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영화

2022.01.28-2022.02.03

by 드플레

<무네카타 자매들(宗方姉妹)> (오즈 야스지로, 1950)


마리코는 대화를 나누다가 갑자기 타인의 사연을 각색하여 펼쳐놓는 일인극을 보여준다. 이 소박한 연극은 <무네카타 자매들>에서 나름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한다. 비단 그것에 할애되는 시간뿐 아니라, 이 연극 자체가 극의 전개를 뒷받침하는 요소가 된다는 점에서도 흥미롭다. 게다가 마리코는 항상 대화를 이어나갈 때, '나'라고 하지 않고 스스로를 제3자 취급하듯 '마리코'라고 굳이 지칭한다. 이상하다. 그녀의 인생에 '나 자신'이 존재하긴 하는 걸까? 이때 영화 속 마리코는 언니가 늘 희생하거나 남에게 휘둘리는 삶을 산다고 여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마리코 본인은 자신의 삶을 지탱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것 같다. 마리코의 연극은 그래서 대화 도중 자꾸만 소환될 수밖에 없는 게 아닐까. 마리코가 연극을 통해 전달하는 대사와 분위기들 속엔, 다양한 감정과 생각들이 섞여 있다. 이 가운데 차마 적나라하게 드러낼 수 없는 본심(같은 것)이 과연 마리코 본인의 내면을 진솔하게 대변한다고 할 수 있을까.


그랬던 마리코가 마침내 연극 속 캐릭터에서 벗어나 고백하는 장면에서, 상대방은 마리코에게 정신을 차리라는 식으로 말한다. 그건 너의 진심이 아니라고 말이다. 마리코는 자신이 연극 속에 본심을 은근슬쩍 숨겨 놓았다고 생각하지만, 어쩐지 남들에겐 진솔하게 인식되지 못한 것 같다. 그렇다면 내가 헐벗은 나의 내면을 잘 알고 있었다는 착각에 사로잡혀 있던 걸까. 어쩌면 마리코가 서구식 신식 문물을 수용하는 데 거부감이 없었다는 점으로부터 그녀의 공허한 심정과 가까워질 수 있을 것 같다. 마리코의 몸은 자국 전통 복장인 기모노 대신 블라우스와 스커트로 싸여 있기에, 그녀는 자신의 진취적이고 당돌하며 개방적인 모습이 온전히 내 것이라고 여기고 있지만, 과연 그것이 마리코의 진심과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유행과 변화를 소화해 내는 데 있어, 그것들이 내가 추구해 온 가치관과 얼마나 호응하는가는 또 다른 문제이기에, 마리코를 둘러싼 껍데기가 언니의 취향이나 가치관에 늘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무네카타 자매들> 속 자매 관계엔 분명히 '과거에서 이어지는 전통-계속해서 변화하는 유행'이라는 대립항이 깃들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쩐지 영화는 격동하는 시대 속에서 필연적으로 포착할 수 있는 이념·세대 간 대립과 갈등 자체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는 것 같다. 그래서 마음의 준비가 될 때까지 원하는 대로 하고 싶다는 세츠코와 그걸 보며 의아해하면서도 한편으론 이해할 수 있겠다는 마리코의 모습을 통해, 특정 이데올로기나 가치의 우열을 가늠하는 대신 저마다의 주체적인 삶을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고민해 볼 기회가 생긴다. 세츠코는 남편과 함께 했던 고생스러웠던 지난날을 후회하는 대신 현재 내가 느끼는 것들에 최대한 솔직해지기로 한다. 마리코는 모든 상황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흘러갈 수는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된다. 세상은 내 멋대로 희곡을 써서 연기로 풀어내는 연극처럼 작동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저 이 순간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것. 억지로 거스르거나 변화시키려고 하는 대신 담담하게 받아들여 인정하는 것만이, 어쩌면 그렇게나 바라왔던 '잘 사는 방법'에 가장 가까운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자매는 한결같이 그 자리를 지키는 자연 풍광을 지그시 바라보고 함께 산책하며 발걸음을 옮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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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분자(恐怖分子)> (에드워드 양, 1986)


모든 것이 불확실한 가운데, 우리는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이는 것들에 기대를 건다. 일종의 베팅. 여기서 중요한 것은 베팅의 성사 여부일까? 결과가 어떻든 사실 아무런 상관이 없을지도 모른다. 선택 혹은 믿음이 작동하는 순간부터, 이미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는 처절한 변명은 그래서 어떨 때는 역겨운 핑계가 아니라 타당한 자기변호가 될지도 모른다. 남자는 당면한 현실 과제를 해치우면서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러려고 했다. 그가 파국에 이르게 된 원인은 무엇인가. 자신의 삶을 망가뜨린 한 통의 장난 전화와 동료의 생계를 앗아가 버린 자신의 이간질 사이 그 어딘가에서 답을 찾아야 하는 걸까. 어쩌면 하늘이 내린 천벌인 걸까. 삶 속의 우연과 필연 사이에는 선택과 믿음으로 점철된 과정이 존재하며, 끝내 우리가 그나마 명쾌하게 알 수 있는 것은 과정이 아닌 결과뿐이다. 연속되는 흐름 가운데 그것의 단면들이나 인과 관계를 파악하는 작업은 인간의 손아귀에서 한참을 벗어나 있다. 그래서 인간은 이성을 잠시 내려놓은 채 상상에 푹 빠졌다가, 그 괴리를 끝내 견뎌낼 수 없어 상상을 자신의 현실로 대체하려는 충동에 사로잡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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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그리고 둘(Yi Yi)> (에드워드 양, 2000)


이상하다. 사람들은 멀찍이 떨어져 있는데, 목소리는 가까이에 있는 것처럼 선명하게 들린다. 인물과 같은 공간에 위치한 카메라는 그들을 결코 직시할 수 없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다. 우리는 어떤 이의 사연에 가까워질 수 있지만, 한편으론 그들을 멀리서 훔쳐보아야만 한다, 아니 훔쳐볼 수밖에 없는 것일지도. 한참을 멀리서만 바라보다가 문득, 이제는 누군가의 표정과 내면에 밀착할 수 있으리라 잠시나마 생각했지만, 결국 우리에게 허용된 것은 고개를 돌려 유리창이라는 필터에 걸러진 불완전한 타인과 만나는 일이다.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고, 그들의 삶과 마주하려면 어쩔 수 없이 불완전하고 흐릿한 감각에 의존해야 하는 걸까. 어쩌면 타인과의 거리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의 문제. <하나 그리고 둘>은 타인에 관한 감각(결국은 타인을 경유해 나로 돌아오는)을 절대 단일한 무언가로 단정 지을 수 없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환기하는 것 같다.


핸드폰을 손에 든 채로 핸드폰이 어디 갔는지 두리번거리는 멍청한 인간(나는 실제로 이런 적이 많다)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온 이유를 잊어버린 사람, 집에 무엇을 가지러 왔는지 까먹은 NJ, 오랜만에 옛 친구를 만난 이유를 까먹은 탄웨이칭(<해탄적일천>)처럼 불완전한 모습을 계속해서 노출하는 존재들이다. 따라서 <하나 그리고 둘>에서 우리가 주로 포착할 수 있는 건, 각각의 인물들에게 부여된 서사적인 전개 상의 유려한 리듬보다는 각자가 맞닥뜨릴 우연/운명에 관한 당혹스러움과 두려움이다. <하나 그리고 둘>은 각자의 삶을 대하는 방식을 내적인 형식으로 어떻게 풀어낼 것인지 많은 고민이 녹아 있는 영화처럼 보인다. 그러고 보면 어떤 영화엔 인간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고들 말한다. <하나 그리고 둘>도 어쩌면 그런 영화일지도 모르겠다. 나중에 이 영화를 다시 꺼내들 때마다 나는 이 영화를, 사람을, 삶을 어떻게 바라볼 수 있을까? 유리창에 흐릿하게 갇혀 버린 존재의 형상 자체를 보거나, 아니면 그 형상에 오버랩되는 바깥 풍경에 시선을 뺏기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유리창을 찍어낼 수밖에 없는 카메라 렌즈의 입장을 고려하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프레임에 들어올 수 없는 사람의 모습을 상상하거나. 선택은 오롯이 나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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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미네이터 2: 심판의 날(Terminator 2: Judgmant Day)> (제임스 카메론, 1991)


도대체 미래에선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길래 그들이 이토록 현시점의 사람들에게 매달려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감당할 수 없는 문제를 바로잡기 위한 선택지가 시간을 거스르는 방법이라는 사실 자체에서, 스카이넷이 됐든 인간 진영이 됐든 양 측 모두의 절박함이 묻어난다. 하지만 타깃될 운명에 놓인 인간이 그들의 절박함 따위를 알아줄 수는 없다. 지금 여기에도 절박하고 처절한 심정으로 생존에만 몰두하는 사람들이 있다. 결국 스카이넷의 방법이 먹히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가만 생각해보면 누가 더 절박하게 매달렸는가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혼돈의 불확실 속에서 어떻게든 믿을 구석을 찾아내는 것. 그걸 찾아내려는 마음을 의심하지 않고 긍정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코너 모자가 미래를 다시 쓸 수 있는 이유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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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IM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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