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2.25-2022.03.03
<시라노>는 사랑에 관한 실체와 관념, 그리고 감각의 문제를 여러 각도에서 매만지고 있다. <더 랍스터>의 실험장 속 사람들에게 있어 사랑은 선명하게 눈에 보일 때도 있지만 한낱 연기처럼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리는 허상이기도 했다. <시라노>의 사람들에게 사랑은 저마다의 세계를, 각자의 삶을 지탱하게 해주는 동력이면서 동시에 그들을 전진할 수 없게 만드는 늪, 어쩌면 질긴 올가미다.
시라노의 세계를 지탱해오던 것은 어쩌면 한 여인을 향한 사랑이 아닐지도 모른다. 이 세계에선 내 사랑이 온전하게 존립할 수 없겠다는 두려움. 이 두려움 속에서 시라노는 평생을 신음하면서 살았다. 시라노는 끝내 날것의 진실을 내면에서 입 밖으로 끄집어낼 수 없었다. 그의 사랑은 어둠 속에서만 성취될 수 있다. 그림자를 걷어내면 시라노의 세계엔 무엇이 남는가. 록산을 향한 그의 마음이 마구 요동칠 때가 있다. 그것들이 타인의 신체에 빚지기를 거부하거나, 편지 속 활자에서 벗어나려고 꿈틀대는 순간들이 있는데도, 시라노는 그 결정적인 시점에 이를 때마다 매번 거짓과 변명을 덧대면서 상처를 짓이기고 끊임없이 곪게 만든다. 편지지에 정성스럽게 눌러앉은 잉크 자국만으로는 온전한 감정의 교류가 일어날 수 없고, 크리스티앙을 대리 삼아 전달하는 내면은 진솔한 감정을 담보해 줄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록산 역시 자신의 사랑과 마주하는 일에 많이 서투른 사람이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끝내 갈라진다. 자신의 내면을 발화하는 방식에서 차이를 보였기 때문이다. 사랑을 감각한다는 것에 쌍방향의 의사 확인이 필요하다면, 진정한 사랑을 찾아 헤매던 록산은 끝내 사랑이 뭔지 모른 채 홀로 여생을 버텨내야만 한다. <시라노>는 굳이 에필로그를 덧붙이지 않고 매듭짓는다. 이곳에는 사랑 속의 환상과 환상 속의 사랑 가운데 자신에게 어떤 것이 필요한지를 가늠할 줄 몰랐던 사람이 있다. 그리고 사랑을 위해 살았던 게 아니라 알고 보니 사랑에 신음하는 자신을 향한 연민에 심취해 있던 사람이 있다. 그리고 거짓으로 쟁취한 사랑을 용납할 수 없어 혼란스러워하던 자가 있다. 누구도 구원받지 못했다.
혼란의 시대. 전쟁의 여파가 사라지지 않은 자리에 무엇이 들어차든 그 자체로 사람들을 쥐고 흔들 수 있었던 시대. <마스터>는 시공간을 둘러싼 요소를 비교적 명확하게 드러내는 편이기에, 영화 자체가 핍진성을 어느 정도 확보한 무대에서 운을 떼기 시작한다. <마스터>를 이끄는 인물은 프레디와 랭카스터다. 사실 여기서 굳이 프레디를 전후 외상장애를 앓고 있는 사회 부적응자라든가 대책 없는 알코올 중독자라는 손쉬운 도식에 가두고 싶지는 않다. 그리고 랭카스터가 사이비 교주 행세에 심취한 채로 프레디를 대한다는 식으로 단정 짓고 싶지도 않다. 차라리 이렇게 말하고 싶다. <마스터>는 두 영역이 충돌하거나 조우할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살펴보려고 한다. 하나는 피닉스와 호프만에 의해 각기 다른 방법론으로 캐릭터라이징된 프레디와 랭카스터. 즉, 시대 속의 사람들. 다른 하나는 PTA(그에게 영감을 주었던 선배 작가, 연출가들 및 영화사의 중요한 몇몇 순간들까지)를 거쳐서 재구성/재조립된 2차 대전 이후 1950's 미국의 시대상이다. 당대에 사람들을 휘감았던 고유한 정서나 감각에 관한 것들 말이다.
그러고 보면, 시대에 대한 감각 혹은 인물과 세계 사이에서 피어나는 어떤 관계망 같은 것들이 영화에서 다뤄지려고 하거나 환기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 의미에서 주연을 맡은 피닉스의 지분은 엄청나다. <마스터> 속 와킨 피닉스의 연기는 '불완전함을 완벽하게 구현'하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는 걸까. 프레임을 가득 채우는 피닉스의 얼굴과 관객이 지속해서 만남을 갖게 된다면,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프레디의 행동, 아니 정확히는 피닉스의 행동은 전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심지어 사운드마저도 내내 인물과 영화와 관객 사이 그 어딘가의 경유지를 맴돌기 때문에, 관객은 인물의 내면에 접속하거나 몰입하는 작업을 쉽게 수행할 수 없다. 이처럼 기이한 에너지가 꿈틀대는 <마스터>는 사실 사람을 참 난감하게 만드는 영화 같다. 영화를 통해 받은 인상을 쉽사리 정리할 수 없는 이유가 과연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역시 다회차 감상이 필요한 영화일까?
이때 머릿속을 스치는 이미지가 있다. 바다를 가르는 선박이 자아내는 물결을 떠올리기로 한다. 프레디의 기억인지, 환상인지, 당도할 미래인지도 모를 불분명한 시점에다가 누구의 시선으로 담아내는 물결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선박의 궤적을 따라 스멀스멀 번져나가는 물거품이 누군가에 의해 계속해서 포착된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지나온 길을 따라 물결이 일고 있지만, 배는 계속해서 움직이고, 하얀 거품과 함께 피어오른 잔물결은 순간마다 존재감을 드러내면서도 순식간에 바다의 표면 어딘가로 귀속된다. 어딘가로 귀결되거나 정박될 수 없는 물결의 상태는 어쩌면 프레디의 내면과 공명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이렇게 단정 짓기도 어렵다. 영화에선 자연과 사람이 맞닿았던 몇몇 지점들이 있었다. 이를테면 독살의 주범으로 몰려 도망치는 프레디를 따라가는 숏에서의 황량한 땅의 이미지, 바이크를 빠르게 모는 장면에서의 쩍쩍 갈라진 황야의 질감 같은 것들 말이다. 분명한 것은, 프레디는 정착할 수 없는 존재라는 점이고 그를 따라 영화와 시대와 사람들은 모두 부유한다. 살아남기 위해 부유하는 것인지 부유하기 때문에 살아가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헬보이>를 보면서 신기했던 점이 있다. 헬보이의 얼굴이 클로즈업될 때를 떠올려 본다. 그의 얼굴에서 론 펄먼의 생김새가 얼마나 느껴지는지 혹은 저렇게 빡센 분장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해냈으며, 어디까지 CG고 CG가 아닌가의 문제들이 자연스럽게 개입될 수 있겠으나, 영화를 보는 내내 그런 외적인 논의가 개입될 틈이 없다고 느꼈다. 바꿔 말하면, 그런 의구심이나 부차적인 의문들을 상쇄할 만큼 영화에 빠져드는 시간을 만끽했다고 보아도 좋을 것 같다. 그만큼 기예르모 델 토로는 관객이 자신의 세계로 진입하려는 순간부터, 몰입하고 음미하는 모든 과정들을 섬세하게 관리하고 있는 게 아닐까. 적어도 감독의 기획에 따라 캐릭터와 세계관이 매력적으로 구축되어 있다는 사실만큼은 부정할 수 없는 것 같다.
그렇지만 매력 가득한 세계를 선사하는 <헬보이>는 사실 특별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는 않다. 비인간 존재가 인간 사회에 녹아들 때 발생하는 균열과 마찰 같은 것들을 작가 고유의 문제의식으로 서술한 느낌도 딱히 들지 않았다. 그렇지만 흥미로운 지점은 분명 있었다. 후반부 마이어스의 내레이션(누구의 목소리인지 정확하지는 않다)을 떠올린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이 선택하는 행위에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는 헬보이를 왜 인간으로 전제하고 있는 것인가. 그러고 보면 헬보이는 자신의 출신 배경 같은 건 무시하고, 자신을 거둬준 브룸 박사를 아버지로, 스스로를 그의 아들이라고 믿는다. 아니 믿는다기보단 그렇다는 사실이 몸에 체득되어 있다. 헬보이는 자신이 인식하는 정체성-인간 사회의 통념과는 맞지 않는 외형으로 인한 괴리에서 발생하는 문제나 감정들에 관해 고민을 거듭하고 있는데, 다른 세계로 진입하고 적응하려는 이방인인 그는 과연 어떠한 성장통을 겪고 있는 걸까. <헬보이>는 그에 대한 답변이나 부수적인 논의들을 슬쩍 희석해버린 채, 인간과 가까워질 수 없는 두 존재가 끝내 밀착해서 불타올라야만 하는 순간의 정념을 강조하는 길을 택한다. 아, 어쩌면 그 기이한 불길을 응시하는 보통의 인간이 프레임 내부에 있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한 것이었을까?
음울하게 스며드는 커트 코베인의 목소리와 여리지만 날이 서 있는 로버트 패틴슨의 독백이 오버랩되는 순간까지만 해도, 스크린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했다. 작정하고 힘을 주는 숏들의 연쇄는 눈과 머리에 적당한 강도의 여운을 선사했고, 정밀하게 톤을 조정한 고담 시의 색채 그리고 아직은 방황하는 자경단 박쥐의 침착하지만, 한편으로는 불안한 실루엣은 그 자체로 내 마음을 빼앗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더 배트맨>은 배경에 깔리는 스코어와 음향 효과들을 영민하게 조절한 영화는 아니었기에, 나는 갈수록 음악/음향의 과잉을 몸소 실감했다. 이를테면 PTA의 영화나 사프디 형제의 영화들에서는, 불편한 정서를 유발하는 사운드일지라도 그것들이 단순히 귀를 맴돌기만 할 뿐 아니라 눈에 보인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강력한 미장센이 되는데 반해, <더 배트맨>에선 그런 느낌을 받지 못했다. 그래서일까. 온전한 세계관을 조각해 내어 야심찬 영화가 되려는 <더 배트맨>의 화술을 한 발 떨어져 응시할 수밖에 없었다. <더 배트맨>이 관객을 매료시킬 수 있는 영화라면, 후반부에 다시 흘러나오는 커트 코베인의 목소리에서 우리들은 혼돈 속에서 피어나는 작은 희망을 매우 자연스럽게 느꼈어야만 했다. 하지만 나는 그 혼합된 정서들이 부유하는 바다에서 미묘하게 갈라지는 결의 차이를 읽어내지 못했다. 내게는 후반부 'Something in the way' 시퀀스가 메시지를 전달하는 조잡한 수단에 불과했고, <더 배트맨>을 마무리하는 패틴슨/웨인/배트맨의 얼굴에선 그 어떤 존재의 내면도 읽어낼 수 없었다.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