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영화
2020.08.07-2020.08.13
<플로리다 프로젝트> (션 베이커, 2017)
영화의 제목인 '플로리다 프로젝트'는 1965년에 디즈니 사가 플로리다에 처음 디즈니 월드를 건설할 때, 플로리다 주 올랜도의 부동산을 매입했던 계획명이었는데 이제는 플로리다 주의 홈리스 보조금 지원책의 명칭으로 쓰인다. 플로리다의 디즈니 월드 주변에는 안정된 주거지가 없는 빈곤층이 거주하는 홈리스 모텔촌이 형성되어 있다. 이 영화의 배경은 그러한 현실에 바탕을 둔다.
감독은 영화 내내 무니(브루클린 프린스 분), 헬리(브리아 비나이테 분), 바비(윌렘 데포 분) 그리고 주변인들 모두의 관점을 다루기 때문에 관객은 깊게 몰입하는 대신 한 발짝 떨어져서 이들을 바라보게 된다. 물론 감독이 이 영화에서 아이(무니)를 비중 있게 생각하여 후반부에 모녀 관계를 조명하고, 엔딩에서 나름의 생각을 표출하긴 해도 전체적으로는 상당히 감상적 몰입을 자제하려는 태도가 느껴진다.
이 영화에서 션 베이커는 광각으로 쓰지 않아도 되는 장면마저도 와이드하게 담아냈다. 그만큼 이 영화가 관객에게 현실로 인식됐으면 하는 감독의 바람이 크다는 것이다. 그런데 재밌게도, 광각이 사용된 장면의 미장센은 대체로 인물들이 처한 냉혹한 현실과 다르게 동화적 색감으로 가득하다. 이러한 괴리감 덕분에 불편함과 씁쓸함이 넌지시 느껴진다.
엔딩에 관한 사람들의 의견이 다양하다. 한 발치 물러나서 상황을 지켜보던 감독이 마지막에서야 속내를 내보이며 아이를 위로하는 장면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아이가 눈앞에 주어진 현실을 외면하고 꿈과 환상을 상징하는 디즈니월드로 도피할 수밖에 없는 세태를 꼬집는 장면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나는 엔딩을 보고 잠시 멍하게 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안타까움을 느꼈다. 카메라가 끝까지 따라가서 성을 보며 한껏 상기된 아이들의 얼굴이라도 비췄다면, 나는 실재하는 디즈니월드가 허황된 꿈의 공간만은 아니라고 여기면서 무니가 행복하기만을 바라며 응원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카메라는 디즈니 성을 향해 달려가는 아이들을 따라가다가 성이 보일 때쯤 서서히 멈춰가면서 멀어지는 아이들을 바라본다. 아이들이 저렇게 간절히 바라며 뛰어가지만, 그곳은 도달할 수 없는 환상 속의 공간이라고 넌지시 말하고 있는 건 아닐까. 감독도 아이를 응원하고는 싶지만 어른이 보기에 디즈니월드는 현실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억지로 찾아낸 상상 속 도피처일 뿐이다.
P.S.
난 보라색을 정말 좋아한다. 덕분에 보랏빛으로 가득한 이 영화를 냉정히 판단하기가 어렵다. 빈곤층의 거주지로 쓰이는 보라색 모텔이 영화의 주 무대이다. 빨강과 파랑이 섞여 만들어지는 보라색을 이 영화와 연결해 본다면 몽환과 신비, 이상과 현실의 미묘한 경계나 양면성과 관련지어 생각해보면 좋지 않을까.
<아이 오리진스> (마이크 차힐, 2014)
데이터를 신봉하는 남자는 과학의 방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일을 경험한다. 여자의 환생은 실험적 접근으로 입증할 수 없지만, 종교의 논리와 직감으로는 확인할 수 있다. 감독은 오랫동안 철학의 담론이 되어왔던 과학과 종교의 대치를 과감히 시나리오에 녹여냈다. 이 영화에선 누구보다 과학을 신봉하는 남자가 인간의 지성으로 납득할 수 없는 현상을 몸소 체험하며 내적 변화를 겪게 된다. 아니 내적 변화가 아니라 어쩌면 남자는 그 누구보다도 종교를 부정하기 싫었던 사람이지 않았을까. 로맨스의 화법을 빌려 심도 있는 소재를 가볍게 다듬어낸 감독은 대립 구도를 확실히 하면서도 특정 논리나 사상에 치우치지 않게 주의하면서 극을 전개한다. 감독은 과학과 종교는 양립 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며 조심스럽게 모두를 긍정한다.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홍원찬, 2020)
영화의 제목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는 신약 성경 마태복음서의 구절 중 일부(주기도문)에서 인용한 듯 보인다. 종교적 담론을 유도할 만한 소재를 눌러 담은 흔적은 보이지 않아서, 감독이 설정한 플롯과 인물에게 부여한 서사가 제목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생각해봤다.
감독이 연출과 더불어 각본도 맡았으니까 작품 관련한 모든 요소에는 그의 의중이 분명히 녹아있을 것이다. 감독은 과연 누구를 악에서 구하고 싶었던 것일까.
인남(황정민 분)을 지향점을 상실한 채 정념에 매몰된 순수한 악 레이(이정재 분)로부터 구하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면 구조적 불안과 훼손된 도덕성으로 가득한 사회에 노출된 인남의 딸을 악의 구렁텅이에서 구원하고자 했을까. 인남이 딸을 유이(박정민 분)에게 맡기며 레이와 함께 죽는 걸 보면 인남과 그의 딸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악으로부터 구원받았다고 볼 수 있을까?
플롯의 완성도는 스크린에 드러나는 미학적 매력을 살리기 위해 어느 정도 희생당한다. 그런데 영화에서 이야기 요소가 자리를 양보한 만큼 그에 상응하는, 혹은 그를 웃도는 미적 효과를 얻었는가? 관객과 평단의 반응은 대체로 동의하는 듯하다. 그러나 나는 의문이 든다.
현지 로케이션, 촬영 방식의 다양화로 빚어낸 미장센과 장르 분위기는 얼핏 보면 상당한 퀄리티를 자랑하는 듯 보인다. 정적인 무드를 부여하는 쇼트에선 조명과 색감에 공들인 티가 나고, 핸드헬드 촬영을 비롯한 각종 기법은 새로울 것 없는 액션 화법을 지루하지 않게 보조해준다. 유사 장르의 좋은 선례를 여럿 오마주하여 녹여내려고 한 시도도 느껴진다.
이쯤에서 나는 행동의 동기가 부족한 인남이 태국에 도착하여 거리를 누비는 장면을 떠올린다. 앞으로 어떤 사건이 벌어질 거라고 암시하는 듯, 시종 냉랭하던 화면 톤을 대척되는 색감으로 바꾼다고 해서 몰입도가 올라가지는 않았다. 뭐, 스타일은 챙기는 것처럼 보이긴 했다. 상당수 액션 신의 타격감을 끌어올려야 하는 막중한 책임을 가진 음향도 자연스럽게 배우의 몸짓에 녹아들지 않고 과시하는 듯 튀는 지점이 있었다. 이렇게 어딘가 조합이 어긋나는 지점이 계속 발생하면서 영화를 이루는 요소들은 잘 짜인 하나의 그물망이 아니라 각자의 자리를 지키는 전시품처럼 보인다.
<탠저린> (션 베이커, 2015)
영화 <탠저린>은 제목처럼 따사로운 금빛 햇살이 내리쬐는, 모두가 즐거운 크리스마스 이브의 LA를 배경으로 한다. 하지만 영화는 제법 묵직한 소재를 다룬다. 이 영화는 <라라랜드, 2016>처럼 낭만 가득한 도시의 한복판 대신 빈곤층과 성적 소수자들이 뒤엉켜 사는 도시의 주변부를 슬쩍 들여다본다. 즐거운 명절 분위기와 재기 발랄한 색감, 리드미컬한 음악은 이들이 처한 현실과 동떨어져 보인다. 아이폰 핸드헬드 촬영의 정제되지 않은 현장감과 실제 트랜스젠더의 호연, 감상적 몰입을 자제하는 감독의 시선 덕분에 관객은 영화를 가공된 세계가 아닌, 현실 속 누군가의 일상으로 인식하고 공감할 수 있다.
<익스트랙션> (샘 하그레이브, 2020)
마약 업계 세력 다툼에 의해 어딘가로 납치된 거대 마약업자의 아들을 용병 집단이 구출하는 영화다. 이토록 개요가 간단하다면, 영화는 분명 집중하는 요소가 따로 있다는 뜻이다. 아니나 다를까, 영화 초중반부가 지나면서 펼쳐지는 호쾌한 탈출과 카체이싱, 총기 액션과 격투를 10분이 넘는 롱테이크로(엄밀히 보면 원테이크는 아니고, 편집점이 존재한다.) 재단해낸 기법을 통해 감독은 영화의 지향점을 화끈하게 명시한다. 문제는 그 이후, 인물들이 각자의 사연을 주고받는 동안 숨 가쁘게 쌓아왔던 쾌감과 긴장감이 일시에 해소되면서 관객의 몰입이 흔들리게 된다. 어느 순간 동력을 잃은 이 영화의 서술 방식이 이해가 잘 가지 않는다. 애초에 감독은 플롯의 견고함보다는 장르적 외형과 스타일을 중요하게 생각했을 텐데 어째서 액션에만 집중하지 않았을까. 소재(용병의 민간인 구출)도 구구절절 설명 없이 장르 특성을 살리기에 안성맞춤이었는데 정말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