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영화
2020.09.11-2020.09.17
<오아시스> (이창동, 2002)
사실 이 영화를 보고 나는 혼란에 빠졌다. 감독의 전작인 <초록물고기>와 <박하사탕>은 예리하긴 했어도 이 작품처럼 치명적이진 않았다. '이 영화는 좋은 영화일까?' '감독이 의도한 건 무엇일까?'와 같은 조각난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이 영화를 두고 사람들의 의견이 갈렸다. 이는 내가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그녀에게, 2002>를 보고 나서 사람들의 코멘트를 찾아봤을 때랑 상황이 유사했다. 이 영화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은 장애 여성을 향한 성폭력을 정당화하는 감독의 연출을 절대 용납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 영화가 뛰어나다고 칭찬하는 사람들은 감독이 관객들을 일부러 불편하게 만들어 소재에 관한 담론을 형성하게 유도한 것이라고 말한다. 분명 <그녀에게>에 관한 사람들의 반응 역시 비슷한 양상을 보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차근차근 따져보고 싶었다. 이창동은 <오아시스>에서 몇 차례의 전과 경력이 있는 사회 부적응자 홍종두(설경구 분)와 뇌성마비 장애를 가진 한공주(문소리 분)를 내세워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한공주가 홍종두에게 호감을 느끼게 되는 과정에서 사람들의 많은 의견들이 오간다. 종두가 공주를 강간하려고 하는 장면이 적나라하게 묘사된다. 나는 감독이 이 부분에서 과도한 컷 편집, 클로즈업 등 자극적인 묘사에 집중하는 방식으로 이를 대상화하려고 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이후 강간에 실패한 종두에게 공주가 연락하게 되는 과정을 납득할 수 있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나는 이창동이 공주가 종두에게 연락을 할 수 있게 되는 단서를 분명 남겨놓았다고 본다. 공주는 옆집 부부가 섹스하는 걸 보면서 잠시 생각에 빠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공주의 오빠는 겉으로는 공주를 신경 써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뒷바라지하기 어려운 공주를 외딴집에 격리하고 장애인 아파트 거주자 조사를 받을 때만 공주를 잠깐 아파트에 데려다 놓는다. 영화 후반부에 종두의 형제들과 공주의 오빠가 대화하는 장면에서도 오빠는 해당 사건에 대해 공주의 의견을 들어볼 필요도 없다고 하지 않았는가. 공주는 주변인들에게 일종의 도구 취급을 당하고만 있을 뿐이다. 그래서 종두의 강간 시도는 어떤 경우에서도 합리화될 수 없지만, 공주는 어쩌면 그러한 폭력조차도 자신을 향한 관심으로 생각하게 된 건 아닐까. 공주에게 있어서 영화의 묘사대로라면 종두만이 자신을 소통의 대상이자 인격체로 대한 유일한 사람이다. 물론 거듭 말하지만 종두의 충동적인 접근은 분명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영화가 종두에게 면죄부를 쥐여주려고 한 시도는 없다고 생각한다.
옆집 부부의 섹스를 보며 공주가 종두와 자신을 대입시켜 유사한 상황으로 받아들였을 거라는 짐작을 온전히 납득하기 어려운 것은 당연하다. 사람 사이에 피어나는 사랑의 메커니즘은 그렇게 간단한 논리로 전개되지 않는다. 그러나 간과할 수 없는 점도 있다. 공주는 사회와 분리된 철저한 약자이며 소외자이다. 비장애인이나 사회 구성원들은 정상적인 사랑의 메커니즘에 관한 개념을 갖고 있지만 공주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아무도 자신한테 관심이 없지만 종두는 꽃을 주고, 관심을 가져줬다. 그리고 감독이 바로 이런 부분에서 관객에게 불편함을 주입하고 질문을 던지려고 했던 건 아닐까? 내가 영화상에 표현된 이런 연출을 성폭력의 정당화가 아닌 감독의 의도된 설정이라고 여기는 데는 다른 이유도 있다.
이창동은 <오아시스>에서 로맨스 영화라고 보일만한 최소한의 틀은 가져가지만, 나는 감독이 이 영화를 단순히 장르 공식을 비튼 로맨스 정도로 그려낼 생각이 없었다고 본다. 이들의 사랑은 시작부터 뒤틀려 있다. 보편적인 관점에서의 로맨스가 아니다. 다른 정상인 연인들처럼 사랑하길 원하는 공주의 상상 속 장면들은 얼핏 보면 낭만적인 사랑을 뒷받침하는 역할을 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공주 개인의 상상일 뿐이고 영화 속 사회 구성원들은 전혀 알아차릴 수 없다. 관객들만 그걸 목격하게 된다. 영화엔 공주의 상상도 종종 나오지만 이들이 사회에 녹아들 수 없는 장면이 더 많이 나온다. 당신은 이들을 통해 남녀의 낭만적인 사랑을 느꼈는가, 무의식 중에 영화 속 이들에게 눈총을 주는 사람들처럼 불편함을 느꼈는가? 난 깊은 씁쓸함을 느꼈다. 동시에 과연 내가 이들의 사랑을 두고 느낀 바를 감히 마음대로 언급해도 되는 것인지 의문도 생겼다. 감독이 어쩌면 이를 염두에 둔 것일까?
이들의 사랑은 보는 내내 불편하다. 왜 저렇게 사랑에 빠지는지부터 시작해서, 매 순간 이들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계속 찝찝하고 무겁다. 연출 기법 역시 과도한 컷 편집 같은 건 없다. 감독은 그저 건조하게 관조하듯 거리를 두며 이들을 바라본다. 공주와 종두가 서로에게 관심을 갖게 되면서 영화는 사회 속에서 이들이 같이 다니게 되면서 겪는 일들에 주목한다. 이들은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한다. 이들이 어딜 가든 사람들은 종두와 공주를 불편하게 여기며 힐끗거린다. 감독은 표면적으로는 종두와 공주의 로맨스를 그려내지만 실상은 사회적 약자 중에서도 철저한 타자인 종두와 공주를 통해 이들을 바라보는 사회 시선이 정당한지, 더 나아가 영화를 보는 관객들 자신이 종두와 공주를 어떤 생각을 하면서 바라보고 있는지 성찰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나는 이러한 맥락에서 이 작품을 좋게 평가한다. 그리고 지금까지 내가 적었던 말들을 보고 누군가는 주제넘거나 편협하다고 몰아세울 것이다. 하지만 나는 종두도 아니고, 공주도 아니다. 그들의 입장에서 온전히 공감할 수는 없다. 다만 내가 느낀 이창동의 의도를 풀어냈을 뿐이다.
여담이지만 영화 속 한공주를 보면서 문소리가 정말 소름 끼치게 연기를 잘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홍종두를 보고 있자니 설경구가 누군지 까맣게 잊어버렸다. <박하사탕>을 감상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당연히 설경구의 이미지가 내 마음속에 어떤 형태로든 남았을 법도 한데 이 작품을 보면서 종두를 설경구로 인식한 적이 단 한순간도 없었다. 이창동의 영화 속 인물들은 저마다 생생한 이미지를 머금고 있는 경우가 많다. <오아시스>의 홍종두는 이런 이창동식 인물의 특성과 설경구의 신들린 퍼포먼스가 아주 근사하게 결합된 인물이다. <박하사탕, 1999>, <공공의 적, 2002>등 여러 작품들이 있지만 나는 설경구의 최고작으로 <오아시스>를 뽑고 싶다.
P.S.
여러 번 보기 힘든 영화다. 그러나 살면서 최소한 한 번은 꼭 봐야 할 영화다. 18년 전에 이창동 감독이 사람들에게 던진 질문이 아직도 유효하지 않은가?
<밀양> (이창동, 2007)
이창동의 시선은 늘 견고한 사회에서 튕겨져 나간 소외된 자를 향해 있었다. 소설가 이창동의 책은 읽어보지 않아 모르겠고 적어도 감독 이창동의 작품만 놓고 보면 그렇다. <초록물고기>의 막동이, <박하사탕>의 김영호, <오아시스>의 종두와 공주는 모두 이창동식 어법으로 풀어낸 인물들이다. <밀양>의 이신애(전도연 분)도 그런 맥락에서 보면 소외된 사람이다. 그녀는 남편을 사고로 잃었고 이젠 새 보금자리 밀양에 정착해야 한다. 주민들과 서서히 교류하기 시작하며 새로운 곳에서 적응하려는 찰나, 신애는 하나뿐인 아들을 유괴당해 끝내 아들을 잃고 만다. <밀양>에서 이창동은 조금은 다른 시선을 꺼내든다. 이 작품은 사회에 던져진 인물을 지그시 바라보며 각각의 개체가 사회와 맞닿아 있는 방식을 조명하고, 자신이 묘사한 것들을 스크린 밖으로 끄집어내서 관객에게 질문을 던지는 전작들과 결이 살짝 다르다.
이 영화에는 이야기 흐름 상 두 군데의 변곡점이 존재한다. 하나는 신애가 자식 잃은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종교를 받아들이는 내적 변화의 순간이고, 하나는 교도소 면회에서 자신의 아들을 죽인 자로부터 자신이 하나님에게 회개하여 용서받았다는 말을 들은 순간이다. 이창동은 이 영화에서 줄곧 조명해오던 사회와 인간의 관계 진단에만 머물지 않고 그 경계를 확장하여 형이상학적 세계, 즉 초월자(신)의 영역을 끌어들인다. 간단하게 말하면 이 작품은 신과 인간 사이의 이야기이다. 다루는 대상이 경험적으로 인식 가능한 사회에서 초월적 세계로 조금 달라졌지만 이창동은 늘 그랬듯이 그러한 세계에 던져진 인간의 입장에 집중하면서 영화를 풀어나간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 영화는 최소 한 번은 더 봐야 생각 정리가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사실 아직도 이 영화를 보고 느낀 감정과 생각의 조각들이 내 머릿속을 뿌옇게 채우고 있다. 감독 특유의 세계관 확장 및 흔하지 않은 소재의 활용이 돋보이는 좋은 작품은 확실하지만 극찬을 받을 정도의 영화인지는 몇 번 더 봐야 가늠이 갈 것 같다. 엔딩에서 시궁창을 비추는 햇살을 담아낸 쇼트도 아직은 온전히 그 의미를 납득하기 어렵다. 햇볕은 이 영화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제목부터 '밀양' 아닌가. 그러한 은밀한 햇살을 신의 깊은 뜻이나 의지로 보는 게 대다수 관객과 평단의 시각인데, 이 햇살은 인간은 감히 이해할 수 없는 신의 손길이므로 그 신성과 전지전능성을 강조하려면 사실주의적 기법으로 그저 카메라로 지그시 바라보는 정도로 그치는 것이 과연 주제를 일관성 있게 빚어내서 근사하게 함축하는 방식인지는 모르겠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신애의 증오 섞인 저항을 계속 지켜본 절대자가 그녀를 극심한 정신적 고통과 타락으로만 밀어 넣다가 끝에 가서야 마당 한편에 비춘 햇살이라는 심심한 위로를 건네는 방식은 과연 적절한 마무리일까. 정말 어렵다.
배우들의 연기에 관해 이야기를 안 하고 넘어가면 섭섭하다. <오아시스>에서 설경구와 문소리가 선사한 기막힌 퍼포먼스의 여운이 채 가시지도 않았는데 이 작품을 보고 또 다른 여운에 휩싸였다. 전도연과 송강호 역시 연기력으로 극을 지배하는 수준을 넘어 손에 쥐고 흔든다. 전도연은 뛰어난 완성형 연기로 주연답게 존재감을 발산했지만 우리는 이 영화에서 송강호의 연기를 절대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된다. 내가 <오아시스>에서 홍종두를 보며 설경구가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고 했는데, 이번 <밀양>에서도 송강호가 맡은 김종찬을 보면서 굉장히 익숙한 송강호의 얼굴임에도 그가 전혀 송강호로 느껴지지 않았다. 전도연을 받쳐주는 포지션을 묵묵히 수행하면서도 완벽한 타이밍에 맞춰 존재감을 슬그머니 드러내는 김종찬은 배우 송강호가 아니라 그냥 밀양 사는 김 사장님이었다.
P.S.
이창동의 작품을 보고 있으면 항상 스크린에서 여러 형태의 불편함이 스멀스멀 기어 나온다. 꼭 영화 전반에 걸쳐 기분이 오묘하게 뒤틀리는 경험을 많이 하게 된다.
<버닝> (이창동, 2018)
<시>로부터 8년 만에 내놓은 <버닝>은 상당히 독특한 영화다. 윌리엄 포크너와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 소설을 기반으로 한 영화라 특별할 게 뭐 있겠나 싶겠지만, 우리는 이창동이 <버닝>에서 선택한 방식에 분명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해미(전종서 분)가 종수(유아인 분)와 함께 술을 마시면서 '귤 팬터마임'을 언급한다. 그렇다. 우리는 부재를 망각해야만 한다. 해미가 던진 이 말은 영화 전체를 굴러가게 하는 동력원으로 작용한다. 영화는 해미가 사라지면서 본격적으로 종수의 서사를 굴려가며 진행된다. 종수는 벤(스티븐 연 분)을 끝내 죽이게 되는데, 이때 중요한 건 인과 관계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종수가 살인까지 도달하는 과정에서 종수의 이야기가 관객에게 인식되는 방식이다.
이 영화는 대단히 많은 주제를 품고 있다. 보는 이에 따라 다양한 의견이 오갈 수 있는 영화다. 단순히 내적인 완성도에 집중하여 원작 소설들과 비교하며 볼 수도 있고, 해미와 종수, 벤의 관계에서 어떤 메타포를 추출할 수 있는지 고민해볼 수도 있다. 박탈감과 상실감을 떨쳐내지 못하는 청춘들을 향한 메시지를 읽어낼 수도 있고, 프레임에 어떤 정보가 담기고 카메라 구도가 어떤 방식으로 인물과 관계를 맺어가는지 고민해보며 기법의 측면에 포커스를 맞춰 감상하는 것도 가능하다.
<공공의 적> (강우석, 2002)
강철중(설경구 분)과 조규환(이성재 분)으로 끝까지 밀어붙이는 고집 센 영화다. 극 전개 템포나 서사 등 여러 요소에서 감지되는 부족한 점은 감독과 배우가 합심하여 구축해낸 캐릭터 놀이에 어느 정도 가려진다. 강철중과 조규환은 영화에서 전형적인 선악 대치가 아닌 서로 다른 악이 치고받는 대립 구도를 형성한다. 사회 체제의 안정화를 위한 도덕심이나 엘리트 집단(기득권)을 향한 거부감 같은 건 강철중의 주요 관심사가 아니다. 그래서 영화에선 강철중이 조규환을 공권력으로 응징하는 장면(절차에 따라 체포해서 감옥에 집어넣는)이 나오지 않는다. 이 영화는 사회의 부조리를 포착하는 데는 그다지 관심이 없다. 강철중은 범인을 검거하는 형사가 아닌, 본능에 충실한 양아치라는 자아를 장착하고 조규환을 가차 없이 응징할 뿐이다. 관객이 느끼는 카타르시스는 거기서 비롯된다고 본다. 권선징악이나 윤리적 성찰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다. 그냥 강철중이 조규환을 깨부수는 영화다. 그렇다면 영화가 말하려는 건 무엇인가? 잘 와닿지는 않지만 극을 지배하는 원초적인 쾌감만은 확실히 느껴진다.
P.S.
조규환은 아무리 봐도 <아메리칸 사이코, 2000>의 베이트먼(크리스찬 베일 분)을 오마주한 느낌이다.
<분노의 질주: 언리미티드(원제: Fast Five)> (저스틴 린, 2011)
주말에 분노의 질주 시리즈를 몰아서 감상했다. 이 시리즈는 4편부터 슬슬 맘 편히 먹고 볼 수 있는 액션 팝콘 무비라는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일탈(?)을 일삼던 뒷골목 스트릿 레이서들은 5편에서 한탕을 위해 팀을 이룬다. 영화 곳곳에 케이퍼 무비의 색채가 상당 부분 드러난 작품이다. 금고를 차 두 대에 매달고(차 두 대를 금고에 매달았다고 해야 하나...) 도심을 초토화시키는 신이 인상적이다.
<분노의 질주: 더 세븐(원제:Furious 7)> (제임스 완, 2015)
분노의 질주 시리즈는 'Fast & Furious'로 시작했는데, 5편부터 원제가 슬슬 이상하게 바뀐다. 제목의 뉘앙스가 달라진 만큼 이 시리즈도 블록버스터급 규모의 상업 영화로 탈바꿈했다. 7편은 여러모로 말이 많았다. 시리즈의 메인 캐릭터 브라이언 역을 맡은 폴 워커의 유작이고, 공포 영화에 일가견이 있는 제임스 완이 맡은 첫 대규모 상업 액션 영화이기도 하다. 산악 도로에서 작전을 벌이는 상황에서 브라이언(폴 워커 분)이 낭떠러지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있는 버스에 매달리게 되는 장면에선 긴장감을 한껏 살리는 공포, 스릴러의 질감을 선호하는 제임스 완의 연출 방식이 느껴진다.
7편의 자동차 액션은 그야말로 엄청나다. 도미닉(빈 디젤 분)과 팀원들은 굳이 차를 동원할 필요 없는 상황에서도 차를 고집한다. 비행기에서 사람이 차에 탄 채 낙하산을 달고 작전 지점에 투하되는 장면, 험난한 산악 지형을 적극 활용하여 스릴과 몰입을 극대화하는 신들, 슈퍼카로 초고층 빌딩을 넘나드는 다소 무리한 시도까지 이 영화는 자동차로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액션을 쏟아낸다. 액션 신만 놓고 봐도 정말 풍성한 볼거리를 선사하는 영화다.
<패닉 룸> (데이빗 핀처, 2002)
데이빗 핀처의 작품 중에선 꽤나 밋밋한 작품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물론 핀처의 필모그래피로 한정했을 때의 얘기다. 다른 스릴러물과 비교해보면 그래도 상당한 퀄리티를 자랑한다. 이 영화에서 핀처는 집이라는 한정된 공간을 배경으로 삼아 이야기를 풀어간다. 공간 특성을 영리하게 살려 서스펜스로 빚어낸 연출력이 돋보인다. 영화 속 대저택에는 일종의 벙커 기능을 하는 '패닉 룸'이라는 공간이 있다. 공간 속 공간을 활용하고 거주자와 범죄자들의 대립 구도를 여러 차례 흔들면서 긴장감을 자아낸다. 카메라 워킹도 영화의 큰 매력으로 꼽을 수 있다. 버넘(포레스트 휘태커 분)의 심리 상태를 따라가며 영화를 보는 것도 괜찮은 시도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