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영화
2020.09.18-2020.09.24
<씬 레드 라인> (테렌스 맬릭, 1998)
'영상시인'이라 불리는 테렌스 맬릭의 작품을 드디어 보게 됐다. 사실 맬릭의 작품을 전부 다 챙겨 볼 생각을 몇 년 전부터 꾸준히 하고 있었다. 시간의 마술사 크리스토퍼 놀란이 가장 영향을 많이 받은 감독이 바로 테렌스 맬릭이기 때문이다. 좋은 평가를 받는 테렌스 맬릭의 초기작 <황무지, 1973>와 <천국의 나날들, 1978>은 합법적인 방법으로 감상하려면 영상자료원에 방문하거나 DVD를 사서 봐야 한다. 그래서 우선은 당장 구할 수 있는 그의 세 번째 작품인 <씬 레드 라인>을 선택했다.
영화감독이 되기 전에는 철학과 교수였다는 독특한 이력을 가진 맬릭의 영화에는 역시나 확고한 그만의 스타일이 녹아있었다. 이 작품은 전쟁을 소재로 하지만 스펙터클한 액션물이 아니라 인간 군상을 탐구하는 시(詩)와 같은 작품이다. 기본적으로 맬릭은 이 작품에서 전쟁의 참혹함을 여과 없이 드러낸다. 클로즈업이 영화 전반에 자주 쓰여 관객의 공감을 유도한다. 사람의 내면을 직접 서술하는 보이스오버도 자주 쓰인다. 몽타주같이 연달아 배치된 다양한 장면 혹은 피사체들, 사실적 묘사, 시처럼 나지막이 읊어가는 인물들의 내레이션(보이스오버)은 기묘한 조화를 이루면서 자연과 대치되는 인간의 모습을 관객 스스로 탐구할 수 있게 해 준다. 호불호가 충분히 갈릴 연출 스타일이다.
이 작품을 보고 굉장히 반가웠던 장면이 있다. 벨 이병(벤 채플린 분)이 아내와의 추억을 회상하는 신은 인셉션에서 코브(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분)가 멜(마리옹 코티야르 분)과 함께 하는 장면이랑 굉장히 유사한 분위기를 풍긴다. 또한 테렌스 맬릭이 사용한 갑작스럽게 전환 효과 없이 회상을 끼워 넣는 방식은 크리스토퍼 놀란이 <메멘토>, <인셉션> 등 여러 작품에서 다듬어서 활용하게 된다. 그리고 영화의 음악을 한스 짐머가 담당했는데, <인셉션>의 'Time'과 굉장히 유사한 'Journey To The Line'이 굉장히 좋았다. 음악의 활용도 뛰어난 작품이다.
<Thin Red Line>, 테렌스 맬릭, 1998 <Inxeption>, 크리스토퍼 놀란, 2010
P.S. 테렌스 맬릭은 인공적인 조명을 싫어하는 것처럼 보인다. 빛을 굉장히 잘 활용하는 감독이다. 나뭇잎 사이로 스며드는 빛줄기나 해 질 녘 하늘의 색감, 구름에 가렸다가 드러나는 해로 인해 밝아지는 상황 등을 절묘하게 포착하면서 여러 방면으로 다양한 시도를 통해 독특한 영상미를 확보한다. <천국의 나날들>이 그런 면에서 매우 뛰어난 작품이라니 기대가 된다.
<13시간> (마이클 베이, 2016)
전쟁의 참상을 묵묵히 담아내려는 시도가 느껴졌다. 동시에 미국을 날카롭게 꼬집는 영화이기도 하다. 마지막 순간, CIA 요원들이 리비아 정규군에 의해 극적으로 구출된다. 공식적으로 미국은 이들을 도울 수 없었다. 미국 정부의 입장이야 이해는 가지만 결국 영화는 이렇게 고립되고, 고통받는 남겨진 자들의 이야기를 담아냈다. 마이클 베이가 찍어오던 전쟁영화와는 살짝 결이 다른 느낌이다. 많은 영화에서 미국을 향한 애국심을 드러냈던 사람 치고는 이번 작품에선 냉소적인 자세를 취한다. 베이 본인은 요원들, 전직 군인들을 기리기 위해 영화를 만들었다고는 하지만, 어쩔 수없이 이 영화는 어떤 방식으로든 정치적으로 엮일 수밖에 없다. 전체적으로 좋은 점과 아쉬운 점이 혼재하는 영화다. 러닝 타임이 필요 이상으로 길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리고 마이클 베이 특유의 스타일과 전쟁의 참상을 담아내는 리얼리즘이 충돌하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었던 점이 가장 아쉽다.
<내 사랑 왕가흔> (베니 라우, 2015)
한 남자의 순수한 사랑을 다룬 영화다. 인물들의 행동에 있어 전체적으로 설득력이 부족하고, 다소 정형화된 전개 공식을 따르는 등 분명 완성도가 많이 아쉽긴 하다. 그럼에도 천인(황우남 분)의 순수한 마음이 낭만적인 아날로그 감성에 휩싸여 전달되는 점은 괜찮았다. 크레딧에 뜨는 실화 기반의 이야기라는 멘트를 보고 흠칫 놀랐다. 실화를 실화처럼 느껴지지 않게 연출한 감독의 역량이 조금 다른 의미로 놀랍다. 하긴 워낙 운명적인 러브스토리였으니 그럴 수도 있고 각색을 많이 했을지도 모른다. 이 영화를 연출한 베니 라우 감독은 한류를 즐기고 한국 멜로드라마를 좋아한다고 한 인터뷰에서 밝혔다. 그래서인지 이 영화를 보고 있으면 묘하게 <김종욱 찾기, 2010>가 떠오른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홍상수, 1996)
홍상수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다. 메시지나 주제를 집약하기엔 다소 무리가 따르지만, 이 작품에서 홍상수는 분명 또렷하게 말하고자 하는 것들을 전부 드러낸다. 여러 인물의 에피소드를 나열하여 인간 내면을, 현대인들의 모순을 파헤친다. 극 중 남녀는 복잡한 관계로 얽혀 있다. 그렇지만 이 영화는 감정이 휘몰아치는 치정극이 아니다. 오히려 무서울 만큼 무미건조한 시선을 유지한다. 그렇게 냉소적이고 극사실적인 눈으로 사람들의 일상을 관망하고, 날카롭게 풍자도 곁들이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인간 본성의 추악함을 발견하고야 한다.
효섭(김의성 분)이 재판장에서 자신은 부도덕과 거리가 멀다며 선처를 호소하는 장면은 유부녀와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여자 사이에서 복잡한 관계를 유지하는 그의 모순을 통렬하게 드러낸다. 한편으로 효섭은 돈 없는 빈털터리지만 수중에 남은 돈 전부인 이만 원을 남에게 선뜻 내어준다. 그는 의외로 정 많은 사람이기도 하다. 알다가도 모르겠다. 영화 속 인물들을 보고 있으면 우리랑 다를 게 없어 보이기도 한다. 홍상수는 염세적인 시선으로 이들을 한동안 가만히 노려본다. 그가 시선을 거둔 자리에선 인간의 근원적 고민들이나 내면의 응어리 같은 불편한 것들이 불쑥 고개를 내민다. 스크린에 드러나는 지극히 평범한 일상의 이미지들은 어느새 관객의 마음을 깊숙이 파고든다.
<마일스> (돈 치들, 2015)
재즈의 상징과도 같은 뮤지션 마일스 데이비스의 삶을 다룬 영화다. MCU의 '워 머신'으로 대중에게 각인된 돈 치들이 감독과 주연을 모두 맡았다. 고증에 철저한 전기 영화긴 하지만 돈 치들은 그의 내면을 묘사하는 데 있어 선택과 집중을 한다. 마일스 데이비스의 첫 번째 처였던 프랜시스와의 추억을 플래시백으로 활용하며, 메인 플롯은 마일스가 술과 마약에 빠져 음악계를 떠나 은둔하던 시절 일어난 일로 채워져 있다.
어쩔 수 없이 이 영화는 같은 트럼펫 연주자였던 쳇 베이커의 삶을 다룬 <본 투 비 블루, 2015>와 비교될 수밖에 없다. <본 투 비 블루> 역시 이 작품처럼 과거와 현재를 교차한다. 그 작품에선 만신창이가 된 현시점의 쳇 베이커(에단 호크 분)가 재기를 위해 몸부림치는 와중에 과거의 성공적인 나날이 흑백으로 교차하며 삽입된다. 이러한 방식은 <마일스>의 교차 연출보다 훨씬 주제를 구현하거나 정서를 환기하는 데 있어 효과적이었다. 이 작품에서 마일스가 프랜시스와 있었던 일을 회상하는 장면들은 공감대를 이끌어내기도 전에 전환 효과 등 재치 있는 영화적 기법에 묻혀서 희미하게 사라진다. 마일스의 내면을 들여다보려는 시도는 좋은데 그 깊이가 부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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