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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 리치 감독론: 숏폼의 시대를 거스르는 영화

by 드플레

그의 영화를 시퀀스, 신, 숏, 프레임 단위로 끊어내는 순간 묘한 이질감이 피어나기 시작하는 현상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결과일 수밖에 없다. 애초에 가이 리치는 쉴 틈 없이 펼쳐지는 ‘과정의 연쇄’가 자아내는 밀도감과 부피감을 정밀하게 재단해 놓았기 때문이다. 그 온전한 덩어리가 쇼츠나 릴스라는 형식으로 재가공된다면 순식간에 생명력을 잃어버리는 건 당연하다.


자극과 도파민으로 가득한 틱톡, 쇼츠, 릴스의 홍수에 허우적대는 동시대 대중에게 “내 영화에서 눈을 떼지 말라”고 호소하는 가이 리치는 어쩌면 ‘대숏폼 시대’에 영화라는 전통 포맷을 고수하는 사명가일지도 모르겠다는 상상을 해 본다. 눈요깃거리를 화려하게 풀어놓는 데에 집중할 거였다면, 꼭 영화일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광고나 뮤직비디오를 연출하다 영화판에 뛰어든 가이 리치는 벌써 이 바닥에서 20년이 넘게 구르면서 소처럼 작품을 찍어내고 있지 않나. 그의 영화엔 야망이나 계몽이 없다. 대신 잔뜩 확대된 제이슨 스타뎀의 신체 일부, 휴 그랜트의 맛깔나는 언변과 제스처, 수상하지만 믿음직해 보이는 누군가의 손, 시종 반짝이는 큼지막한 보석, 시선을 사로잡는 묘기와 재간만 어른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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