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3.25-2022.03.31
<덤보>는 위태롭다. 굳이 디즈니와 다시 손잡은 감독의 속내를 세심하게 헤아려 보자는 건 아니지만(당연히 내가 헤아려 볼 수도 없겠지만), 분명히 내부 총질과 타협을 오가는 혼란스러움이 영화 곳곳에 배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관객은 어우러질 수 없는 두 세계가 충돌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한다. 결핍을 안고 사는 이들이 꿈과 환상의 나라 디즈니의 이면을 알게 될 때 어떤 균열이 일어나는가. 심심한 충돌 이후 무엇이 우리를 맞이했나. 저마다의 상처가 은근슬쩍 봉합된 뒤 차츰 아물어 가고 있다며, 이제는 문제가 없을 거라며 살갑게 가이드를 자청하는 메디치의 모습. 그 역시 베디비어와 크게 다를 바 없는 인물이었다는 점이 얼마간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그리고 재건된 서커스단. 장착된 기계 팔. 혼자 아닌 우리. 마침내 보장받은 자유. 꿈에 한 발짝 다가간 이들. 하지만 이제는 다 잘 될 거라고 안심하기엔 찝찝하다.
덤보 때문이다. 어쩐지 자유로워진 덤보의 비행에서 해방감이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덤보>에서 홀트는 홀트로 남을 수 없다. 그러니까 콜린 파렐은 팔 한쪽이 영영 사라질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않아도 좋다는 말이다. 그는 연기를 끝내고 현실로 복귀한 뒤, 스크린을 손쉽게 빠져나올 수 있다. 그런데 덤보는 끝내 <덤보>의 스크린을 벗어날 수 없는 건 아닐까. <덤보>는 덤보를 위한 영화이기보다는 덤보를 도구로 요긴하게 활용하는 영화처럼 느껴진다. 커다란 귀로 폭포수를 가르는 덤보의 비행은 실제가 아니고, 고도의 기술력이 만들어낸 '진짜 같은' 허상이다. 종종 삽입되는 덤보의 시점 숏들은 아기 코끼리의 심리나 인지 상태를 간접적으로 제시할 수 있어도, 관객과 덤보의 인지적 상황을 동기화할 수는 없다. 실제 코끼리에 그래픽을 입히지 않고 탄생한 순도 100퍼센트의 허구 코끼리인 덤보는 과연 팀 버튼과 디즈니에 양쪽 모두에게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덤보는 과연 무엇에 속박되었고, 무엇에서 해방될 수 있는 걸까.
어항 속에 갇힌 메기에게 전권이 주어진다. 메인 내레이터인 메기는 1인칭과 전지적 시점을 자유롭게 오가면서 영화를 이끌고 있다. 이때 영화가 '믿음'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사실이 제법 흥미롭다. 메기의 내레이션이 화면 정보와 일치하는 순간들이 왕왕 있긴 하지만, 메기가 인물의 내면을 대리하려는 듯한 특유의 서술 방식이 모든 진실을 보장해 주지는 않기에, 끝내 <메기>엔 각자의 주관으로 재편된 불완전한 무언가가 덩그러니 남을 수밖에 없다. 가령 성원의 문신을 보는 윤영과, 그 문신에 내포한 의미를 들여다보려는 메기의 내레이션이 포개지는 순간을 떠올린다. 메기가 내뱉는 말은 윤영의 속내로 치환될 수 없다. 서사 내 일정 구간에서 동력원으로 작용하는 엑스레이 필름도 그렇다. 악의적으로 찍힌 엑스레이 사진이 누구의 신체를 담아낸 것인지 불분명하다. 여윤영은 자신의 것이라고 믿고 있고, 메기는 진실을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마저도 확실하지는 않고, 관객은 방사선사와 그의 애인 것이라고 여기지만 이것 또한 추측일 뿐 진실이 아니다.
믿는다는 건 가능성에 베팅하는 행위다. 어차피 진실은 손에 잡힐 수 없다. 메기 또한 '사실이 온전하게 존재하는 곳은 아무 데도 없대요'라고 읊지 않았나. 그렇다면 확률이 시시각각 변동하는 불확실한 상황에 직면했을 때 각자가 어떤 마음가짐으로 베팅하는지 따져보아야 할 텐데, 이런 맥락에서 과연 <메기>는 소용돌이 속의 인물을 어떻게 담아내고 있는 걸까. 지연이 윤영에게 질문을 건넨 뒤, 윤영이 대답하는 모습을 떠올린다. 윤영의 말은 사실일까? 확신할 수 없다. 그렇다면 <메기>에서 윤영이 실제로 어떤 일을 겪었는지를 따지는 일보다 중요한 건, 윤영의 마음가짐이 어떤 상태에 놓여 있으며, 그에 따라 어떤 방향으로 마음을 굴려나갈지 가늠해 보는 시도다.
그렇지만 <메기>에서 인물들의 뒤를 좇는 작업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메기>는 계속해서 빈틈을 노리거나 일부러 주의를 흩뜨려 놓는 재기 발랄함을 늘어놓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막과 장과 같은 명확한 경계로 챕터를 분리하는 대신, 은근슬쩍 화면 영역 내에 활자를 띄우면서 서사의 분기점을 설정하기도 한다. 특히 <메기>에서 눈에 띄는 구간 가운데 하나는 부원장의 CF 촬영을 돕기 위해 모션 캡처 분장을 한 윤영의 얼굴이 지연의 고백을 듣는 윤영의 모습으로 전환되는 지점이다. 이때의 갑작스러운 시공간 전환. 전형적인 플래시백이라기엔 살짝 비틀린 화법처럼 보인다. 윤영이 지연과 만난 시점을 플래시백으로 불러오는 방식이 이때 처음 나온 게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전환은 마치 모션 캡처를 맡은 배우가 가상의 프레임 내부로 들어가 연기를 하는 것처럼 액자식 구성으로 비칠 수 있는데, 그런 맥락에서 확장된 해석을 곁들이자면, 윤영이 어쩌면 불확실한 믿음을 증폭시키기 위해 나름의 편견 체계를 작동시킨 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물론 진실은 윤영만이 알고 있고, 메기는 여전히 자신이 모든 걸 알고 있는 것 마냥 떠들어 대고, 관객은 무엇을 믿어야 할지 혼란에 빠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