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4.01-2022.04.07
낯뜨거운 불편함과 철없는 익살스러움, 희미한 애틋함과 뒤숭숭한 낭만 그 사이 어딘가. 션 베이커의 영화가 맴도는 자리에서 우리는 여러 감정의 교차점이나 접점뿐 아니라 심지어 평행선까지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레드 로켓>은 한물간 포르노 배우의 눈뜨고는 못 봐줄 철없는 재기담이다. 이때 영화가 소재적인 면에서(빈곤층, 음지 직종 종사자들) 션 베이커의 세계를 계승했다고 말하기에 앞서, 카메라를 통해 명료하게 감독의 세계를 구체화한다고 보는 편이 훨씬 적절한 것 같다.
<레드 로켓>의 카메라는 인물을 어떻게 따라가는가. 영화는 카메라를 쉽사리 인물들의 머리 위로 들이밀지 않는다. 다시 말해 부감 혹은 직부감 대신 아이 레벨 이하의 앵글이 전제될 때에만, 인물들을 따라갈 수 있다고 믿는 것 같다. 낮은 곳에 위치해야만 그들을 바라볼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렇지만 <레드 로켓>은 인물에게 접근하거나 그들에게서 멀어지는 데 있어서는 다소 난감한 전략을 구사한다. 망원 렌즈가 바짝 붙어 섹스하는 모습을 훔쳐보다가도 급격히 줌아웃하면서 그들을 자연 풍광 속에 가둬버리는 장면. 그 직전 직후에 들러붙은 숏을 떠올려 볼 때, 이 영화는 자극적이고 위험한 섹스 혹은 성욕마저도 그로부터 피어나는 정념을 부각하는 데 몰두하지 않고 그저 관망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고 보면 <레드 로켓>에서 섹스하는 남녀의 모습은 항상 두 육체가 어우러진 모습이 온전하게 담기지 않고, 중간에 툭 끊기든가 신체가 프레임에 일부만 담기는 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피사체에 대한 냉정함 혹은 거리감을 숨기지 않을 때, 다시 말해 줌인과 줌아웃으로 카메라를 운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굳이 굳이 티 내려고 할 때, <레드 로켓>은 한없이 잔혹한 션 베이커의 세계와 연동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레드 로켓>은 멈춰버린 사람들의 영화다. 멈춰버린 시공간에 매몰되어 가는 사람들이 있고, 거기서 벗어나려는 사람들이 있지만, 어느 것 하나 쉽사리 성사되기 힘든 그런 난감함이 도사리고 있는 영화다. 백인 저소득층이 모여 사는 동네에 외부인이 편입될 때 벌어지는 일들. 고향을 떠난 이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올 때 생기는 균열들. <레드 로켓>은 가치 판단을 은근슬쩍 유보하면서 그들을 바라보기만 한다. 절대로 손을 뻗어 구원하려 하지 않는다. 인물이 구제받았다고 느끼는 건 착각이고, 영화는 잠깐의 환상만 허락하고 마는 것이다. 어쩌면 엔딩은 예언적인 장면이거나 혹은 허무맹랑한 환상이거나 가능성이 있는 미래이자 이뤄지지 않을 신기루 그 사이 어딘가의 감각을 환기한다. 션 베이커의 영화는 늘 이런 식으로 인물에게 유보된 혹은 유예된 상황을 선사해왔고, <레드 로켓> 역시 다르지 않았다.
<패러렐 마더스>에서 잊힌 뒤 매몰됐던 과거가 경계를 넘어 지금 이 시공간으로 비집고 들어와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망설임이 없다. 엔딩 숏을 보고 들었던 생각은 그뿐이었다. 역사를 대하는 태도에 있어, 현시점의 관객을 각성시키기 위한 나름의 비책일까? 그게 아니라면 현재와 과거를 포개놓는 시도를 통해 감독 본인의 역사관 혹은 신념을 강하게 표출한 것일까? 어느 쪽이든 이 영화는 뜻을 굽힐 생각이 전혀 없다. 사실 <패러렐 마더스>는 여러 겹의 껍데기로 둘러싸인 영화다. 세대와 성별, 삶과 죽음의 역사가 한데 얽힌 메타포의 홍수가 눈앞에 있다. 그런데 한없이 은유적인 뉘앙스로 뒤덮인 이 영화를 표면으로만 읽어냈을 때도 여전히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다는 점이 놀랍다. 그런 점에서 <패러렐 마더스>는 탁월한 각본을 토대 삼아 자신의 뜻을 펼쳐나갈 수 있는 영화가 된다.
조너선 라슨의 생전 모습이 담긴 영상은 크레딧 이후에나 등장하고, 극 중에선 앤드류 가필드가 연기하는 조너선 라슨의 모습이 정제되지 않은 푸티지처럼 제시된다. 그러니까 <틱, 틱...붐!>은 무리해서라도 실제 조너선 라슨을 극에 끼어들게 하지 않는다. 가필드를 라슨으로 설정한 기본 원칙을 무너뜨리려고 하지 않는 영화인 셈이다. 이에 따라 가필드는 이 영화에서 라슨을 재현 혹은 구현하기 위해 본인의 역량을 마음껏 펼쳐 보이지만, 어쩐지 '라슨을 연기하는 가필드'의 아우라가 더 커 보였다는 점이 문제 같다. 그러니까 크리스틴 스튜어트가 연기하는 진 세버그 혹은 다이애나 스펜서의 경우와 비슷하다고 느꼈다. 만약 이 영화가 '가필드의 몸을 잠깐 빌린 조너선 라슨'을 구현하는 데 성공했다면, 크레딧 이후에 등장하는 실존 인물의 모습이 더욱 와닿았을지도 모른다.
<틱, 틱...붐!>이 선택한 구조적인 얼개는 현장 예술이 아닌 영상예술의 장점을 드러내고 있다. 원작 뮤지컬의 형식으로 충족하지 못하는 지점을 영상과 스코어, 편집을 보완할 수 있다는 점이 <틱, 틱...붐!>의 존재 의의이자 강점일 수 있겠다. 다만 이 영화는 조금 안일하다. 가령 사회적인 메시지가 인물들의 사연과 연동되는 모양새가 적절한지 의구심이 생긴다. 그저 음악과 대사와 사연을 교차하고 나열하고 배치하는 것만으로는, 생명력과 활기를 부여받을 수 없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영화는 30대에 접어드는 청춘의 복잡한 내면을 상당히 투박하고 전형적인 키워드로 요약한 뒤 제시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인물에게 공감이 안 간다는 말이 아니다. 어쩐지 영화가 관객들로 하여금 반드시 공감할 수 있도록 경로 설정을 해놓은 느낌이다. 거기에 정치사회적인 뉘앙스를 슬쩍 두르는 이유라도 명확해야 하는데, 그 부분에서 영화는 나를 납득시키지 못한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틱, 틱...붐!>은 삶과 예술을 어떻게 결합하고 어떻게 서로 떼어낼지에 관한 방황과 고민을 한 편의 영화를 통해 전달할 줄 아는 영화이기에, 마냥 태클만 걸고 싶지는 않다. 적어도 내가 했던 고민들, 내가 겪었던 순간들이 <틱, 틱...붐!>에 서려 있기 때문이다. 다음 작품을 계속 써야지. 쓰고 쓰고 쓰다가 뭐 하나 얻어걸릴 때까지 쓰는 거라는 일침. 그게 작가라는 제작자의 말. 그 말을 듣고 난 자의 행동과 결단이 영화를 다 보고난 지금도 내게 생생하게 남아 있다. 삶으로서의 예술, 예술로서의 삶. <틱, 틱...붐!>은 그 지속되는 굴레의 어딘가에서 이리저리 휘둘리는 청춘(들)을 위한 애정 어린 송사다.
진화가 아니라 저주. 마이클 모비우스는 변해버린 자신을 '저주'로 규정짓는다. <모비우스>의 인물은 저마다 자신을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이들은 갈등과 고뇌가 뭔지 모른다. 어쩌면 모르는 척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모비우스는 스스로가 자신을 통제하지 못한다고 말하지만, 그 누구보다도 자신을 잘 통제하는 것처럼 보인다. 불필요한 흡혈을 통한 살생을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고, 그 결심을 지키는 과정에서 어려움은 발생하지 않는다. 마일로의 경우, 모비우스의 대척점에 있도록 설정된 캐릭터라 납득 가는 수준의 전형적인 언행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내겐 오히려 주인공보다 그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작업이 더 흥미롭게 느껴진다. 주인공이 매력을 잃어버린 영화는 표류한다. 히어로와 빌런, 안티 히어로, 자경단, 무법자 그 어떤 수식어를 갖다 붙여도 모비우스 박사의 희미한 정체성을 대변하지 못한다. 감각적인 영상미로 감싼 본편이 끝나고 나면, 정말 쓸데없는 쿠키 영상이 총체적 난국에 화려한 방점을 찍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