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영화
2020.09.25-2020.10.01
<붉은 돼지> (미야자키 하야오, 1992)
미야자키 하야오의 세상은 현실처럼 보이지만 거기엔 늘 마법이나 환상의 요소가 개입된다. 돼지 포르코는 한때는 군인 마르코였다. 전쟁의 참혹함을 온몸으로 겪은 마르코는 죽음의 문턱을 경험한 뒤 갑자기 돼지로 변했다. 스스로 돼지가 되기로 결심했거나 강력한 마법에 걸렸을지도 모른다. 그는 인간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지 않는다. 파시스트가 되는 것보단 돼지로 사는 게 낫다는 그의 말이 기억에 남는다. 미야자키의 전작들과 비교해보면 확실히 이 작품은 묘하게 다른 인상을 풍긴다. 그는 주로 주인공으로 여성을 내세웠지만 이번엔 참전 군인이다. 이 작품은 인물의 서사가 정교하거나 뚜렷하지 않다. 미야자키는 그저 돼지 포르코를 그려내는 데만 집중한다. 포르코에게 투영하고 싶은 작가의 내면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돼지는 자유를 외치며, 문명의 발달에 따른 황폐화된 인간성을 등진 채 하늘을 벗 삼아 살아간다. 미야자키는 이 작품에서 포르코의 내면을 치유할 기회를 만들어 낸다. 그렇게 포르코는 인간에 대한 회의감을 서서히 지워나갈 수 있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미야자키 하야오, 2001)
미야자키 하야오와 지브리 스튜디오가 공들여 준비한 이 작품은 서사의 설계와 시각, 음향적인 측면에서 완성도가 매우 뛰어나다. 디지털 애니메이션 제작 방식을 적극 활용하고, 기존 지브리의 아날로그 감성에 그래픽 기술을 적절히 결합하여 특색을 유지한 채 진보를 이룬 작품이기도 하다. 정체성을 재정립하고 회복하는 치히로와 하쿠의 여정이 주가 되면서도 가오나시, 유바바의 아들 보의 서사에도 메시지가 담겨있다. 문명사회를 비판하는 시선은 여전히 날카롭고, 여느 때처럼 자연과 인간 사이에서 표면적인 관계와 그 이면을 탐구하고,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함을 추구하는 작품이다. 기본적으로 이 영화는 판타지 요소를 중심으로 하기 때문에 세계관에 관한 묘사도 제법 중요한데, 감독은 부수적인 설명을 거드는 대신 캐릭터 묘사에 공들이고 인물 간에 엮이는 에피소드들을 효과적으로 배치하여 관객에게 자신이 구축한 세계를 자연스럽게 납득시킨다.
실사 영화와 비교해도 부족하지 않은 카메라의 다양한 구도 활용, 영화를 지배하는 수려한 영상미와 언제나 출중한 히사이시 조의 음악도 매우 훌륭하다. 전체적인 완성도가 뛰어나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캐릭터를 탐구하는 재미가 있는 작품이다. 가오나시에 부여된 서사와 그 캐릭터를 통해 다양한 은유를 읽어 낼 수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가오나시는 사회적 약자, 인간의 물질적 욕망, 철저한 타자, 정체성을 상실한 현대인 등 다양한 존재로 치환 가능하다. 또한 치히로, 하쿠와 같은 주요 인물들은 노장 철학이나 니체 등 동서양 철학을 상당 부분 대입하여 확장된 의미를 끌어낼 수 있는 존재다. 유바바와 제니바의 대립 관계는 후속작인 <하울의 움직이는 성>과 연결 지어 생각해 볼 지점도 제공해 준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 (미야자키 하야오, 2004)
미야자키 하야오는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서 초기부터 강하게 드러냈던 날 선 비판 의식을 조금 덜어낸다. 본작 전까지의 미야자키 연출작들이 인간 문명과 자연의 관계에 대한 고찰과 진단, 성찰의 세계였다면 이번에는 대안 제시와 가능성, 소망 등에 관한 세계를 펼쳐낸다. 이 작품은 기술 발달이 전제된 폭력적인 인간 문명 세계를 다루지만 마법사라는 존재들이 개입한 탓에 그 세계는 환상처럼 보이기도 한다.
영화는 미야자키가 전작 내내 비판해 오던 요소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지 않는다. 여전히 미야자키는 자연과 유리된 기술 문명과 문명이 빚어낸 도구화된 인간성에서 비롯된 갈등(전쟁)을 부정적으로 보긴 하지만, 그러한 비판 의식은 현실과 환상이 결합된 세계관에 교묘히 가려진다. 미야자키는 이 작품에서 질문 대신 대답을 선택하려는 다소 어정쩡한 태도를 보인다. 그가 표현한 소피와 하울 사이의 믿음, 사랑은 문제를 향한 대안으로써 작용하게 된다. 파괴된 인간성은 사람으로 치유해야 한다는 그의 지나치게 이상적인 따스한 눈길이 통렬한 비판의식보다 강조되면서 이 영화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 중에서 가장 낭만적이지만 한편으로는 소극적인 작품이 된다. 또한 정체성을 중심으로 한 인간 내면의 여정 역시 전작들에 비하면 설득력이 다소 떨어진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소피와 하울 사이의 사랑으로 모든 걸 해결하려고 한다.
<그녀의 뒷머리> (조쉬 사프디, 2007)
사프디 형제는 최근 영화계가 주목하는 감독들이다. 2008년부터 이들이 내놓는 작품이 각종 영화제를 통해 소개되면서 영화계에서 입지를 넓혀나갔다. 이들이 연출한 <헤븐 노우즈 왓, 2014>, <굿타임, 2017>, <언컷 젬스, 2019>는 연달아 좋은 반응을 이끌어 냈다.
이 작품은 조쉬 사프디가 영화학도 시절에 연출한 단편(약 22분) 영화이다. 아파트 위층에 사는 남자는 아래층의 여자를 몰래 짝사랑하고 있다. 사프디는 영화 내내 오버헤드 숏, 로우 앵글, 하이 앵글을 적절히 배합하여 재치 있게 사용한다. 이런 촬영 기법은 층마다 사람이 사는 아파트의 공간 특성, 극 중 벌어지는 사건들, 인물 간의 관계와 매우 긴밀하게 연결된다. 조쉬는 이 작품에서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연출 방식도 슬쩍 선보인다.
kmdb 사프디 특별전(9.28-10.12)을 통해 이들의 대학생 시절 단편 영화부터 최근 연출작까지 만나볼 수 있다.
P.S. 영화계엔 참 뛰어난 형제(자매, 남매) 감독이 많다. 당장 익숙한 이름들만 놓고 봐도 코엔, 다르덴, 사프디, 워쇼스키 등 정말 많다.
<도난당하는 것의 즐거움> (조쉬 사프디, 2008)
조쉬 사프디의 장편 영화 데뷔작으로 칸영화제에 초청된 작품이다. 멈블코어 기반의 즉흥적인 전개와 노이즈 섞인 화면의 질감, 드문드문 흐르는 재즈 선율이 여운을 남긴다. 핸드헬드로 담아낸 뉴욕 한구석에는 도벽에 빠진 한 여자가 있다. 엘레노어(엘레노어 헨드릭스 분)는 틈만 나면 물건을 훔친다. 여자는 죄의식을 전혀 느끼지 않는다. 그녀에게선 사회 구성원으로서 가져야 할 최소한의 보편적인 통념조차도 찾을 수 없다. 어째서인지 사프디는 이 문제의 인물에게 손가락질을 하지 않는다. 제목부터 <The Pleasure of Being Robbed>가 아닌가. 그녀에게서 물건을 도둑맞은 사람들은 물건이 엘레노어에게 넘어가면 더 이상 출연하지 않는다. 피해자들의 모습을 비춰주지 않는 걸 보면 영화는 엘레노어에게 타박을 줄 생각이 없어 보인다. 그렇게 사프디는 그냥 흘러가는 대로 지켜본다.
영화 후반부에 엘레노어는 지갑을 훔치려고 하다가 체포된다. 엘레노어는 수갑을 찬 채로 경찰이 다른 사건 때문에 방문한 동물원에서 동물들을 구경한다. 그녀가 잠깐 상상에 빠진다. 그녀는 수갑을 벗고, 유리창 너머에 있던 북극곰을 향해 뛰어든다. 그런데 상상 속 북극곰은 진짜 동물이 아닌 인형이다.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것처럼 보였으나 사실은 전부 엘레노어의 헛된 망상에 불과하다. 엘레노어는 사회에 녹아들지 못한다. 뉴욕 출신인 조쉬 사프디는 화려한 뉴욕이 아닌 볼품없는 뉴욕을 담아내기로 한다. 그런 그의 영화에서 엘레노어는 경찰서를 나와서도 여전히 물건을 훔친다. 그녀는 결국 뉴욕의 뒷골목에서 계속 겉도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사프디는 엘레노어에게 의미 없는 환상을 심어준다. 그녀에겐 현실은 시궁창 같겠지만 눈앞의 상황을 잊고 잠시나마 자유롭게 상상에 빠져보라는 듯이 말이다. 그렇게 감독은 그녀를 향해 씁쓸한 위로 한 마디를 툭 던졌다.
P.S. 영화에 삽입된 셀로니어스 몽크의 'Pannonica'가 정말 좋았다.
<헤븐 노우즈 왓> (조쉬&베니 사프디, 2014)
사프디 형제에게 뉴욕은 부랑자들이 몸부림치는 뒷골목이다. 영화에 묘사된 노숙자들의 하루를 보고 있으면 굉장히 불편해진다. 영화는 할리(아리엘 홈즈 분)가 처한 현실을 여과 없이 잔혹할 정도로 생생하게 그려낸다. 할리는 더 나은 삶을 살려고 하지 않는다. 마약의 노예가 되어 정념과 충동에 사로잡혀 하루하루를 버틸 뿐이다. 사프디 형제는 뉴욕 부랑자들의 삶을 나쁘게만 바라볼 생각은 없어 보인다.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이들을 환상과 현실의 경계에 데려다 놓고 잠시나마 위안을 느낄 수 있도록 작은 배려를 해줄 뿐이다. 그런데 달라지는 건 없다. 환상을 걷어내면 차디찬 현실이 보인다. '영화니까 저렇지'라는 말을 사프디 형제는 조금 다른 관점으로 제시한다. 사프디 형제의 영화 속의 환상은 영화니까 부여할 수 있는 일탈이다. 영화에서라도 그들을 잠시나마 위로하고 싶어 하는 건 아닐까.
할리에게 있어 일리야(케일럽 랜드리 존스 분)는 여러모로 매우 중요한 존재이다. 할리는 일리야만이 자신을 구원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프디 형제는 일리야를 할리에게서 떼어놓는다. 일리야는 극사실적으로 묘사된 다른 인물들과 다르게 상당히 모호하게 표현되는 인물이다. 어쩌면 일리야는 환각에 사로잡힌 할리가 만들어낸 허상일지도 모른다. 일리야는 할리를 버려두고 버스에서 내려 은신처에서 끔찍한 최후를 맞는다. 이 장면은 몽환적인 전자 음악과 함께 관객에게만 제시되는데, 감독은 할리가 바라던 구원은 절대로 성취될 수 없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할리는 전혀 모르게 관객에게만 던진다. 사실 이게 할리의 꿈속이든 실제로 일리야가 비참한 최후를 맞은 상황이든 크게 상관은 없다. 엔딩에서 드러나듯 할리는 그녀를 옭아매는 냉혹한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 (김용훈, 2020)
시간대를 영리하게 비틀어 놓은 플롯을 내세우는 영화이다. 감독은 영화 속 이야기에 명쾌한 인과 관계에서 나오는 동력을 부여하는 대신, 상징적인 테마로 구분해서 인위적인 리듬을 만들어낸다. 정교하게 맞아들어가는 구조의 쾌감이 아니라, 테마로 집약되는 인물들의 생동감이 극의 몰입을 주도한다.
P.S. 중반부터 등장하는 전도연의 압도적인 존재감은 극 전체를 쥐고 흔들 만큼 강력하다. 대사 한 마디마다 극의 호흡이 달라지는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