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영화

2022.03.04-2022.03.10

by 드플레

<헬보이 2: 골든 아미(Hellboy II: The Golden Army)> (기예르모 델 토로, 2008)


<헬보이 2: 골든 아미>에는 거대한 체제 혹은 세상의 존속 여부와 맞닿은 갈등이 있는데, 그것에 연루된 존재들이 하나같이 이기적인 선택을 내린다는 점에 주목하자. 각자가 살아가는 데 있어 중요한 것은 어쩌면 내가 발 딛고 선 이 세상의 존립보다도 지금 여기 나와 함께 하는 너가 아니었던가. 네가 없다면 과연 내가 험난한 세상을 헤쳐나갈 수 있는 걸까. 악마로 태어난 헬보이는 혈혈단신으로 인간 세상에 당도한 뒤 의탁할 대상을 찾아 헤맨다. 양아버지도 연인도 동료들도 각자의 고충을 안고 살아가는데, 그들이 나의 내면을 꿰고 있을 수는 없다. 그렇기에 헬보이는 영웅이 되어 인간들 틈에 녹아들기로 결심한다. 그 방법이 자신을 위한 길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 방법이 유효하지 않다는 걸 깨달은 자는 고개를 돌려 나의 세상을 재구축한다. 그렇다면 두 가지 선택지 가운데 결단을 내린 리즈도 세상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내 세상을 재구축한 셈이다. 다른 이들의 선택 또한 각자의 소우주를 겨냥한 행위가 된다.


그런데 <골든 아미>에서 소멸하는 자는 누구였는가. 그에게 결여된 것은 무엇이었나. 대안을 탐색하거나 최선의 선택지를 가늠하기 위해 충분히 고뇌하지 않았던 자가 누구였나. 종족의 보전을 위한 선택이라는 사실이 더 나은 길을 적극적으로 탐색하지 않은 것에 대한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선택의 순간이 닥쳐올 때, 스스로가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는 없을지라도 잠시 멈춰 고민할 필요는 있지 않았나. 이때 생각나는 한 사람이 있다. 바로 리즈다. 카메라에 잡혔던 리즈의 결의 어린 표정을 떠올려 본다. 물론 리즈의 언행이 망설임 없던 것처럼 느껴지겠지만, 그 역시 지금껏 번뇌에 휩싸인 채 고통받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왜 고민이 필요한가? 아니 어떤 것이 최선인지 멈춰서 생각에 빠져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골든 아미>가 주장하는 선택의 여정은 성숙해지기 위한 계단이 아니다. 그저 모든 선택은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깨우치는 과정의 일부인 셈이다. 어떤 것이 나에게 가장 충실할 수 있는지 가늠한 끝에 나온 선택이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골든 아미>는 열린 마음으로 관객에게 묻는다기보단, 스스로가 염두에 둔 가치를 믿고 싶어 하는 영화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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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페이 스토리(靑梅竹馬)> (에드워드 양, 1985)


자꾸만 일이 꼬여가고, 일진이 개판이라 짜증나 죽겠는데 바로 뒤 택시의 끊이질 않는 경적 소리는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 경적으로는 모자랐는지 차를 들이받기까지 한다. 마침 빨간불이 됐으니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문을 박차고 택시 운전자를 향해 달려들려는 찰나, 그 사람도 차에서 내린다. 그런데 이게 누군가. 어릴 적 친구가 아니던가. 반가워서 경적을 신나게 울려댔다는 친구의 말에 어안이 벙벙해진다. 이 순간의 멋쩍고 황당하면서도 놀랍고 부끄러운 기분. <타이페이 스토리>가 장면을 잇는 방식을 자세히 살피면, 이런 복잡 미묘한 감정들이 서로 마주하다가도 슬며시 교차하고 어떨 때는 의도했다는 듯이 미끄러지고 있다는 점이 포착된다. 어쩌면 도시는 그런 곳이다. 지금 여기 내가 도시에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사실은 어쩌면 딱히 중요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 정해진 시간과 공간의 셈법과 논리로 마구 색칠된 곳에서 우리는 역시나 삶을 잘 헤쳐 나가는 법을 매 순간 가늠해야 한다. 운명이라 믿었던 것은 어쩌면 얄팍한 믿음이 만들어낸 허상에 불과하고,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미래가 오히려 떨쳐낼 수 없는 과거의 잔상보다 선명해질 때가 왕왕 있는 법이다. 도시는 그런 곳이다. 나의 감각을 온전히 신뢰할 수 없는 곳. 나의 감각이 생각보다는 정확하다는 사실을 문득 체감할 수 있는 곳. 도대체 이곳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잘 살아가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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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복> (이용주, 2021)


죽음을 앞둔 기헌은 죽지 않는 서복과 만난다. 뜻하지 않게 성사된 동행길에 누구의 사연이 누구에게 어떤 형태로 다가갈 수 있는가. 인물들의 명분과 동기는 언제나 그렇듯(로드무비, 첩보물, SF 요소가 뒤섞인 장르 특성상) 손에 잡히지 않을 만큼 적당히 흐릿하고, 기헌과 서복은 내내 충돌하다가도 문득 마음의 문을 열고 서로를 보듬어 줄 수 있게 된다. 갈 곳을 찾아 헤매는 자들이 결국 막다른 곳에 다다랐을 때, 어떤 선택을 내릴 수 있는가. 그런 점에서 기헌과 서복이 같은 시공간을 잠시나마 공유했다는 사실은 결코 헛되지 않지만, 문제는 영화의 욕심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서복>은 내내 관객에게 직설 화법으로 질문을 던진 뒤, 그에 관한 답변을 성급하면서도 엉성하게 덧붙이고 있다. 그러지 않는 구간이 거의 없을 정도로, 이 영화는 질문-답변 도식에 강박적으로 얽매여 있다. 그리고 반복되는 자문자답 속에서 <서복>은 스스로가 가능성과 탐색지를 일축하고 축소하는 악수를 두어 버린다. 그래서 기헌과 서복 각자의 플래시백을 중첩하는 것과 같은 서사적인 전략들이 모두 큰 감흥이 없이 그저 극 전개를 위해서만 앙상하게 소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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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팬서(Black Panther)> (라이언 쿠글러, 2018)


오프닝에서 영화는 갈등 양상을 온전하게 드러내지 않는다. 관객에게도, 트찰라에게도 이때의 진실이 공개되지 않은 채 유보된 셈이다. 극의 어느 지점에 다다르면, 트찰라와 관객은 모두 사건의 진상을 알게 된다. 그렇게 <블랙 팬서>는 결국 과오를 대하는 방식에 관한 영화가 된다. 비단 트찰라가 극복해야 할 차원을 넘어서서 현실과 결부된 정치적인 쟁점까지도 건드리고 있는 영화이기도 하다. 오프닝과 엔딩 그리고 극의 중요한 분기점은 모두 '그날의 진실'을 중심축으로 하여 연결되어 있는데, 이러한 구조를 살펴보는 데 있어 문제가 있다면 역시나 <이터널스>가 그랬던 것처럼, MCU 세계관에 얽매인 영화라는 태생적인 이유로 불필요한 요소들이 서사의 줄기를 어지럽히고 있다는 점이다. 비브라늄을 둘러싼 클로와의 크고 작은 갈등, 역시 비브라늄을 원료로 하는 과학 기술로 난제가 말끔히 해결되는 양상을 보고 있으면, 영화가 품은 야심을 가늠해보고자 극에 몰입하려다가도 쿠키 영상에 누가 나올까 고민되기 시작하면서 맥이 탁 풀려 버리는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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