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 기념관에서 일하는 직원들을 섭외해서 그들의 노동 장면을 담아냈든, 연기자를 고용했든 간에 중요한 건 현시점의 아우슈비츠를 관객에게 소개했다는 선택 자체가 문제다. 이건 영화가 줄곧 공백으로 뚫어놓았던 아우슈비츠를 영화가 전제한 현실(현시점의 기념관에서 유추 가능한 실제의 인류사 영역)과 영영 분리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다시 말해 영화가 현실과의 접합을 하지 않았더라면, 벽 너머에 공백으로 남겨뒀던 아우슈비츠는 관객들 각자에게 스며드는 현실로서 작용하면서 자연스레 환기의 장을 만들어냈을 테지만, 기념관 시퀀스가 회스의 구토와 연결되는 순간 그 가능성은 사라진 셈이다.
뒤집어서 생각해 보자. 마지막 엔딩에 현재의 수용소 모습이 병치되지 않았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관객이 영화가 끝나도, 외화면 영역에서 관객들을 내내 의식하게 만드는 아우슈비츠의 내부에 대해 곱씹어 볼 기회를 얻게 되지 않나. 왜냐하면 여백으로 남겨둔 아우슈비츠가 현재 어떤 모습인지 영화에서 제시하지 않았으니 영영 알 길이 없기 때문이다. 현실과 영화의 경계를 넘나드는 작업은 그때부터 원활하게 작동하며, <존 오브 인터레스트>가 러닝타임 동안 고수해온 관점의 유효성이 계속해서 살아 숨 쉴 수 있다. 하지만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회스가 응시하는 어둠을 현재의 기념관과 연결시키는 방법을 택했다. 그렇게 상상 지대는 닫힌다. 그 미지의 영역을 관객에게 넘기는 게 아니라, 영화 속에만 머무르게 하지 않았나. 영화는 현실이 될 수 없고, 현실은 영화가 될 수 없다. 늘 그 얇디얇은 막 사이를 오갈 뿐이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외화면의 아우슈비츠를 끝까지 미지의 영역으로 유지한 채 관객과 연결하지 않았다. 이 영화의 선택을 지지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