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우라는 애인의 죽음을 극복했는가? 베티네 가족은 옐레나의 부재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됐는가? 사실 상실을 애도하는 방법에는 정답이 없을지도 모른다. 다만 그걸 둘러싼 시선만이 있을 뿐이다. 여기서 크리스티안 페촐트의 ‘미러 넘버 3’는 영화 내적인 세계에 집중한다. 그러니까 이 영화에서 식기세척기나 피아노를 고쳐 쓰는 행위가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건, 상실로 가득 차 고장나버린 내면을 수리할 필요가 있다는 은유처럼 다가와야 정상이다. 그러니 페촐트가 형식과 내용 간의 여러 조합을 통해 미학을 구축해 온 2010년대 후반 이후의 근작과는 결이 다르다. 외부의 내레이션/촬영 매체 및 시점의 변경(트랜짓), 시점 변화(운디네), 극중극(어파이어) 같이 영화 외부의 요소들이 영화의 내용과 형식에 영향을 줬던 최근의 사례들을 떠올려 보자. ‘미러 넘버 3’는 오히려 그 어떤 유별난 시도도 없이 정제된 영화 언어로만 관객과 만난다.
그런 언어 가운데 이 영화에서 두드러지는 요소가 있다면 그건 시선이다. 도입부에서 라우라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와 바라보던 베란다 창문을 떠올려 보자. 창문 너머 라우라의 눈길이 가닿는 곳에는 남자친구가 보였다. 하지만 엔딩에서 기나긴 여정 끝에 집에 돌아온 라우라가 다시 같은 장소에서 그곳을 바라봤을 때, 그곳에는 아무도 없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인물의 시선이 닿는 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유심히 살펴봐야 하는 영화처럼 느껴진다. 있어야 할 곳에 꼭 있어야 할 것들이 있는지, 또는 없어야 하는 게 그곳에서 어떻게 발견됐는지를 따져봐야 하는 셈이다. 그러니 옐레나 사후에 가족이 처음 모여 만찬을 하는 신을 떠올려 보라. 아빠와 아들이 베티의 집에 도착하는 순간 제시되는 시점 숏은 마치 부엌에 있는 베티의 관점인 것마냥 촬영됐다. 그들이 앞마당에 등장한 게 어떤 의미인가. 그리고 이들은 이들이 자리해야 하는 공간에 자리한 게 정말 맞는 것인가.
그렇지만 이 영화는 어딘가 찝찝함을 남긴다. 그건 바로 다채로운 시선의 상호작용을 확인할 수 있음에도, 관객인 우리가 인물들의 사연이나 관계나 상황을 파악하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페촐트의 세계에서 시선이 시작되는 지점, 시선이 가닿는 지점, 그리고 시선의 방향을 유심히 뜯어보는 작업은 꽤나 의미 있는 접근이 된다는 점에서 논의를 이어가 보자.
이번 영화에서도 라우라의 시선은 늘 어딘가로 향해 있지만, 대부분의 상황에서 그의 눈앞에 창이 놓여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교통사고를 당한 뒤 베티의 집에서 휴식을 취할 때 2층 방에서도 어김없이 라우라는 자그마한 창을 통해 바깥 마당과 길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누가 오고 가는지 지켜본다. 종종 마당에서 울타리를 칠하거나, 우두커니 서 있는 베티를 볼 때도 있고 리하르트가 차에 고장난 식기세척기를 싣고 떠나는 모습을 지켜볼 때도 있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창'이라는 또 다른 프레임이 생겨날 때, 그 내부의 피사체에 관해 별다른 의미부여가 필요 없는 경우가 훨씬 많다는 데 있다. 즉 관객들은 창가를 응시하는 시점 숏을 통해 서사의 전개나 극적인 동력원으로서의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라, 라우라의 시선 그 자체만을 경유하게 되는 간접 경험의 장에 놓이는 셈이다. 더욱이 이런 시점 숏의 뒤에 이어붙는 숏을 잘 떠올려 보자. 라우라의 시점을 벗어나, 그 피사체에 가까이 붙어 상황 맥락을 더 잘 드러날 수 있도록 찍혀 있지만 어쩐지 그렇다고 해도 정보 획득에 있어선 특별한 진전은 없지 않았나. 베티의 얼굴을 다른 각도에서 더 자세히 바라보더라도, 멍하니 서 있는 그의 얼굴에서 우리가 읽어낼 수 있는 정보는 제한되어 있으니까 말이다. 물론 이 영화를 다 보고나면, 영화에 깃든 정서와 심상이 비교적 직관적으로 형성되는 덕분에 역으로 유추해볼 수는 있긴 하겠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이 같은 시점 숏의 배치로) 종종 라우라의 시선과의 동기화를 반강제로 강요당하는 관객들이 과연 라우라라는 존재와 가까워질 수 있는가? 서정적인 피아노 선율, 여유를 가져오는 자연 풍광을 통해 시종 유려한 리듬만 선보이는 줄 알았던 '미러 넘버 3'의 돌출부는 바로 이런 지점에서 발견된다. 영화는 도통 인물들과 접속할 기회를 제공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이 영화에서 아마 대부분의 관객들은 쉽사리 인물들의 여정에 동참할 수 없이 관찰자로서만 남게 된다.
‘미러 넘버 3’ 곳곳에는 여전히 페촐트의 인장이 아로새겨져 있을 만큼, 이 작품을 영락없는 그의 영화로 보아도 좋겠다. 다만 이 작품에서 눈여겨볼 점은 그간 자신이 매달려 온 요소들을 덜어냈을 때도 페촐트 영화의 공식이 작동할 수 있는지 그 가능성을 들여다볼 기회의 장을 제공한다는 것인데, 그렇다는 말은 페촐트가 앞으로 끌어안을 자신의 영화 언어이자 도구를 탐색하는 실험의 장처럼 이 영화를 기획했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역사 배경, 현실 환기 요소를 적극적으로 내세웠던 전작들을 미뤄볼 때, 종합해 보면 이 영화가 페촐트 연출작이라기엔 다소 이질적인 구석이 있다. 구체적인 핍진성은 전부 소거되거나 생략되어 있고 혹은 뭉그러져 있다. 베티네 가족이 가구를 사러 가거나 장을 보러갈 때 베를린에 간다는 걸 보아하니 시내에서 떨어진 교외에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들의 출신 배경이나 생활 양식을 추정할 수 있는 요소가 그리 많지는 않다. 도입부에서 라우라가 남자친구나 프로듀서 일행과 함께 여행지로 가는 여정도 그렇다. 그 행선지가 어디인지, 차를 타고 어디로 가는 것인지 명확한 목적지 정보가 드러나지 않는다. 공간과 장소의 지표를 다뤘던 지난날의 영화와는 어딘가 다르다. 그게 불분명했든, 명확했든, 오인과 혼동을 가져왔든 아니었든 간에 그런 지표의 성질에서 파생됐던 감각들 자체가 페촐트의 영화에선 주요한 화두였음을 부정할 수 없지 않나.
질문을 하나 해보고 싶다. 그렇다면 공간의 특성이 사라진 자리에, 사람의 특성은 정말 존재하는가? 그러니까 ‘유령’에서처럼 유괴당한 아이를 몇 년간 잊지 못해 찾아 나서는 프랑수아즈의 전사라든가 과거의 주요했던 순간들이 이 영화의 옐레나를 잃은 베티에게선 눈을 씻고 봐도 찾아볼 수 없다는 말이다. 사실 크리스티안 페촐트 영화에서 소거와 생략은 낯선 키워드가 아니다. 하지만 ‘미러 넘버 3’는 그걸 인물과의 소통 과정에 있어서도 밀어붙이고 싶은 것처럼 보인다. 지금 이들이 왜 이런 상황을 겪고 있는지, 과거의 사연이나 배경은 제대로 제시되지 않는다. 플래시백이나 타인의 서술(내레이션)따위도 없다. 그렇게 ‘미러 넘버3’에서 인물들은 현재 이 시점의 이 상태로 동기화된다. 그렇다면 이어지는 질문. 과연 우리는 이면에 대한 추궁 없이 표면만을 응시했을 때 심연에 가까워질 수 있는가? 어쩌면 심연을 들여다볼 필요가 없는 것일까? ‘미러 넘버 3’는 페촐트가 이에 관해 내놓은 한 편의 ‘자문자답’ 창작 노트가 아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