고 시작한다. 이 여자의 목적지는 정해져 있으며, 영화 또한 그 궤적을 따라가겠다고 말이다. 물론 영화는 구찌 가의 며느리가 된 야심찬 이방인의 서사만 담아내지 않는다. 영화의 제목을 따라, 구찌 가문의 주요 인물들의 사연 또한 훑어나가고 있다. 이때 마우리치오 역시 외부의 혈통이 섞였다는 이유로 순혈주의를 중시하는 집안에서 늘 겉돌기만 하고 있는데, 파트리치아는 이 점을 파고든다. 남편이 다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 가족 사업에 힘을 보태야 한다는 교묘한 논리를 내세운다. 기필코 레지아니가 아닌 구찌로 불려야만 하겠다는, 아니 구찌가 되어야만 하겠다는 자신의 야망을 능구렁이처럼 키워나간다. <하우스 오브 구찌>는 텁텁하고 차갑지만 한없이 부드러운 코너링으로 관객을 결말까지 안내한다. 파트리치아의 집요한 면모와 호응하는 엔딩 신이 인상 깊다.


파트리치아가 도메니코에게 던졌던 뼈 있는 말들. 구찌 가의 사업은 외부인에 의해 잠식되어 가다가 결국은 무너질 것이라는 암시가 시간이 갈수록 존재감을 키운다. 미세한 균열을 어떻게든 비집고 들어가야겠다는 사람에게, 세계 내부의 구성원들은 거부감을 표시한다. 영화에서 인상적인 몇몇 신이 있는데, 그 가운데 인물들의 처지를 뛰어나게 보여주는 장면이 바로 짝퉁 제품을 두고 알도와 마우리치오, 파트리치아가 실랑이를 벌이는 신이었다. 노점에서 버젓이 판매되는 짝퉁을 본 뒤, 구찌의 신뢰도에 금이 간다며 불같이 화를 내는 파트리치아에게 '구찌 가 사람들'이 우리 가족 일에 네가 왜 끼어드냐는 식으로 일갈하는 장면. 여기서 미묘하게 뒤틀리는 파트리치아의 표정. 인물들을 감싸는 공기가 어떻게 시시각각 달라지고 있는지 영화는 담아내고 있다.


P.S. 현실 속 이벤트를 질료 삼아 각색된 <하우스 오브 구찌>에서 특이한 점은, 흑백 사진으로 처리되는 구간이 종종 등장한다는 점이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될 지점들에 굳이 그런 방식을 할애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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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송> (박대민, 2020)


고독한 드라이버의 내면을 들여다보기엔 너무 경쾌한 게 문제고, 그렇다고 마냥 흥겹게 템포를 끌어올리기엔 진중한 사연들이 톤 다운을 시키면서 발목을 잡는다는 게 살짝 골치 아프다. 인물 각자에게 서사를 꼼꼼하게 부여하지 않기 때문에(정확히는 영화 자체가 인물들에게 그다지 관심이 없는 각본에 기초하기 때문에), 이 영화의 드라마는 극이 진행될수록 힘을 잃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장르 쾌감으로 승부를 보는 편이 좋겠으나, <특송>은 그마저도 부분적으로 성취하는 듯하다. 인상 깊은 장면들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영화의 전반적인 톤 매칭이 다소 붕 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몇몇 강렬한 장면조차도 (많이들 언급하는) 특정 영화들을 레퍼런스 삼았다는 데에 빚지고 있는 것 같다. 리듬감을 극대화한 연출로 덧칠하든가, 캐릭터 저글링을 밀도 있게 배치했어야 하지만 <특송>은 어쩐지 여러 군데 발만 슬쩍 담갔다가 이내 빼버리고 같은 행동을 반복한다. <특송>은 형형색색의 빛깔을 품고 있지만, 그것들이 애매하게 희석된 채 관객에게 가닿는 듯하다. 차라리 하나의 선택지에만 집중하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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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KM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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