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1.21-2022.01.27
<결혼피로연>을 장르 영화로 보기는 힘들겠지만, 인물 간의 관계에서 비롯된 이벤트들로 인해 첩보물에서 느껴질 법한 텐션이 맴돌기도 하고 진한 멜로의 질감이 묻어나기도 한다는 점에선 장르 영화처럼 보이기도 한다. 일상의 단면이 영화 같다는 말이 가장 잘 작동하는 사례 가운데 하나가 어쩌면 이안의 가족 영화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결혼피로연>을 보면서 문득 신기했던 점이 있다. 매 장면마다 감정이 교차하고, 갈등이 중첩된다. 말 한마디라든가 소품 하나 만으로도 프레임 내부를 지배해왔던 무드가 은근슬쩍 다른 감성으로 변모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전작인 <쿵후 선생> 때도 그랬지만, 이 영화의 몇몇 장면들을 보고 있으면, 인물과 장소와 물건들에서 느껴지는 것들은 절대 단일한 정서로 쉽사리 환원되지 않는다. <결혼피로연>에서 이안은 촘촘하게 긴장을 쌓아가다가도 실없는 웃음을 선사하고, 순식간에 감동을 주는 드라마를 펼쳐낸다. 하고 싶은 말이 상당히 많아 보이는 영화인데도, 기어코 그 많은 파편과 덩어리들을 한 데 모아 한 편의 영화에 세련되게 녹여냈다는 점도 사뭇 놀랍다.
일상의 핍진성으로 가득해 보이는 <결혼피로연>은 어쩌면 철저한 판타지일 수도 있겠다. 이해가 안 된다는 사이먼의 말에 나도 이해가 안 된다고 받아치는 아버지의 말. 이런 장면들은 뭉클함과 낯선 감각을 동시에 일깨운다. 갈등으로 인한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펼쳐지는 후반부의 숨 가쁜 봉합엔 감독 본인의 소망이 반영된 것 같은 의구심도 생긴다. 그도 그럴 것이 각 인물들의 관계를 주의 깊게 살펴 도식화하면 <결혼피로연>은 정치적인 스탠스를 드러내는 영화로 읽힐 수 있기 때문이다. 청춘들의 부유하는 감정을 붙잡으려던 왕가위 영화 속 공간에 당대 국가 간의 이슈라는 필터를 덧댈 수 있던 것처럼 말이다. 날선 풍자가 대사 곳곳에 서려 있다는 점이 의미심장하다. 심지어 이안 본인이 카메오로 출연하는 모습도 기억에 남는다.
잊혀가는 것들에 집착하던 형은 고집을 잠시 꺾기로 마음먹는다. 동생은 평생 바라던 꿈을 끝내 환상으로 남겨두고 욕망과 잠시 멀어지고자 한다. 하나에 몰두하다 보니 다른 하나에 소홀해지는 걸 미처 몰랐다는 식으로 우리는 매번 삶을 이어나간다. 살다 보면 다른 데에 정신이 팔려 내 곁을 지키던 소중한 무언가가 사라져 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를 수 있기에, <온워드>는 굳이 마법과 전설을 무대로 끌어온 뒤 과연 소중한 것들이 무엇인지 되짚어 보는 여정을 관객에게 선사하려 든다. 당신은 지금 무엇을 놓치고 있나요. <온워드>는 한때는 가치 있던 것들이 먼지 쌓인 책장 속의 사진처럼 빛바랠 수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진 않지만, 동시에 그것들이 누군가에 의해 전승되고 추억될 것이라는 사실을 믿고 싶은 애니메이션처럼 느껴진다. 영화 곳곳에 그런 태도가 배어 있다.
다양한 인물 관계를 응시하는 영화이기 때문에 장소가 쉴 새 없이 바뀌지만, 롱 숏으로 온전하게 장소를 담는 장면이 없는 것에서부터 어딘가 묘한 기운을 뿜어내는 영화처럼 느껴졌다. 장소를 잡아낼 때도 전체를 잡는 경우는 거의 없이 부분만을 파편적으로 담는다는 점이 기억에 남는다. 신과 신을 잇는 상황, 그 사이를 점유하는 숏들에서는 카메라가 줄곧 공간을 여러 각도에서 응시하는데, 이런 시도들이 참으로 쓸쓸한 정서를 만들어낸다. 그래서인지 영화 속 사람들은 모두 유령처럼 보인다. 배우들의 연기도 어쩐지 내추럴한 정서보다는 살짝 귀신들린 듯한 느낌을 표현하는 것 같다. 딱 한 사람을 빼면 말이다. 집안의 중심을 잡고 있으며, 영화 속 사건의 핵심을 담당하는 한 남자. 영화 내내 가장 부산스럽게 움직이면서 활기를 띠었던 인물이 소거되어야만 하는 고하야가와라는 점이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불완전한 기억을 더듬어 보자면, 인물에게 할애되는 거의 모든 숏은 대개 정면 구도의 바스트 숏으로, 이 영화 속의 사람들은 각각의 숏에 외롭게 갇혀 버리는 것만 같다. 특히나 두 사람의 대화에서 투 숏이 거의 없다는 점도 눈여겨볼 수 있겠다. 망자가 사라진 자리에 나머지 가족들이 늘어놓는 말들. 특히나 제멋대로 살다가 결국 그렇게 허무하게 갔다며 비아냥거리면서도 말이 끝나기 무섭게 눈물을 흘리는 장면. 온갖 감정이 교차하는 순간들. 삶과 죽음을 세련되게 은유하는 대신, 직설 화법을 통해 무대로 끌고 온 영화에선 유령들 틈에서 끝내 살아남을 수 없던 사람이 있었다. 왠지 모르게 밍크 목도리가 갖고 싶다며 노래를 불렀던 유리코의 모습이 잊히질 않는다. 애인을 갈아치우며 눈앞의 행복을 좇는 그녀도 과연 여기서 유령이 아니라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도시의 네온사인으로 물질적인 감각을 환기하면서 시작하는 영화는 유족들의 곁을 맴도는 까마귀를 허망하게 비추면서 끝난다.
유려한 리듬으로 숏을 붙여나가는 방식, 음악과 군무를 통해 집단의 갈등을 형상화하는 시도들. 이것들 자체만으로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는 충분히 인상적인 영화가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인물의 말과 행동이 노래와 안무라는 표현법을 거쳐 관객에게 도달할 때, 과연 그 정서가 관객의 내면에 동화될 수 있을 것인지는 살짝 다른 문제처럼 느껴진다. 마지막 장면을 다시 떠올렸다. 가슴이 서늘해진다. 어쨌든 계속될 것이다. 밤이 지나가고 새벽은 차츰 밝아오지만, 갈등은 사라질 수 없고 파국을 돌이킬 수는 없다. 그렇다면 화합이 가능할까? 여러 명이 함께 사람을 옮기는 것 자체만으로는 너무나 급작스러운 봉합일 수밖에 없기에, 이들이 발 딛고 선 세상에 과연 희망이 있을지는 모르겠다.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는 표면적으로도 비극을 다루고 있지만, 이 영화에 내재된 정서 자체가 너무나도 비관적으로 느껴진다. 발렌타인이 제트파를 향해 던지는 말들은 일차적으로 청년들의 가슴에 비수처럼 꽂히겠지만, 그 말들은 스크린 너머의 현실 속 누군가에게도 날아드는 단검이 될 것이다. 어쩐지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보다도, 그것에 가려진 상처들과 아직 무마될 수 없는 갈등에 관해서 말하고 있는 것만 같다.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IM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