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2.11-2022.02.17
라푼젤의 배배꼬인 운명을 암시하는 'Tangled'와 엘사와 안나 자매의 얼어붙은 내면을 환기했던 'Frozen'처럼, 인물의 이름 대신 채택된 타이틀이 유효성을 입증할 때도 있다. 하지만 'Brave'라는 원제가 극 중 메리다의 사연과 호응한다는 인상을 받지 못했기 때문인지, 국내 번역 타이틀이 더 괜찮게 느껴지기도 한다. 내심 'tear(찢다, 찢어지다)'의 과거분사형인 'torn'이 타이틀이었다면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해 봤다. 어머니와 딸의 가치관 차이로 인해 벌어지는 갈등과 사건의 중첩으로 보아도 그렇고, 메리다네 부족과 타 부족들 사이의 텐션을 담아낸다는 점에서도 호응한다. 더군다나 활시위를 바짝 당기는 메리다의 드레스 재봉선이 투두둑 뜯겨나가는 장면이 메인 플롯과 어떤 관계에 놓여 있는지 따져보아도 적절한 것 같다. 그러니까 <메리다와 마법의 숲>은 분열(모녀관계든 부족 간 다툼이든 어느 차원에서든)을 봉합하려는 이야기로 보자면 무난하겠지만, 원제를 따라 인물들의 용기에 초점을 맞춘다면 다소 어그러진 기획처럼 느껴진다. 물론 결단과 선택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하지만 용기를 내려면 인물에게 있어 희생과 고뇌가 필연적으로 동반되는데, <메리다와 마법의 숲>엔 이러한 용기 발현의 선결 조건이 희미하게 맴돌고 있는 게 아니었나.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요소는 무엇인가. 사실 늘어놓으려면 얼마든지 다른 사례들을 통해 줄 세울 수 있겠으나, 어쩐지 <빅버그>에선 인간의 고유한 덕목 가운데 유머, 결함, 불안정성 같은 것들이 강조되는 것 같다. 좋게 보면 기괴하고 서늘하면서도 따스한 휴머니즘이 묻어나는 영화지만, 어쩐지 다루려는 소재(인간-비인간의 경계)에 비해 농도가 옅어 보인다는 점 때문에 좀 모호한 느낌도 든다. 다양한 색감이 넘실대는 조명이나 소품들 그리고 아날로그 감성이 반영된 기계 디자인이 사뭇 진지해질 법한 영화의 톤을 화사하게 만든다는 점도 극의 무게감을 덜어내는 것 같다. 그렇다면 <빅버그>에서 중요한 것은 기계가 인간으로 변모할 수 있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스러운 모먼트가 발휘할 때 (주체가 누구든지 간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지켜보는 작업일까.
<빅버그>는 종족 간의 간극을 줄여나가면서 그 경계를 넘나드는 존재들을 부각시켜서 문제의식을 끌고 오는 영화는 아니다. 이곳은 <공각기동대>의 쿠사나기 소령이나 <블레이드 러너 2049>의 K 같은 존재가 끼어들 세계관이 아니라는 말이다. 영화 속의 '모니크'나 '요닉스'의 언행에는 충분한 고뇌나 갈망이 느껴지지 않는다. 영화의 표면에는 인간-기계 사이의 갈등이 있지만, 따지고 보면 나사 빠진 존재들끼리 승자 없는 소모전을 하고 있는 게 아닐까. 어쩐지 <빅버그>에 남을 수 있는 것들은 우선 호불호가 갈릴 법한 블랙코미디 코드(극 중 우스꽝스러운 인간상이 몇몇 캐릭터를 통해 어떻게 재현되는가의 문제)들, 그다음으로는 얼렁뚱땅 귀결될 수밖에 없는 따스한(혹은 안일한) 휴머니즘 같다. 너도 나도 지나가는 행인도, 인간도 기계도 첨단 인공지능도 모두 결핍을 칭칭 두른 버그 같은 존재들이기에, 영화 속 소동은 필연적으로 일어나야만 하는 디스토피아 속 처절한 비극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삭막한 미래에도 최소한의 인간다움이 남아 있을 수 있다면, 그것이 과연 유지될 수 있겠느냐는 소박한 질문. 그걸 위해 인간은 자조 섞인 목소리로 여전히 멀지 않은 미래를 상상하는 게 아닐까.
너무나도 잔혹하다. 얼추 유사한 톤이 묻어나는 <하우스 오브 구찌>(2021)의 예정된 결말마저도 <카운슬러> 앞에선 아무런 힘을 발휘할 수 없다. <카운슬러>는 카운슬러(변호사)의 세계에 관한 이야기다. 도입부에 영화는 한 남자의 세계를 명시한다. 침대에서 육체를 맞대며 감정을 교환하고 대화를 나누는 연인의 모습을 담아낸다. 남자의 세상은 어쩌면 여자와 함께 뒤집어쓴 담요 속에 있고, 그에게 있어 사랑하는 여자는 자신이 지켜내고자 하는 세계의 일부처럼 보이기도 한다. <카운슬러>는 침대를 벗어난 남자의 세계에 균열을 내려고 한다. 이곳에 대안의 가능성이나 막연한 희망 같은 건 없다. 일단 세계의 표면에 금을 가게 만들었으면, 그것이 갈라져서 완전히 깨질 때까지 동요하지 않고 확인하겠다는 뚝심만이 떠돌고 있다. 물론 이것은 각본가의 특유의 문체나 스타일에 우선 빚을 지고 있겠으나, 영화의 화법 또한 이 냉혹한 정서를 뒷받침하는 듯 느껴진다.
<카운슬러>는 암시나 복선을 곳곳에 배치하지만, 그것들을 굳이 복잡하게 꼬아놓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 표출하려 든다. 인물들이 대화로 나눴던 각자의 철학과 생각들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예정된 비극을 가동하는 데 기여한다. 이들이 가소롭게 여긴(혹은 알면서도 애써 무시한) 불화의 씨앗은, 기필코 숨통을 끊는 직접 원인으로 작용한다. <카운슬러>에서 빈번하게 배치된 대화 신들은 극 내부의 인물과 관객을 인지적인 체험 면에서 동등한 층위로 인도하는 게 아닐까. 사업의 위험성을 강조하던 웨스트레이의 발언이 관객과 카운슬러 모두에게 투명하게 공개되는 것처럼 말이다. 이 대화 내용이 관객에게 차단되었다면, 다시 말해 두 사람만의 소우주에 갇혀 있었다면, 이 영화는 정보의 격차를 생성한 뒤 관객의 인지 체계를 쥐락펴락하는 데에 몰두했겠지만, 그러지 않았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 영화에서 인물의 발화는 종종 상황을 설명하거나 보조할 뿐 아니라, 상황을 진단하고 미래를 제시하는 예언처럼 기능하기도 한다.
후반부의 카운슬러와 동료가 전화하는 장면. 남자는 현학적으로 들릴 법한 일종의 연설을 장황하게 펼쳐놓는다. 이 남자는 두려움에 빠진 남자를 위로할 생각이 없으며, 계몽과 훈계를 오가는 발언을 서슴지 않고 있다. 세상을 염세적으로 인식하는 자들은 이러한 말 몇 마디를 근사하게 내뱉고 전화를 끊은 뒤 스크린을 홀연히 떠날 수 있지만, 욕망에 사로잡혀 이 세계를 비집고 침투한 외부인은 자신의 세계를 절대로 지켜낼 수 없다. 내 세계를 지키려면 남의 세계를 파괴해야 한다는 섬뜩한 교환의 논리. 합의나 협상은 존재할 수 없다. 남의 세계를 파괴하지 못했다면, 이제 할 수 있는 건 없다. 이곳에 도사린 위험 요소는 말 몇 마디로 예측이나 진단이 가능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한편으로는 이곳의 위험은 말 몇 마디만으로는 손쓸 수 없는 필연과 운명에 둘러싸여 있기도 하다. <카운슬러>의 장황한 대사들이 과연 쉽사리 감각할 수 없는 것들을 기어코 물리적으로 실감하게 만들 수 있는 걸까? 마침내 나의 세계가 산산조각 나는 모습을 확인하는 자가 움켜쥘 수 있는 건, 홀연히 사라진 경고 몇 마디의 흔적뿐이다. 소리 없는 절망이 스크린에 맺힌다.
전편에 이어 추리극의 외피를 두른 '드라마'를 더욱 강조하는 듯한 구성이 눈에 띈다. 왜냐면 <나일 강의 죽음>은 프롤로그부터 늙은 탐정 인생의 결정적인 분기점이라고 할 만한 에피소드를 관객에게 슬쩍 들춰내 보여주기 때문이다. 문제는 영화가 방황한다는 사실이다. 포와로로 시작해 포와로로 끝난다는 점에선 안정성을 확보한 것처럼 느껴지나, 실은 영화 내내 여러 인물들의 사연이 불균등하게 교차된다는 점이 내심 드라마의 깊이를 너무나 얄팍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 같다. 포와로 내면의 정서가 강조되는 오프닝-엔딩의 조합은 사랑 탓에 벌어진 치정극인 본편에 들러붙은 부록같이 느껴지기 때문에 그 감흥이 희석된다. 포와로의 사연을 함께 다룰 거였으면 그의 개인사를 극의 중심 서사와 어떻게 연동시킬지에 관해 조금 더 섬세하게 접근하는 편이 어땠을까. 그게 힘들다면 포와로의 내면을 들여다볼 기회를 사전에 차단하는 편이 좋지 않았을까. <오리엔트 특급 살인>은 빈약한 추리의 서스펜스를 납득할 만한 드라마로 덮어내는 데 어느 정도 성공했다. 그런데 전편의 기조를 작정하고 이어가려는, 아니 강화하려는 <나일 강의 죽음>에는 어쩐지 복합 사건의 연쇄에 따른 드라마 요소들이 어우러질 때의 시너지가 없다는 점이 아쉽다.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IM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