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3.11-2022.03.17
삶과 연극 그리고 영화를 교차하고 뒤섞거나 중첩하는 방식은 언제나 흥미로운 쟁점을 만들어낸다. 요 근래에 봤던 영화로는 <드라이브 마이 카>가 떠오른다. <드라이브 마이 카>가 연극을 가후쿠의 삶과 맞닿은 듯 은유적인 뉘앙스로 활용했다면, <세일즈맨>은 인물들의 흐르는 삶을 응시하다가 몇몇 굴곡에 이를 때, 연극 '세일즈맨의 죽음'의 특정 구간들을 끼워 넣으려고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사회상을 잡아낸 뒤 그 속에서 진동하는 인간상을 정밀히 해부하는 <세일즈맨>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결정적인 순간에 이르면 영화가 관객에게 주도권을 넘겨준다는 점이다. 특히나 후반부 두 가족이 대면하는 순간이 그렇다. 파르하디 감독의 영화를 한 편(<씨민과 나데르의 별거>)밖에 안 보긴 했지만, 익히 알려졌듯 감독이 윤리적인 딜레마에 매달리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할 텐데, <세일즈맨>은 어쩐지 딜레마 속 개인의 선택이나 심리적 갈등에 방점을 찍기보다는 시대가, 상황이,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딜레마 자체를 물고 늘어지는 것 같았다.
제니퍼 로렌스가 나온다길래 아무 생각 없이 OTT 화면의 재생 버튼을 눌렀다. 그런데 로렌스가 러시아인으로 나오는 영화였다는 사실이 나를 얼마간 당황시켰다. 요즘 신문을 펼치면 전쟁 이야기가 가득하기 때문이다. 스패로(특수 첩보원) 양성 학교의 사감은 냉전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며 서구는 소셜 미디어와 쇼핑에 빠져 있어서 나약해졌다고 말한다. 오직 러시아만이 승리를 위해 희생을 마다하지 않는다고 말이다. 이어서 평화를 위해선 우리가 다시 국제사회의 리더가 되어야 한다고 덧붙인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전쟁이 발발한지 2주가 훌쩍 지났다. 강대국들의 패권 다툼으로 얼룩진 신냉전 도식에 크고 작은 전환점과 균열점이 생겨난 지금, 사감의 대사는 의미심장하게 들린다. 21세기 미-러 관계 속 스파이 세계를 다룬 원작 소설이 2013년에 출간되었고, 영화는 2018년에 개봉했다. 여기서는 비록 미국-러시아 간의 냉전 도식을 적절히 동시대 배경에 맞게 어레인지해서 녹여내고 있지만, 언제나 그렇듯 문화 콘텐츠를 통해 구체화된 사람들의 불안감은 일종의 예언적 기능을 띠기도 하기에, 러-우크라 전쟁의 참상을 접한(여러 매체나 SNS를 통해) 내가 <레드 스패로>를 보면서 느꼈던 복잡한 감정들은 예술과 현실을 분리해서 바라볼 수 없다는 관점에 대한 어떤 방증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레드 스패로>에는 모든 속박을 벗어던지고 자유로워지고 싶은 자의 고군분투가 담겨 있다. 도미니카의 선택은 그런 맥락에서 볼 때, 비난받아야 할 이유가 없다. 그렇지만 선택의 여파를 감당해야 하는 건 다른 문제이기에,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그 음악 소리를 도미니카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해야 한다. 그렇다면 네이트와 도미니카의 관계가 어떠했는가. 철저하게 도미니카가 네이트를 이용했다는 쪽에 동의하고 싶지만, 둘이 가까워지는 몇몇 순간에 진심이 오고 갔으며, 서로 적나라하게 감정을 교환했다는 것 자체는 아마 거짓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 순간을 둘러싼 모든 걸(감정이든 무드든) 그때에 머무르도록 내버려 두어야 한다. 그래야만 살아남는 게 아닐까. 끝내 자신의 세계를 보존하는 이들은 누구인가. 국가에 헌신하는 애국자? 대의나 희생보다 도덕과 윤리를 우선하는 사람? 타고난 육감으로 판세를 읽어낼 줄 아는 사람? 그 누구도 아니다. 나의 행복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아는 이들, 내가 잘 살기 위해 필요한 것이 어떤 것인지 식별할 줄 아는 이들만이 자신의 소중한 세계를 지켜낼 수 있다.
P.S. 제니퍼 로렌스만큼이나 첩보원 역에 잘 어울리는 배우도 없지 않을까 싶다. 로렌스 특유의 무표정 포커 페이스는 매 순간 속여야 하는 스파이 세계에 탁월하게 녹아들 수 있기 때문이다.
여럿이 둘러앉아 먹고 마시는 식사 자리는 단란한 가족을 상징한다. 부엌은 부모 자식 간의 추억을 소환하는 공간이다. 집은 가족의 탄생과 죽음이 동시에 서려 있는 특별한 곳이다. <음식남녀>는 인물과 공간의 관계를 동력원 삼아 극을 이끌어 가고 있다. 이때 <음식남녀>는 동일한 공간이 서로 다른 인물에게 다른 의미로 스며들기도 하며, 동일한 사람이 각기 다른 공간에서 존재감을 다양하게 발산하는 양상을 놓치지 않고 짚어내고 있다. 특히나 둘째 딸과 아버지의 관계가 시공간 변화에 따라 어떻게 달라졌다가 또 어떻게 틀어지기도 하는지를 살펴보는 일은 이 영화의 애틋한 감성을 극대화하는 것 같다. <음식남녀>의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참 여러 갈래 생각이 피어난다. 제멋대로 삶을 개척해나가는 딸들이나 당돌하게 고백하는 아버지를 보고 있자니 황당하기도 하면서 납득이 가기도 하는 묘한 양가 감정이 든다. <음식남녀>는 그냥 그런 영화다. 현실에 존재할 수 없는 가족 판타지이기도 하지만, 급변하는 시대상 속에서 이념과 세대와 취향과 가치관이 교차하고 충돌하는 모습을 잡아낸 현실의 반영물이기도 하다.
수용자의 감각을 몽롱하게 매만지는 전자음은 인물들의 상태를 은근슬쩍 대변하는 듯 스크린을 수놓고 있다. 어쩐지 음악이 들린다기보다는 보인다고 말하는 편이 적절한 것 같은데, <걸후드>의 음악은 <쁘띠 마망>의 후반부 고무 보트 시퀀스에서 선보였던 연출과는 사뭇 다른 목적으로 배치되어 있다고 느낀다. 종종 음악이 눈에 보이는 것 같은 착각이 드는 영화가 있다. 마치 사프디 형제의 영화처럼, <걸후드>의 사운드는 관객의 지각 체계를 뒤흔들면서 인물에게 종속되기도 하다가 순식간에 인물과 장면을 집어삼키기도 한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리아나의 'Diamonds'가 흘러나오는 신을 떠올려 본다. 인물들이 직접 음악을 튼 채 놀고 있는 걸까? 그렇다면 이때의 음악은 디제시스에서 확장되는 것인데, 그렇지 않다면 역으로 비디제시스에서 시작해서 인물들에게 스며드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그걸 구분하는 일이 무용하며, 관객과 인물이 함께 리아나의 곡을 매개로 시공간의 격차를 뛰어넘어 그 순간의 그 감성과 그 무드를 공유한다는 사실만이 중요한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