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영화

2020.08.28-2020.09.03

by 드플레

<컨택트(원제: Arrival)> (드니 빌뇌브, 2016)


루이즈(에이미 아담스 분) 박사는 웨버 대령(포레스트 휘태커 분)에게 헵타 포드(외계인)의 언어를 제대로 배우면 그들의 방식으로 시간을 인식하게 된다고 말한다. 이제 루이스는 남들과 다른 시간 체계를 인식할 수 있게 된다. 그녀는 미래를 내다볼 수 있다. 자신이 낳은 딸이 불행한 결말에 처하게 되는 걸 알면서도 정해진 삶의 시나리오를 받아들인다. 나는 영화가 끝날 즈음 이언(제레미 레너 분)의 품에 안긴 루이즈의 얼굴을 보며 깊게 몰입했다. 분명 드니 빌뇌브의 연출 방식은 매력적이다. 끊임없이 절제하고, 결정적 순간에 응축된 에너지를 요란하지 않게 슬며시 쏟아낸다. 정서적으로 동요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외계인은 먼 미래에 인류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자신들이 나중에 도움을 받으려면 인류가 자신들의 사고 체계를 받아들여야만 하나 보다. 그래서 그들은 인류에게 가르침을 주려고 한다. 그 과정에서 루이즈가 외계인들의 시간 체계를 인식하고 깨닫게 된다. 사정이 어떻든 기본적으로 외계인은 인류보다 월등한 존재다. 외계인 같은 초경험적 존재를 가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모든 것이 어떤 초월적 주재자에 의해서 규정되는 결정론적 세계관 속의 이야기를 다룬다. 그렇다면 영화가 주목한 루이즈는 그 세계 속 개체의 하나로서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가? 정답은 없을 것이다. 영화에 묘사된 루이즈는 과거부터 미래, 즉 삶의 모든 궤적을 인식하고 자각할 수 있게 된다. 이런 루이즈가 샹 장군에게 전화를 걸어 인류의 분열을 막고, 이언과 결혼해 딸을 낳기로 한다. 이 행위들은 과연 루이즈의 '자유 의지'가 반영된 결과라고 할 수 있을까? 최근 개봉한 크리스토퍼 놀란의 <테넷>에 등장하는 요원 닐(로버트 패틴슨 분)의 말처럼 일어날 일은 일어나는 건 아닐까. 그러니까 세계 속 개체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모든 것이 이미 결정된 것이다. 잘 살펴보면 생각보다 많은 영화에서 결정론과 자유 의지의 양립 가능성에 관한 담론을 다루고 있다는 걸 발견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 영화가 그러한 논의들 틈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고찰해보는 것도 폭넓은 감상의 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난 이 영화가 결정론과 자유 의지 사이의 모순으로 빚어내는 문제들 자체에 집중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루이즈는 결정론의 논리를 따라간다. 관객은 그러한 상황에 처한 루이즈를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다. 영화가 제시하는 어떤 구체적인 의견이 없다는 말이다. 결국 이 작품을 깊이 있게 감상하기 위해 철학적 확장을 시도하는 과정은 결코 매끄럽지 않다고 본다.


P.S. 1

물론 내 식견이 부족한 탓에 영화가 품고 있는 심오한 논점을 충분히 짚어내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다


P.S. 2

국내 개봉판의 제목은 원제 '어라이벌'이 아닌 '컨택트'이다. 난 영화의 제목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 이러한 변형이 잘못됐다고 생각한다. 영화는 연속적인 시간의 순환 고리 속에서 모든 것이 정해진 일종의 결정론적 세계관을 바탕에 둔다. 타국과 소통하여 위기를 헤쳐나가고, 외계인과 접촉하여 상호작용하는 과정보다 더 중요한 건 정해진 목적지에 언젠가 닿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받아들이는 개체의 처신이다.





<시카리오: 데이 오브 솔다도> (스테파노 솔리마, 2018)


전작과 같은 설정을 공유하지만 별개의 작품으로 여기는 편이 낫다. 케이트(에밀리 블런트 분)의 시점으로 서술되던 전작과는 달리 이 작품은 맷(조쉬 브롤린 분)과 알레한드로(베니치오 델 토로 분)가 작전을 펼치는 이야기를 담았다. 이사벨(이사벨라 모너 분)을 죽이지 않으려는 알레한드로의 감정선에 공감하기 어려워서 몰입이 살짝 어려웠다.


아이들은 거대한 마약 카르텔과 산하의 점 조직, 분파들로 인해 오염된 세상에 그대로 노출된다. 길을 잘못 들면 교육을 잘 받은 사람으로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활용도에 따라 가치가 매겨지는, 조직범죄의 영위를 위한 소모품이 돼버린다. 영화는 미겔(엘리야 로드리게즈 분)의 서사를 통해 그러한 실상을 잘 드러내고 있다. 이사벨은 썩어빠진 어른들의 알력에 희생되기만 한다. 물론 이사벨 자체도 카르텔 보스의 딸이라는 운명 때문에 이미 훼손된 도덕성과 가치관을 지닌 아이다. 그런가 하면 맷과 미국 정부 사이의 갈등도 놓칠 수 없다. 맷 역시 경력을 존중받는 베테랑 요원이지만 예상치 못하게 일이 틀어지자 바로 철저히 무시당하는 존재로 전락한다. 정부와 CIA가 그를 가차 없이 쳐내는 모습과 그로 인해 난관에 봉착하는 맷의 모습 역시 다른 인물을 다루는 이 영화의 시선과 크게 다르지 않다. 알레한드로는 애초에 가족을 잃은 뒤, 충격으로 인간성을 상당 부분 상실하고 도구화된 존재다. 그런 알레한드로가 미겔에 의해 죽을 뻔하고, 그 아이를 다시 찾아가서 시카리오가 되고 싶냐고 묻는 장면으로 영화는 끝난다. 알레한드로의 의도야 정확히 알 수는 없겠지만, 세계를 지배하는 통념적 도덕성과 사회 규범이 없어진 공간을 도구화된 개체들이 공허하게 채워나가게 될 미래는 씁쓸하게 예상할 수 있다.





<분노의 질주> (롭 코헨, 2001)


잠입 경찰 브라이언(폴 워커 분)의 돔(빈 디젤 분)을 향한 생각과 행동들은 유기적인 느낌이 약해서 서사 속에서 썩 매끄러운 흐름을 만들지는 않는다. 다소 단순하고 삐걱대는 스토리텔링은 분명한 약점이지만, 다른 강점이 영화를 꽤나 근사하게 만든다. 속도감을 극대화하는 카레이싱 연출은 재치 있는 음향 효과나 몽타주 등 여러 기법으로 짜릿한 쾌감을 선사한다. 캐릭터가 평면적이라는 인상을 지우기 힘들지만, 배우의 개성으로 만들어낸 특성들 덕분에 괜히 영화 속 몇몇 인물은 매력이 가득한 것처럼 느껴진다.





<트루먼 쇼> (피터 위어, 1998)


트루먼(짐 캐리 분)이 자신의 삶과 자기를 둘러싼 모든 것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트루먼의 의구심은 필연적으로 자아의 실존에 관한 물음을 동반하게 된다. 또한 내가 속한 세계에 관한 근본적인 물음도 꼬리를 문다. 트루먼의 자유 의지는 태어날 때부터 TV 쇼 총괄자 크리스토프(애드 해리스 분)에 의해 제한당한다. 크리스토프는 자신이 트루먼을 구원했다고 생각한다. 실제 세상은 살아가기 어렵지만, 방송용 세트장은 부조리와 근심 걱정 없는 이상 세계로 트루먼이 위험 요소에 노출되지 않은 채 평탄한 삶을 보낼 수 있다고 말한다. 후반부 세트장을 탈출하려는 트루먼을 크리스토프가 마지막으로 회유하려고 하는데, 이 장면에서 크리스토프의 음성은 마치 트루먼의 창조주인 듯 느껴진다. 트루먼은 마침내 자각하여 자신을 둘러싼 세계와 세계 속의 자신을 부정한다.


이 작품은 트루먼의 자유 의지와 관련한 개인의 성장 서사를 다룬 영화다. 또한 자본주의 논리와 미디어 문화에 예속된 사회를 맹렬히 풍자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우회하여 비판하지 않고 직설적으로 강하게 비판한다. 트루먼 쇼에서는 거의 모든 장면에 광고가 가득하다. 그만한 스케일의 방송이 24시간 송출되려면 당연히 각종 기업들의 후원이 있어야 할 것이다. 또한 시청자들은 어떤가. 사람들은 트루먼의 세트장 탈출마저 쇼의 일부로 여긴다. 트루먼이 마침내 쇼에서 아웃되고 방송이 중단되자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다른 채널을 찾는 사람들의 모습은 분명 관객의 모습과 전혀 다르지 않다.





<파이트 클럽> (데이빗 핀처, 1999)


데이빗 핀처는 보통 연출만 한다. 자신이 각본까지는 쓰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뛰어난 스토리텔러는 아닐지 모른다. 그런데 그의 디렉팅을 거치면 영화는 어느새 생생한 스토리를 머금고 관객 앞에 나타난다. <파이트 클럽>에서 데이빗 핀처는 초창기 특유의 핀처식 스타일의 패기와 함께 이야기의 깊이도 챙기면서 힘껏 존재감을 뽐낸다. 이 영화는 인간의 내면을 파고들어 원초적인 인간성을 고찰하고, 동시에 자본주의 논리로 점철된 현대 문명의 민낯을 낱낱이 파헤친다. 이 영화의 시선은 안과 밖을 동시에 향하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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