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영화

2022.01.14-2022.01.20

by 드플레

<프랑스(France)> (브루노 뒤몽, 2021)


방송 기자 프랑스 드 뫼르에 국가 프랑스라는 필터를 덧씌우는 일이 오히려 <프랑스>의 탐색 지대를 제한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삼색기로 시작하는 <프랑스>는 파랑/하양/빨강으로 환원되는 이미지들을 영화 곳곳에 깔아놓기도 하고, 의상이나 소품으로 드러내기도 한다. 얼핏 보면 영화가 특정 방향으로의 해석을 강제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영화에 녹아든 갖가지 요소들이 오로지 정해진 답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건 아닐지도 모른다. 그래서 프랑스라는 국가를 둘러싼 정치, 사회, 경제 등의 복합적인 맥락의 논의에만 <프랑스>를 가둬놓는 건 영화의 가능성을 제한하는 불완전한 감상처럼 느껴진다. 물론 제목부터 국가를 소환하는 <프랑스>는 주인공을 통해 분열하는 현시대 프랑스가 직면한 상황을 폭로하고 풍자하며 직시하려는 영화일 수 있으나, 오히려 은유와 상징을 걷어냈을 때 비로소 영화가 품은 매력을 발견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다.


내게 <프랑스>는 일부러 관객의 지각 체계를 자극하고, 관객이 낯설게 느끼도록 유도하는 영화처럼 느껴진다. 어째서 영화는 클로즈업 줌인을 곁들여 스크린을 여자의 얼굴로 채워 넣으려고 하며, 도대체 왜 <프랑스>에선 카메라의 시점이 그토록 정신없이 바뀌어야만 하고, 무슨 이유로 몽환적인 앰비언트 전자음이 관객의 귓가에 앵앵거리도록 내버려 두어야만 하는 걸까. 연출을 맡은 뒤몽 본인에게 내포된 면모가 영화 속 프랑스에게, 또한 프랑스를 연기하는 레아 세두에게 일정량 투영되는 것 같다. 스타 기자 프랑스가 취재 현장을 지휘하는 연출자처럼 보인다는 점에서, 그녀는 뒤몽과 닮았다. 세두 역시 본인이 구축한 인물의 세상 및 외연과 내면을 관객에게 설득시키려 한다는 점에선, 감독인 뒤몽이 자신의 영화가 관객에게 가닿는 방식을 고민하는 모습과 겹쳐 보인다.


<프랑스>는 인물들을 담아낼 때 계속해서 시점을 섞는다. 가령 도입부에 마크롱 대통령이 참석한 기자 회견장에서 프랑스와 루에게 할애하는 숏들은, 구도나 피사체와의 거리가 계속해서 미묘하게 달라지는 형태로 조합된다. 프랑스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이 촬영되는 스튜디오에선, 영화를 위해 구축된 세트장(혹은 실제 스튜디오)을 찍는 뒤몽의 카메라와, 프랑스의 단독 진행 프로를 찍는 현장 카메라의 촬영 장면이 혼재되면서 영화가 구성된다.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이, 영화는 프레임의 경계를 허무는 수준을 넘어 무시하고 있다. 프랑스가 현장 취재를 가는 구간들에서도 이런 방식이 발견된다. 프랑스가 현장에서 연출했던 장면이 관객에게 실제 방송 화면, 즉 최종 편집본으로 제시되는 순간, 그리고 그 송출되는 광경을 프랑스 본인이 직접 지켜보는 장면을 뒤몽의 카메라가 기어코 담아내고 나면, 경계라는 건 이미 의미를 상실해버리고 만다.


브루노 뒤몽-프랑스 드 뫼르-레아 세두 간의 관계에 있어, 서로의 존재성이 서로에게 알게 모르게 전이되었던 것처럼, 이 영화의 구성 역시도 여러 시점과 구도가 혼재된 상태를 굳이 정렬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규정될 수 없는 무언가로 계속해서 존재감만을 발산하고 있는 것 같다. 관객의 단일 지각(눈/귀 등)에서 비롯된 명확한 인식 체계는 작동할 수 없다. 감각의 교란을 유도하는 화법 자체를, 관객과 영화 혹은 대중과 언론/미디어 사이의 장력과 같은 형태인 '콘텐츠 생산자-수용자의 관계'가 형성되어가는 과정 자체를 <프랑스>로 여기고 싶기도 하다.


<프랑스>는 프랑스 드 뫼르와 레아 세두 그리고 뒤몽을 오가는 어떤 존재의 초상을 끈질기게 담아내려고 하지만, 그 작업은 완벽하게 수행될 수 없다. 그래서 카메라는 조금씩 거리를 바꾸거나 시점을 바꿔야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날것의 피사체 혹은 진실 같은 것을 오롯이 직시할 수 있을까? 마침내 존재의 얼굴에 바짝 붙을 수 있게 되는 순간이 오면, 우리는 무엇을 보아야 하는가. 프레임을 가득 메우는 얼굴이 여전히 카메라 렌즈라는 장벽 너머에 있다는 점 때문에 다시 영화는 불가해한 관념 덩어리로 변한다. 솔직히 나는 이 영화를 온전히 소화할 수 없었다. 앞서 무슨 말을 그리 장황하게 끄적인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오랜만에 매료되는 영화를 만났기에, 불완전한 감상이라도 끄적이고 싶었다.




<라야와 마지막 드래곤(Raya and the Last Dragon)> (돈 홀 & 까를로스 로페즈 에스트라다, 2021)


<라야와 마지막 드래곤>(이하 <라야>)은 믿음이 가져다 줄 변화를 긍정하고자 한다. 나를 배신한 상대일지라도 조건 없이 믿어줄 수 있는지의 여부. <라야>는 계속해서 이런 쟁점을 문제 삼아 인물들을 선택의 무대로 이끈다. 이때 <라야>는 각 인물의 믿음에 동반되는 상황을 어떻게 가공하고 있으며, 그들이 서로를 믿는 순간을 어떻게 강조하는가. 각 부족의 특산물을 섞어 만든 요리를 통해 화합을 강조하는 라야의 아빠는 부족 간 통합을 향한 희망을 놓지 않는 사람이다. 그가 품었던 막연한 희망이 사라진 자리는 시수의 가치관으로 대체된다. 그리고 마침내 아빠의 믿음이 우여곡절 끝에 시수를 매개로 굳게 걸어잠긴 라야의 마음 속으로 진입하는 순간을 <라야>는 임팩트 있게 묘사하는 데에 성공한다.


그런데 <라야>는 어딘가 미심쩍다. 남미 지역(콜롬비아)에서 펼쳐지는 <엔칸토>에 비하면, <라야>는 설득력을 상실한 이야기만 늘어놓는 듯하다. 적어도 <엔칸토> 속의 고립된 미지의 마을은 혈통과 가족으로 얽힌 테마 요소들과 충분히 연동될 수 있었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의 이전작으로 조금 거슬러 올라가 보아도, 꿈을 말하는 <라푼젤>의 이야기는 인물들의 개인적인 동기에서 비롯된 사연들이 얽히면서 서사가 구축될 수 있었으며, 마법의 꽃이 나오긴 했지만 <라야>처럼 신비한 설정을 끌어모으지 않아도 그 자체로 충분했다. <겨울왕국>에서 엘사의 굳어버린 내면이 그의 특수 능력과 결부될 수 있다는 설정은, 정체성과 사랑의 형태를 가늠하게 하는 지표로 활용되는 데에 부족함이 없었다. 엘사가 마법으로 지은 궁전이 곧 그의 심정을 대변한다는 것 또한 억지스러운 메타포가 아니었다. <주먹왕 랄프>의 게임 캐릭터를 동원한 서사 역시 개개인의 실존과 맞닿은 설정이 극의 전개를 효과적으로 뒷받침했던 것을 기억한다.


그런데 <라야>는 다르다. <겨울왕국>의 엘사와 안나를 통해서도, <라야>의 이야기는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분열된 공동체의 화합 서사를 위해서 굳이 등불로 수놓인 항구도시, 웅장한 바위산, 크고 작은 강줄기들이 얽혀 있는 아세안 지역의 풍광을 매력적인 세계관으로 조합해낸 이유가 무엇일까. 그러니까 <라야>의 무대가 굳이 신화 요소를 토대로 구축한 혼합형 아세안 공동체여야만 하는 필연적인 이유가 과연 있긴 한 걸까. 말하자면 <라야>는 영화 외적인 요소, 즉 현시대의 담론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디즈니의 스탠스가 오히려 영화보다도 우선시되었다는 점이 극의 전면에 드러난 케이스처럼 보인다. 이때 영화 내부의 요소들이 도구처럼 기능적으로 소비되는 것 같다는 점이 한계처럼 느껴졌다.




<알리타: 배틀 엔젤(Alita: Battle Angel)> (로버트 로드리게즈, 2019)


알리타의 얼굴이 클로즈업될 때마다, 특히나 커다란 두 눈이 프레임을 가득 채우는 순간에 이르면, 크고 작은 생각들이 머리를 스친다. 우선 기술 발전에 대한 일종의 경외감이 피어나고, 이내 공허함이 들어찬다. 제작자인 카메론이 원작 '총몽'의 판권을 진작에 확보한 상태였지만, CG 기술력이 일정 궤도에 오를 때까지 영화화를 묵혀두었다는 후문이 있다. 그러니까 <알리타>는 막강한 자본을 등에 업은 채 탁월한 기술력을 관객에게 선사하는 데는 성공한다. 그런데 색상이 혼재된 홍채 영역이나 푸석한 머리카락의 질감을 리얼하게 묘사할 수 있다는 것에 심취한 나머지, <알리타>는 그 정도로만 만족하는 건 아닐까.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 문제가 직관적으로 느껴지는 <알리타>가 오히려 경계성에 관해 큰 관심을 드러내지 않으려 한다는 점에 주목하자.


외형만으로는 판별이 불가능한 인간-레플리컨트('블레이드 러너' 시리즈의 합성 유기물 복제 인간)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 어쩐지 <알리타>는 인간-비인간의 경계를 다루는 데 있어 모호한 구석에 포커싱하지 않는 것 같다. 우리의 지각 체계는 알리타를 인간으로 착각할 수 없다. 인간일 수 없는 알리타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의 과거 즉, 정체성 문제와 맞닿아 있다. 그래서 <알리타>는 망각한 자가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가 되어야 한다. 알리타의 정신과 육체는 놀랍도록 분리가 잘 되어 있어서, 다른 몸이 대체되었을 때 알리타가 그것을 받아들이는 상황에서 수반되는 정신적인 고뇌가 묘사되지 않는다. 오히려 알리타는 몸을 교체하는 과정이 자신을 찾아가는 길이라고 굳게 믿는다. 그렇게 알리타가 기억을 회복하다 보면, 어느새 자신의 사명을 알게 된다. 자신이 누구였는지도 말이다. 그렇게 알리타는 유사 가족 바운더리에서 탈피하여 전사에서 방랑자 그리고 다시 영웅이 될 채비를 마쳐야만 한다. 그것이 자신의 운명이니까 말이다.


<알리타>엔 육체가 수도 없이 교체된다고 해도, 정신은 소멸되지 않고 고스란히 계승된다는 괴리감이 깔려 있다. 금속과 유기체의 결합을 통해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오가는 방식이 통념으로 취급되는 세계관. 이 도시 속 시민들은 자신의 기계 신체 부위가 망가지고 박살날지라도 목숨이 붙어 있는 한, 다시 교체하고 수리해버리면 그만이라는 마인드로 살아간다. 몸이 교체된 휴고가 끝까지 자신의 꿈을 향해 전진하는 모습이 이를 뒷받침한다. 육체는 부속품이다. 좋게 봐줘야 조력자 내지는 수단이다. 물론 알리타 역시 자신의 몸을 교체 가능한 부속품쯤으로 여기는 것 같기는 하다. 그런데 알리타가 오로지 몸만이 자신이 잃어버렸던 것을 되찾게 해준다고 믿는다는 점이 흥미롭다. 그렇다면 육체가 개체에 선행하는 것일까? <알리타>는 비인간 휴머노이드 알리타가 몸에 집착하는 모습을 통해 존재를 정의하는 요소의 우선순위를 어떻게 가늠할 것인지 관해 가볍게 화두를 띄우는 것 같다. 알리타는 나노테크 바디를 만지작거리며 뭔가 연결된다는 느낌을 받는다고 말한다. 몸을 갈아끼워야만 자신의 정체를 밝혀낼 수 있다는 믿음. 이 강력한 믿음은 물론 알리타를 전진하게 해주는 동력이 되기는 하지만, 오히려 영화는 이 설정을 관객에게 선사할 스펙터클 요소의 기반으로만 여기는 것 같아서 아쉽다.




<김약국의 딸들> (유현목, 1963)


독약을 먹고 죽은 여인의 혼령이 기어코 후손들을 파멸로 이끄는 것일까. 집안에 안 좋은 일이 반복되고 중첩될 때마다, 인간들은 안 좋은 일을 야기한 원인에 관해 한 번씩 쑥덕거린다. 특히나 자기 집이 아닌 남의 집안 사정이 악화될 때마다 저 집 터가 안 좋네, 신이 노하셨다는 등 근거 없는 낭설을 늘어놓곤 한다. <김약국의 딸들>은 삶과 종교는 절대로 떼놓을 수 없다는 듯 종교 테마가 개입되는 순간들을 영화 곳곳에 배치하고 있다. 선생님과 용빈이 교회 앞에서 대화를 나누는 신을 떠올려 본다. 각자 기행을 일삼는 동생 용란이를 향한 자신의 견해를 밝힌다. 용빈은 표독스러운 용란이 때문에 주변 가족들이 벌을 받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용란 자신은 벌을 받을 수 없다고 단정 짓는다. 교회를 가지 않는 용란에게는 본능만을 주셨고, 영혼과 종교를 인지한 채 믿음으로 살아가는 다른 이들에겐 괴로움을 주셨다고 하소연한다. 그렇다면 왜 시련과 고난이 있어야 하는가. 인생을 가로막는 이 시련들을 그 자체로 신께서 예비하신 삶의 일부인 것 마냥 태연하게 수용할 수 있을까?


딸들의 인생이 꼬여가는 모습을 보는 엄마는 마을에 있는 영험한 나무에 대고 손을 맞대면서 기도하고 한탄하고 절규한다. 아이고, 신령님 도대체 저희에게 왜 이러시는 겁니까. 무당을 불러서 굿을 하든, 손이 닳도록 예배당에서 기도를 하든 그 어떤 것도 현실을 낫게 해주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강극의 대사는 너무나 잔혹하게 들린다. 저 멀리에 구멍 난 배에 탄 노파를 보라면서 강극은 말한다. 노파가 바가지로 물을 퍼내지 않는다면 배가 가라앉고 말 것인데, 물을 퍼내는 일이 싫다고 해서 저 노파가 일을 멈출 수 있겠느냐고 말이다. 그러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야 하니까 삶을 멈출 수 없다는 논리다. 어쩌면 인물의 고통을 응시해오던 영화는 마지막에 가서야, 그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고 초연하게 삶을 그 자체로 수용해야 한다는 발언으로 인물들이 겪어온 고통을 희석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신에게 의지할 때 나오는 탄식이 아닌, 일상의 단면에서 진리를 찾으려는 발화로 매듭짓는다는 점에선 아주 미약하게나마 지속 가능한 삶에 대한 희망을 엿볼 수 있기도 하다.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KM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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