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영화
2022.03.18-2022.03.24
<동사서독 리덕스(東邪西毒 Redux)> (왕가위, 2008)
<동사서독 리덕스>는 흐릿하다가도 순간적으로 선명해지고, 다시 서서히 뿌옇게 변해가다가 문득 또렷해지는 묘한 감각을 스크린에 새겨놓는 영화다. 영화 자체가 해석의 여지를 활짝 열어 뒀다가도 직관이 개입될 수 있게 배려를 하기도 한다. 시공간과 기억의 상관관계가 직접적인 대사로 제시되기도 하고, 메타포로 구현되기도 한다.
이 영화를 통해 인물과 관객은 일종의 협업을 수행한다. 영화가 대상을 인지하고 감각하는 일에 관해 고민거리를 안겨주고 있기 때문이다. 사막에서 시간이 흘러갔음을 인지하는 방법에 무엇이 있는가. 모래바람이 물결치듯 수놓는 사막의 풍광을 떠올린다. 우리는 매 시시각각 달라지는 풍광을 눈으로 보고, 몸으로 느끼며 비교적 손쉽게 감각할 수는 있겠지만, 관념의 영역으로 간다면 조금 이야기가 달라진다. 사막 한가운데에서 며칠 혹은 몇 달이 흘러갔는지에 관해서 정확히 파악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확신할 수 없으니 판단의 지표로 삼을 만한 무언가를 찾아낸 뒤 그것에 감각을 의탁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특정 시기마다 찾아오는 사람들은 일종의 시곗바늘이 된다. 매년 경칩 때마다 황약사가 구양봉을 찾아오는 루틴이 확립된 것처럼 말이다. 찾아오던 사람이 오지 않고, 패턴화된 일상에 균열이 생길 때, 시공간에 관한 감각을 은근슬쩍 차단하는 사막이라는 곳은 과연 우리에게 어떤 장소가 될 수 있는가.
구양봉의 입을 통해 관객들이 얻는 정보는 어떠한가? 때론 무심하게 때론 담담하게 흩날리는 그의 말은 파편화된 서사를 겨우 연결하는 듯 장면들을 보조하긴 하지만, 어쩐지 그 정도 역할에 그칠 뿐이다. 보이스오버를 통해 관객에게 전달되는 것들은 구양봉이 느꼈던 매우 주관적인 감정과 생각이지 팩트가 아니다. 더군다나 신빙성도 떨어지고, 발화 시점도 불분명한 이야기들이 섞여 있다. 그런 말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뱉어내는 구양봉으로 하여금 영화의 시작과 끝을 담당하게 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수미상관처럼 구성된 본편의 화법은 결국 시공간을 특정한 뒤 인물의 서사를 따라가는 일이 무용하다는 것을 일러주는 건 아닌가. 그러니까 <동사서독 리덕스>는 정말 묘하다. 인물을 따라가려고 마음먹으면 어느새 길을 잃어버리고, 제자리에 머물러 귀 기울이려고 해도 스크린에 눌어붙은 활자들이 이따금 감각을 교란하기도 하며, 공간에 정박하고자 하면 시간을 흘려보내야 하고, 시간이 제법 선명해질 때면 공간이 자연스레 희미해진다.
<패왕별희(覇王別姬)> (천카이거, 1993)
그에게 살아간다는 건 무슨 의미인가. 그는 무대와 현실의 경계를 일부러 짓이기는 것인가? 그게 아니라면 경계를 그을 줄 모르는 것일까? 아니면 간절함과 절박함 때문에 무언가를 애써 부정하고 회피하는 삶에 익숙해진 걸까? 그렇다면 그는 누구를 연기해야만 이 기구한 삶을 버텨낼 수 있는 것인가. 연기라는 행위는 자기 안위와 맞닿아 있다. 방어 혹은 생존의 문제와 직결되는 것인데, 그렇다면 그가 연기하지 않을 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떠올려 보고 싶다. 그런데 그가 연기하지 않은 순간은 단 한순간도 없는 것 같다. 실제와 가상의 경계는 이미 무너졌고, 그에게 주어진 건 오로지 살아내야만 하는 삶이지 여유를 가진 채 선택할 수 있는 삶이 아니다. 선택하는 것처럼 보였던 순간이 있다. 샬루를 구하기 위해 청데이가 했던 짓을 떠올린다. 그런데 엄밀하게는 선택이 아니다. 강요된 선택지는 그의 삶이 매 순간 폭력에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을 드러낼 뿐이다. 다시 선택했던 것처럼 보였던 순간을 떠올린다. 아, 경극 속 우희가 예정된 결말에 직면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청데이는 어쩌면 다 알고 있던 게 아닌가. 그렇게 자신의 결말을 유예해왔다가, 마침내 그 결말이 실행되도록 마음먹은 것뿐이다. 장국영-두지-청데이-우희를 오가는 어떤 가련한 존재의 삶. 청데이는, 아니 <패왕별희>는 그가 만나게 될 결말을 알고 있다.
<벨파스트(Belfast)> (케네스 브래너, 2021)
<벨파스트>는 현재(혹은 동시대처럼 보이는) 벨파스트의 도시 곳곳의 이미지를 나열하며 시동을 건다. 그러니까 <벨파스트>는 시작부터 자신이 도시가 간직한 사연에 관한 이야기임을 명시하는 셈이다. 이때 영화가 공간 자체에 매달릴지 공간에 스며든 사람들에게 매달릴지는 확신할 수 없다. 어쩌면 공간에 녹아들 수 없는 사람들의 사연이 중요하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사람 이름 대신 도시 이름이 타이틀로 선정되어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그 자리에 버티고 있던 골목의 어떤 담벼락을 넘어가면, 그 시절 그 장소로 전환되었다는 사실을 알리면서 <벨파스트>는 거리 곳곳을 누비기 시작한다. 그리고 사람들이 쥐도새도 모르게 사라지거나, 뿔뿔이 흩어지거나, 버티다 못해 소멸하거나, 차마 갈 곳이 없어 남아야 한다는 사실이 명확해지고 나서야, 영화는 다시 현시점(으로 추정되는) 벨파스트로 돌아와 사람들을 위로한다.
이 과정에 몰입하다 보니 문득 든 생각이 있다. 주로 쓰이는 구도나 앵글이 딱히 느껴지지 않고 여러 방향과 각도에서 인물들의 모습을 파편적으로 담아내고 조합하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시공간의 변화에 따라 흑백으로 전환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지 모른다. 과거 혹은 기억이라는 건 추억하고자 애쓸 수는 있지만 정확히 재현할 수는 없으니, 그렇다면 감독의 자전적 경험에서 출발하는 <벨파스트>는 그때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어떻게 잘 추억하고, 보듬고, 재구성하고 싶은지에 관한 어떤 욕망 내지는 바람 같은 것이 반영된 영화로 볼 수 있기도 하다. 그렇게 된다면, 채도 빠진 영역이 대부분을 지탱하는 이 영화에서 드문드문 컬러를 삽입하는 시도 역시 생명력을 얻을 수 있다. 분명 공통분모가 있었다. 예술이 개입될 때, 채도가 복원된다.
<스펜서(Spencer)> (파블로 라라인, 2021)
다이애나의 불안정한 심리는 관객에게 효과적으로 전이되는 걸까? 적어도 영화는 그렇게 관객을 설득하고 있다. 지금 여기 다이애나는 위태롭게 삶을 버텨내고 있다고 말이다. 연주자들에 의해 울려 퍼지는 클래식 선율은 어느 순간 소음 내지는 잡음으로 탈바꿈한 뒤 관객을 자극하려고 든다. 어쩌면 다이애나의 귀에도 주변의 모든 소리가 이런 식으로 아주 미묘하게 신경을 건드리듯 들리진 않았을까. 그렇다면 계속해서 상황과 사람과 환경에 잠식당하던 자가 스스로의 선택을 작정하고 밀고 나갈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다른 음식을 택했다는 것만으로, 달리는 차에서 자유를 만끽하는 것만으로 그저 괜찮다고 털어낼 수 있는 걸까? 다이애나는 무엇에서 해방되고 싶었던 걸까?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드라이브스루 메뉴를 주문하면서 이름을 '스펜서'라고 말해도 주변인들의 이목이 집중되지 않는 현상이 그 자체로 자연스러운, 그런 평범한 라이프를 원했던 건 아닐까. 그리고 자식들과 스스럼없이 속내를 공유하는 일상도 다이애나의 삶에 슬쩍 덧붙일 수 있다면 더욱 좋겠다.
인물에게 지독하게 매달려 온 <스펜서>가 끝난 뒤, 영화가 인물에게 충실했는지를 되짚어 보고 싶었다. 사실 <스펜서>는 (특정 시기의) 다이애나를 따라가려는 영화일 뿐, 다이애나를 파헤치는 영화는 아니다. 인물에게 깊게 접속할 수 없다는 건 어쩌면 실화 기반 창작물의 한계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타인의 삶을 직시하거나 명확하게 꿰뚫어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책과 사진, 기사와 인터뷰 등 모든 자료를 총동원해도, 우리는 절대 다이애나 스펜서의 실제 삶 혹은 그 내면에 다가갈 수 없다. 그렇다면 <스펜서>는 적어도 무리수를 두지는 않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욕심내지는 희망을 놓지는 않는다. 다이애나를 관찰하고 따라가다가도 그녀의 언행을 특정 방향으로 유도하려는 듯한(각본과 연출 모두) 뉘앙스를 풍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서사에 종속될 수 없는 예측 불가능한 감각을 불러일으키는 지점이 있다는 사실은 <스펜서>를 흥미롭게 만들고 있다.
그런 맥락에서, 매기와 다이애나가 산책을 가는 장면을 굳이 언급하고 싶다. 매기에게 배신당했다고 느낀 다이애나는 매기에게 진실을 말해달라고 하지만, 그 순간 매기는 당돌한 우회 답변을 통해 다이애나를 보듬어 준다. 어쩐지 어둠을 걷어내고 충격을 주려는 매기의 진심 어린 고백만이 다이애나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준 것만 같았다. 배우가 인물을 열심히 세공한 뒤 완벽하게 소화해 내려는 야심이 돋보이는 <스펜서>에서, 크리스틴 스튜어트-다이애나 스펜서 사이에 존재하던 얇은 막이 사라졌던 순간은 바로 그 순간뿐이었다. 그래서 매기와 다이애나가 썰물 때의 해변에서 자유롭게 뛰어노는 장면만큼은, 시공간이 어쩌니 조니 그린우드의 음악이 어쩌니 촬영의 구도가 어쩌니를 따지는 일이 크게 의미 없다고 느꼈다.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