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영화

2020.08.21-2020.08.27

by 드플레


글 하단부에 최근 개봉한 <테넷, 2020>의 감상평이 있으니 영화를 보지 않으신 분들은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스포일러 가득합니다.


<디스트릭트 9> (닐 블롬캠프, 2009)


인간은 배타적인 존재다. 속성이 현저히 다른 존재(동물)를 대하는 경우에만 그런가? 아니다. 인종이 다르고, 성향이 다르다는 이유로 특정 집단화를 이룬 자들은 다른 사람들을 임의로 규정짓고 집단화하여 거부하고 배척한다. 이 영화는 평소 외계인을 무시하던 인간이 의도치 않게 외계인으로 변해가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다. 외계인을 철저하게 '타자'로 분리하던 비커스(샬토 코플리 분)는 외계인처럼 변해가는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사람들은 그를 배척하기 시작하고, 언론과 미디어는 날조와 선동으로 그를 궁지로 몰아넣는다. 인간도 아니고 외계인도 아닌 비커스가 외계인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지만 그마저도 어렵다. 외계인 크리스토퍼는 비커스를 치료해 줄 수 있다고 그와 거래를 시도한다. 비커스가 크리스토퍼의 부탁을 들어주자, 크리스토퍼는 말을 바꾸며 당장은 약속을 못 지킬 것 같다고 한다. 물론 배신할 의도는 전혀 없었겠지만 결국 외계인들도 자기 종족을 우선시하는 것 아닌가.


왜 인간은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적대감을 표출하는가? 이건 비단 인간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우리가 이런 고민에 빠지는 이유는 분명 인간과 비교할 만한 적절한 대상이 없기 때문일 수도 있다. 늑대도, 물고기도, 미생물들도 분명 인간과 유사한 태도를 보일 때가 있겠지만 그들은 인간과 생물학적으로 비슷하지도 않고 유사한 환경에 놓인 개체들도 아니다. 이 영화는 그래서 외계인을 내세운 건 아닐까 싶다. 외계인은 미지의 존재들이지만, 분명 인간과 필적할 수 있는 존재로 그려질 때가 종종 있고, 혹자는 외계인이 인간과 유사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일각에선 외계인을 인간보다 훨씬 고등한 존재로 묘사한다. 그 위대한 인간이 한 수 접고 들어가는 존재가 바로 외계인일지도 모른다. 물론 이 작품에선 인간을 부정적으로 묘사하려는 의도에서 외계인을 상대적 약자로 설정하지만 말이다. 저예산 SF 영화임에도 소재, 연출, 기술 등 뭐 하나 모자란 데가 없는 수작이다. 생각할 거리도 많이 던져주는 좋은 영화다.







<공동경비구역 JSA> (박찬욱, 2000)


박찬욱 감독이 본격적으로 대중들에게 이름을 알린 작품이다. 어느 커뮤니티에서 본 코멘트처럼 어떤 외국인이 나에게 '가장 한국적인 영화가 무엇이냐'라고 물으면 주저 없이 이 영화를 알려줄 것이다. 물론 <서편제, 1993>나 <취화선, 2001> 같이 한국 전통 정서를 기반으로 한 영화나 전 세계가 주목한 <기생충, 2019> 등 많은 영화들이 있겠지만 난 그냥 이 영화가 먼저 떠오를 것 같다. 이 작품이 주는 메시지는 역사의 한 귀퉁이에만 머무르지 않고 여전히 한국인들의 마음속에 '현재 진행형'으로 살아 숨쉬기 때문이 아닐까. 전쟁이 남긴 상처는 세계 각지에서 점차 아물어 갔지만, 동아시아 한구석에 자리 잡은 상처는 딱지가 내려앉고 떼지는 상황이 반복되면서 여전히 깊어지는 중이다. 이 영화가 나온 2000년에도, 20년이 지난 지금도 고민을 안겨주는 영화다.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 (드니 빌뇌브, 2015)


관객은 시종 케이트(에밀리 블런트 분)의 시선을 장착하고 작품을 감상한다. 영화는 여러 사람의 관점이 아닌 케이트만의 입장을 주로 서술하면서 극적인 몰입을 유도한다. 법과 원칙을 고수하는 케이트와 대립하는 맷(조쉬 브롤린 분), 알레한드로(베니치오 델 토로 분)의 관계는 영화에 묘사된 사회에 맞물리면서 강력한 메시지를 만들어낸다. 감정적으로 격해지는 와중에도 건조하게 응시하는 태도를 통해 서스펜스를 만들어내는 영화이다. 음악의 활용도 센스가 넘친다.






<투모로우> (롤랜드 에머리히, 2004)


퍼져나가는 기후 재난의 양상을 화면에 담아내는 방식은 분명 인상적이다. 16년 전 작품임에도 이 영화가 그려낸 장면들은 살짝 어색한 그래픽 처리를 제외하면 현대 재난 영화와 비교해도 절대 밀리지 않는다. 오히려 이 작품보다 못한 작품들이 종종 보인다. 게다가 영화는 단순히 스케일의 규모만을 키워 눈요기에만 집중하지도 않는다. 도서관의 책이 땔감으로 쓰이고, 멕시코가 미국의 난민들을 수용하는 모습에선 할리우드식 재난 영화 치고는 사유의 틀을 넓혀주는 화술을 읽어낼 수 있다. 그러나 전체적인 완성도가 치밀하지 않아 갈수록 동력이 떨어진다. 상징이나 은유 등 디테일을 추구하는 것 좋지만 큰 틀에서 이 영화는 신파 요소나 과도한 비약과 생략을 스케일과 메시지로 덮어버리려고 안간힘을 쓴다.






<제이슨 본> (폴 그린그래스, 2016)


<본> 트릴로지를 충실히 오마주 하여 시리즈의 팬들에게 선물로 바치는 영화다. 전작들을 인상 깊게 감상한 사람이라면 분명 알아차릴 포인트가 많다. 그런데 이 영화가 굳이 제작될 필요가 있었는지 의문이 든다. 제작/배급사 입장에서는 당연히 21세기 들어 액션의 판도를 뒤흔든, 상업성과 화제성이 보장된 시리즈를 삼부작으로 끝내기엔 아쉬웠을 것이다. <본 레거시>가 바통을 이어받지 못한 와중에, 맷 데이먼과 폴 그린그래스의 의기투합은 분명 좋은 기회라고 여겼을 가능성이 높다.


어쨌든 그들의 이해관계를 떠나 난 이 영화가 본의 이야기로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 잘 모르겠다. <본 얼티메이텀>의 마지막 장면을 후속작을 염두에 둔 선택으로 읽어냈다면 할 말이 없지만, 기억의 파편을 붙들며 고통 속에 살아가는 본의 여정은 그 작품에서 끝냈어야 하는 게 자연스럽다. 이 작품의 본은 아버지와 얽힌 진실을 파헤치게 된다. 요원으로 세뇌받은 기원과 관련된 소재는 맞지만 본의 회복 서사에 끼어들기에는 다소 부족하다. 이 영화가 없다고 해서 <본 얼티메이텀>이 불완전한 영화가 되는가? 절대 아니다.






<테넷> (크리스토퍼 놀란, 2020)


영화팬들이 손꼽아 기다려온 크리스토퍼 놀란의 야심찬 최신작 <테넷>이 모습을 드러냈다. 개인적으로는 놀란 감독이 상업성과 예술성을 잘 배합한 스티븐 스필버그의 뒤를 잇는 감독이자, 더 나아가 영화 기술적으로 독창적인 세계관을 구축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이번 <테넷> 역시 '놀란식 플롯'의 스케일과 정교함이 잘 드러난 작품이다. 한편으론 의문이 든다. 이렇게까지 세계관 구축에 공들여야만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미래에서 과거를 바꾸기 위해 요원을 파견하고, 현재의 주인공이 미래의 자신과 결투를 벌이고, 과거에서 미래로, 미래에서 과거로 넘나들며 동일한 공간에 다른 시간대의 인물이 뒤엉키는 세계가 펼쳐진다. 감독은 영화 내내 '인버전'을 관객에게 아주 친절하게(물론 대부분의 관객은 불친절하다고 여겼을 것이다. 나도 그랬다.) 설명한다. 주도자(존 데이비드 워싱턴 분, 이름 없이 등장한다)가 자신과 싸우게 된다거나, 닐(로버트 패틴슨 분)이 미래에서 온 주도자의 얼굴을 보는 장면이 그러하다. 사토르(케네스 브레너 분)가 캣(엘리자베스 데비키 분)을 총으로 쏘는 장면도 굳이 빨강과 파랑의 조명 톤까지 구분해가면서 아주 상세히 반복한다. 후반부 테넷 요원들의 전투신 역시 빨강과 파랑의 구분을 유지한 채로, 교차해가며 상황을 납득시키려고 한다.


그렇다면 엔트로피의 증감(열역학 제2법칙)과 관련된 이론을 통해 빚어낸 시간 이동을 굳이 이렇게까지 스크린에 강조하며 새겨놓은 이유는 무엇인가. 이는 <터미네이터> 시리즈가 유사한 설정을 다루는 방식과도 차이가 있다. 분명 이건 이러한 세계관의 구체화, 시각화가 이 영화에서 그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하다는 감독 자신의 확신의 표출일지도 모른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이름도 없이 등장하고(난 이 설정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극 중에선 입체적인 인물을 찾기 어렵다. 닐의 말처럼 '운명'이 아닌 '현실'로 받아들이자는 메시지도 화려한 플롯의 도움을 받지 못하고 희미하게 손짓만 할 뿐이다.


놀란 감독은 장편 데뷔작 <미행, 1998>부터 영화적 기법과 기술에 주목했다. 당장 <테넷>과 비교할 만한 영화라면 <메멘토, 2000>, <인셉션, 2010>, <인터스텔라, 2014>가 있다. 세 영화 모두 플롯의 형식을 주무르는 기교와 인물과 서사에서 비롯된 주제의식이 효과적으로 결합됐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놀란이 대중성과 예술성을 동시에 확보한 감독으로 이름을 떨칠 수 있게 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대중은 기승전결이 뚜렷하고 인물이 입체적인 할리우드식 탄탄한 서사에 익숙하다. 대중성을 얻었다는 말은 어느 정도 대중이 요구하는 스토리텔링의 기준을 만족했다는 뜻이다. 놀란 감독이 만든 대부분의 영화 속 서사는 상당히 빈약한 게 사실이긴 하지만 최소한의 틀은 갖췄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놀란의 작품에서는 감독이라는 작가의 세계관이 정교하게 구축되면서 평단과 관객에게 다양한 접근의 기회를 제공한다. 대중은 구축된 세계의 규모와 디테일을 동시에 체험하며 놀라고, 평단은 그 속에 숨겨진 의미를 파헤치며 음미한다. 놀란은 이러한 균형감을 자신의 페이스대로 능수능란하게 조절하며 만드는 작품마다 이목을 집중시켰다.


<테넷>이 개봉하고 난 뒤, 호불호가 갈리는 지점도 이 부분이다. 이와 유사하게 <덩케르크, 2017>에서 한차례 화제가 됐던 적이 있었다. <덩케르크>는 서로 다른 시간대를 교차하여 영화의 형식을 강조했는데, 이는 놀란이 대중의 기호를 신경 쓰지 않고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가겠다는 신호이기도 했다. 돌고 돌아 이제 <테넷>에 관해 이야기해보자. 아까 말했듯 <테넷>은 세계관 구축에 온 힘을 쏟았다. 게다가 놀란 감독이 늘 지적받는 캐릭터의 도구화가 더 심해졌다. 이 영화에선 표면상으로는 인류를 구하는 거대한 스토리와 그에 상응하는 복잡한 시간 이동의 교차가 다뤄진다. 그 속에는 이름도 없는 주인공이 과거의 나든, 현재의 나든, 미래의 나든 어느 순간의 나 자신이든 간에 동료 닐의 말처럼 내가 경험하는 이 순간의 선택이 중요한 법이라고 주체적인 삶의 방향이 무엇인지 고민해보라는 메시지가 녹아있는 것 같다. 확실히 <메멘토>, <인셉션>, <인터스텔라>의 방식과는 괴리감이 느껴진다. 시너지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는 의도된 작업일 수도 있다. 플롯과 주제의식이 내용과 형식 면에서 조화를 이루지 않게 하고, 주인공에게 이름을 부여하지 않으면서까지 놀란이 성취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 일지에 관해서 생각해 봐야 한다.


관객에게 있어 <매트릭스>, <블레이드 러너> 같은 SF 영화와 놀란의 영화는 어딘가 다르다. 이는 놀란이 유사 장르 요소를 차용하면서도 영화적 체험에 집중하게 만드는 연출 방식을 선보이기 때문이다. 놀란이 그토록 열심히 플롯을 꾸미고, 편집을 통해 시간대를 교차하며, 아이맥스 카메라로 방대한 정보를 담아내려 하는 이유는 이러한 작업은 '영화'만이 선보일 수 있는 작업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러니까 놀란은 그 어떤 예술 양식, 멀티미디어에서도 시도할 수 없는 영화만의 고유성을 현대 영화계에 설파하고 있는 사람이다. 아이맥스 플랫폼으로 개봉한 극장 영화는 기존 스크린에 담을 수 있는 정보보다 훨씬 많은 걸 나타낼 수 있으며, 이는 텔레비전이나 휴대폰으로 송출하는 방송으로는 절대 구현할 수 없는 스케일이다. 감독의 전작에서 늘 반복됐던 시공간 교차, 장면 전환 등의 편집 기술과 그를 통한 복잡도가 증가하는 플롯의 구체화, 시각화는 음악, 미술 등 여러 예술 양식이 혼합된 영화라는 예술 형태에서만 가능한 것들이다. <테넷>에선 역재생을 도입하여 시간 흐름의 역전을 시각화하기까지 했다. 어쩌면 이런 작업에서 캐릭터의 입체성과 탄탄한 서사는 주요 고려 대상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런 의미로 놀란 영화를 바라본다면 이전과는 다른 접근이 가능할 것이다. <덩케르크>부터 꿈틀대던 놀란의 욕망은 <테넷>에서 더욱 구체화됐다. 이제 <테넷> 이후 놀란이 펼칠 세계는 무엇을 향할 것인가. 과연 먼 훗날 놀란의 영화가 고전이 되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될까? 한때 잠시 반짝이던 플롯의 마술사로만 몇몇 노년 계층에 의해서만 희미하게 기억될 수도 있고, 21세기 초반 나타난 영화계의 혁명가로 여겨질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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