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 못 듣는 거야, 안 듣는 거야?”. 극의 초반부 동생이 청각장애인 언니에게 수화로 건넨 말이다. 동생은 윗집 어딘가에서 계속해서 소음이 들린다며 언니를 다그치지만, 언니는 어디서 소리가 들리냐며 제발 그만 좀 하라고 동생을 나무란다. 동생이 언니에게 소리를 들어보라며 권유하는 장면에서, 엄밀히 따지면 관객들은 소리를 들을 수 없다. 이 구간에 삽입된 소릿값이 존재하지 않아서다. 그러니 층간소음이 정말 나는지, 나지 않는지는 이미 논의 대상에서 멀어진다. 그보다 중요한 건 무엇인가. 자연스럽게 그 소리를 받아들이는 수용자의 태도나 자세 따위가 주요 화두가 될 수밖에 없다. 그도 그럴 것이 ‘노이즈’는 수용자들의 리액션을 따라가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수용자는 층간소음으로 고통받는 극 중 인물들뿐 아니라 관객들도 포함되는 개념이다.
그러니 청각장애를 지닌 주영이 극을 이끌어간다는 사실은 스릴감이라든가 긴장감 따위의 장르 질감 다변화를 유도한다는 측면에서만 중요한 게 아니다. 그보다 우리는 주영이 수용자의 환경을 뒤흔드는 존재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주영이 소리를 인식할 수 있는 상황은 보청기를 착용해야만 성립된다. 직장 상사의 잔소리를 듣기 싫으면 보청기를 끄고 먼 산을 바라보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머릿속이 복잡할 때도 보청기를 빼버리면 그만이다. 그런 그가 사라진 동생을 찾아 나선 뒤부터 정체불명의 층간소음을 인식하게 되는 순간을 떠올려 보자. 보청기가 없어도, 주영은 스마트폰의 음성인식을 통해 변환된 텍스트로 음향 정보를 얻어낼 수 있지 않았나. 아무도 없는 집에서 갑자기 휴대폰 화면이 빛난다. 음성인식 기능이 작동하고 있다. 두려움에 떠는 주영이 해당 앱을 가동하자, 자모음 조합이 실시간으로 무분별하게 나열되면서 그를 패닉 상태에 빠뜨린다. 여기서 제시된 소리는 사실 소리 자체가 아니라, 가공된 정보다. 관객이 보청기가 없는 상태에서 귀가 들리지 않는 주영의 감각 수용 환경을 간접 체험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 맥락에서 이 구간이 ‘노이즈’에서 중요한 이유는 바로 ‘소리’의 미결상태를 해소하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 앞서 말했듯 ‘노이즈’의 ‘소리’는 언제나 감각만 될 뿐, 그 정체를 파악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주영은 이 같은 수용자의 환경을 조작하고 있다. 소리가 감각이 제대로 되지 않았음에도, 그 소리의 정체, 발원지, 생산자 따위의 정보를 유추할 수 있게 만들어줬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수용자의 환경을 조작한다는 맥락을 유지한 채 주영이 종종 듣는 환청이나 환상을 떠올려 보자. 804호로 들어온 주영이 인기척을 느끼자, 그 자리에 집주인의 딸이 지나갔던 걸 생각해 보자. 사실 그 딸은 몇 년전 교통사고로 죽었지만, 주영이 목격한 장면으로 인해 관객들은 딸의 생사 여부를 단정짓지 못하게 된다. 그렇다면 수용자의 여건을 응시해온 ‘노이즈’에서는 딸이 정말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 진실은 중요하지 않다. 선택은 관객의 몫이다. 비슷한 측면으로, 지하실에 정말 철문이 존재했는지 경찰과 주영이 실랑이를 벌이는 신 또한 객석의 우리가 그걸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달린 셈이다.
‘노이즈’는 층간소음을 중심으로 이웃 간의 불신과 단절, 구축 아파트 재건축, 가족의 상실, 장애인 노동자의 일상 등을 엮어내면서 한국 사회의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문제들을 영화의 배경으로 끌고 왔다. 여기서 재밌는 점은 팍팍한 현실의 건조한 질감을 살린 이 영화가 마냥 영화를 현실의 영역에만 머무르게 하지 않는다는 것. 영화가 실종 사건의 경위를 따라가는 와중에도 끊임없이 불가해한 징후들을 배치하며 장르 균형을 흔들었던 걸 떠올려 보자. 즉 이 영화는 공포 스릴러로 출발했지만, 귀신이나 원령 따위의 초자연적 존재를 전면에 내세우는 오컬트의 영역까지 침범한다. 하지만 영화는 귀신을 끄집어내 놓고도 그 존재를 명확히 규정하지 않고, 설명조차 하지 않는다. 존재의 불확실성을 함부로 재단하지 않은 채 끝까지 미결상태로 보류하는 셈이다.
이를 두고 장르의 접합 내지는 전환이 매끄럽지 못하다는 관객과 평단의 반응이 이어졌지만, 내 생각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이런 뒤섞임은 이 영화에서 필연일 수밖에 없어서다. 내내 수용자의 환경에 주목해 온 영화의 행보로 보자면, 이런 장르의 혼합은 오히려 영화가 이어온 논리 구조에 힘을 실어주는 선택이다. 귀신이 대상 앞에 등장하는 순간, 수면 위로 올라오는 화두가 바로 ‘믿음’이라는 걸 기억하자. “내 눈앞의 귀신을 과연 믿을 것인가 말 것인가?” 이건 극 중 인물과 관객 모두에게 해당하는 질문이다. 그러니까 504호 남자든 주영이든 804호 여자든 관객이든 누구든 간에 귀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데 초점을 맞추면 안 되고, 귀신의 존재를 어떻게 받아들일지에 방점을 찍어야 하는 셈이다. 그러니 귀신이 왜 나왔는지 따질 게 아니라 내게 귀신이 어떤 존재인지 곱씹어 보는 편이 ‘노이즈’가 선택한 경로에 더 적합한 게 아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