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영화

2022.02.04-2022.02.10

by 드플레

<캐롤(Carol)> (토드 헤인즈, 2015)


누군가에게 반하려는(혹은 반할 것 같은) 찰나엔, 상대를 마음에 안착시키기 위해 순식간에 몰입할 몇 가지 지표가 필요하다. 그 사람의 외형을 둘러싼 총체, 즉 코의 모양이나 눈썹이라든가 혹은 키와 비율이나 다리 모양, 눈빛과 외모나 말투나 분위기, 스칠 때 느껴지는 향수의 잔향, 맨살과 옷으로 둘러싸인 영역에 따라 미묘하게 달라지는 온기 같은 것들까지. 물론 <캐롤>에서 테레즈가 캐롤의 존재를 처음 인식하는 순간은 근거리가 아니라서, 사실 시각 정보로 모든 걸 판단해야 하는 상황이다. 손님들로 북적이는 백화점. 눈앞을 스치듯 수놓는 사람들의 실루엣 사이로 한 여자의 형상이 또렷하게 인식된다. 이때 테레즈가 캐롤에게 푹 빠지게 된 이유가 외형적인 면모와 맞닿아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긴 힘들 것 같다. 그러니까 캐롤이 고혹미를(섹슈얼한 측면까지 포함해) 십분 뿜어내는, 테레즈의 취향에 들어맞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영화는 테레즈의 눈에 담기는 캐롤의 모습을 통해 암시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냥 테레즈는 캐롤한테 첫눈에 반해버린 게 아닐까.


멀리서도 또렷하게 보이던 캐롤이 갑자기 테레즈의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카메라는 숏의 사이즈를 바꿔서 캐롤의 장갑을 클로즈업으로 잡는데, 이때 환기되는 촉각의 질감은 앞서 느꼈던 시각 정보의 측면과는 살짝 다른 층위의 감각을 환기하는 것 같다. 이제 두 사람은 물리적으로 가까워진 상태에서, 사진이나 장갑, 대화 속 정보를 매개로 서로의 감각을 은근슬쩍 늘어놓거나 교환하는데, 이때 테레즈가 캐롤을 몰래 응시하는 장면을 카메라는 놓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침대에 누워 불을 끄지 말라고 하는 테레즈의 모습이 이 순간과 겹쳐 보이기도 한다. 두 사람 사이를 둘러싸거나 혹은 가로지르는 공기의 흐름 같은 것 또한 앞선 상황과 미묘하게 달라진다는 점도 잘 느껴져서, <캐롤>이 정말 섬세하게 짜인 영화라는 인상을 받기도 했다.


회상하듯 펼쳐지는 초반부, 빗방울 묻은 차창을 매개로 테레즈의 시선에 담기던 밤거리의 연인이 캐롤의 형상으로 바뀌는 순간 같은 것들도 그렇다. 그러고 보면 <캐롤>은 두 사람 사이의 매개물 혹은 장애물을 활용하고 있다. 카메라가 어딘가를 응시하는 사람을 담아낼 때, 그 사람을 직시하는 경우가 그렇게 많지 않다. 카메라와 인물 사이엔 대개 투명한 장벽이 놓여 있다. 문에 난 작은 창이나 카페의 창가라든가 자동차의 창문 같은 것들. 그리고 여행지로 향하거나 숙소를 옮겨다니는 장면. 이때 카메라는 차량 내부에서 캐롤과 테레즈의 거리감을 의식한 채 그 관계에 스며든 것 마냥 클로즈업으로 바짝 잡고 놓아주질 않지만, 여행이 파투난 뒤 어긋나버린 마음을 미처 가다듬지 못하는 장면에선 차량 바깥으로 빠져나온다. 투명한 장벽을 뚫어낼 수 없다는 듯 회의감에 휩싸여 있다. 동료의 파티에 놀러 간 테레즈가 유리창에 덧댄 창살 사이에 외롭게 갇혀버렸다가, 마침내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캐롤을 오롯이 눈에 담을 수 있을 때가 되어서야, 두 사람의 이야기를 매듭지을 수 있는 걸지도 모른다. 계속해서 물리적/심리적 거리와 좌표 설정의 문제를 각 인물의 정서와 아주 섬세하게 결부시키려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캐롤>은 군중 속에서 발견한 낯선 이가 내게 다가오면서 시작했다가, 군중 속에서 발견한 나의 사랑에게 내가 다가가면서 서로의 시선을, 아니 마음을 확인하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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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펀치 드렁크 러브(Punch-Drunk Love)> (폴 토마스 앤더슨, 2002)


늘 거짓말로 상황을 모면하려 들고, 솔직한 심정을 감추기에 급급했던 남자는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상대를 만난다. <펀치 드렁크 러브>는 이리저리 살피거나 앞뒤 재지 않고 그저 과감하게 밀어붙인다. 영화는 귀를 자극하는 소음이나 각종 장치를 통해 인물을 관객과 가까워지게 하거나, 순식간에 인물과 관객의 거리를 멀리 떨어뜨려 놓기도 한다. 이건 남자의 내면이 치유되는 과정에 관한 이야기도 아니고, 황폐화된 내면에 못 이겨 종일 신음하는 찌질한 남자의 합리화 혹은 자기변호에 관한 것도 아니다. 그저 '펀치 드렁크'한 사랑에 눈을 뜬 남자를 따라가기로 결정한 영화일 뿐이다. 남녀가 왜 사랑에 빠졌는지 따져보는 일은 영화 너머의 문제처럼 느껴진다. 여기서 영화가 몰두하고 있는 것은 사랑에 빠지려는, 아니 사랑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는 사람이 어떻게 달라지고 있는지 살펴보는 일이다. 물론 그렇다고 관조하는 건 또 아니다. 적극 개입하는 순간도 있고, 그저 바라만 보는 순간도 있다. 영화는 통제할 수 없는 감정들이 형형색색으로 번져나가는 뒤틀린 인물들의 내면을 담는다. 어지럽고 답답해 보여도 결국은 살아갈 이유를 사랑에서 찾아보려고 하는 어떤 순수한 형태의 낭만. <펀치 드렁크 러브>는 이 낭만의 어떤 여러 가지 버전 가운데 하나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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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엔트 특급 살인(Murder on the Orient Express)> (케네스 브래너, 2017)


뛰어난 사립 탐정의 수사가 종결되는 순간에 이르면, 그 실타래가 애초에 풀릴 수 없다는 사실이 또렷해진다는 점으로부터 영화의 정서가 심화되고 태도가 정립될 수 있다. <오리엔트 특급 살인>은 쫄깃한 심리 드라마도 아니고, 기발한 장르 활극도 아니다. 영화가 다루는 사건엔 진상을 파헤치는 자가 자신의 신념을 지키는 것에 회의감이 들 정도의 딜레마가 짙게 녹아 있다. 과연 누구의 정의 구현을 옳다고 단정 지을 수 있을까. 포와로는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힌 사건의 이면을 들여다보는 데에 익숙해져 있다. 그런 포와로가 마침내 또 다른 '이면의 진실'을 마주한 뒤, 고뇌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는 이유는 제도화된 사회 규범과 이성적인 판단 과정 등으로는 커버할 수 없는 불가해한 영역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오리엔트 특급 살인>은 추리물의 외피를 두른 채, 장르 공식과 쾌감에 몰두하는 대신 인물 각자의 내면을 보듬어주기로 마음먹은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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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을린 사랑(Incendies)> (드니 빌뇌브, 2010)


(강력한) 스포일러 있습니다.





(인물이) 진실과 마주하는 일은 <그을린 사랑>에서 어쩌면 아무런 지위를 획득하지 못하는 게 아닐까. 아들과 동시에 아버지인 남자가 진실을 접한 뒤 보여주는 행동들은 어떻게 담겨 있는가. 그리고 쌍둥이 남매가 출생 비화를 알아차린 후 어떻게 상황을 감당하고 버텨내고 있는가. 이에 관해 영화가 충분히 시선을 보내고 있는 걸까. 그러니까 <그을린 사랑>은 사람이 품을 수 있는 정서의 최극단을 건드리는 영화지만, 어쩐지 이들의 리액션은 절제되어 있다는 점이 마음에 걸린다. 나왈 마르완의 모성은 어떠한 시련에도 굴하지 않고 끝내는 모든 걸 초월했다. 그녀가 죽은 뒤에도 그 본능에서 비롯된 사랑은 지금 이 자리에 현현한다는 게 분명하지만, 그렇다면 또 다른 문제가 남는다. 어머니가 침묵으로 묻어두어야만 했던 이 진실이 마침내 도달해야 할 대상에게 정확히 도달하는 순간 그리고 침묵이 깨지고 난 뒤의 잔해가 흩날리는 모습을 과연 <그을린 사랑>은 붙잡으려고 했을까.


강력한 모성애는 발산하고 계승되거나 보존된다고 해서 무언가 특별한 것으로 변모하지 않는다. 대상에게 가닿을 때에야 비로소 무언가 유의미한 요소로 작동한다. 그렇다면 이 영화에서 나왈의 사랑은 그저 하염없이 공회전만 하는 건 아닐까. 왜냐하면 진실을 마주한 이들을 영화가 오랜 시간 붙잡지 않고 금방 놔버리기 때문이다. 충분한 시간을 들여 잡아줘도 될 것 같은데, 그냥 보내버리는 이 영화의 구조가 어쩐지 모성에서 비롯된 액션-리액션을 충분히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비극에 놓인 한 여자의 리액션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모성을 통해 발현되는 수많은 어머니 혹은 여인으로서의 액션이 있고, 이를 수용하는 대상이 취해야 하는 리액션이 있을 터인데, 그것이 <그을린 사랑>에선 어쩐지 희미하게만 포착되는 것 같다.


바꿔 말하면, <그을린 사랑>이 나왈 마르완이 걸어온 참혹한 비극의 일대기를 조망할 때 적용했던 절제와 소거의 방식을 자식들의 여정에까지 적용시키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고 할 수도 있겠다. 시몽(사르완)의 말에 소스라치게 놀라는 잔느(자난)의 외마디 비명, 헤엄치면서 복잡한 심경을 억누르려는 쌍둥이의 몸부림, 적절한 암시로 작용하는 우회 발언 같은 것들은, 어쩌면 크고 작은 여백을 자연스럽게 만든 뒤 정서적 울림을 극대화하는 데에만 열중하려는 건 아닐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시공간을 뛰어넘어 오버랩되거나 붙게 되는 엄마와 자식들의 얼굴과 몸짓은, 순간의 매혹보다는 예정된 카타르시스를 향하고 있는 건 아니었나도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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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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