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영화

2020.10.23-2020.10.29

by 드플레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 (아쉬가르 파르하디, 2011)


영화가 시작하고 나면, 이혼 소송 중인 한 부부가 판사를 향해 각자의 입장을 늘어놓는다. 판사의 모습은 나오지 않는다. 부부는 카메라(판사)를 응시하며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둘의 입장이 팽팽히 대립되는 상황이 3분 남짓 이어지는 롱테이크 숏에 담기는데, 영화를 다 보고 나서 이 장면은 영화의 성격을 압축해서 제시한 영리한 구간이라는 걸 깨닫게 됐다. 이 영화는 답을 정해놓지 않는다. 다양한 사람들의 의견과 생각을 흩뿌려 놓고 관객에게 묻는 영화다.


대사와 행동만으로 캐릭터의 성격을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게다가 이렇게 형성된 캐릭터는 선택의 순간마다 고민에 빠지게 되는데 어느 쪽을 고르든 납득이 갈 법한 모호한 상황이라 관객은 영화에서 벌어지는 모든 상황을 입체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영화 내적으로 보면 서사가 상대적으로 느슨하다는 점 빼놓고 비판받을 만한 부분이 있는지 잘 모르겠다. 서사가 느슨한 것도 영화의 특성상 당연한 부분이라 나는 이 영화에서 흠잡을 곳을 굳이 찾아낼 수가 없다. 일단 영화가 몰입도가 좋고 재밌다. 지극히 일상적인 소재로 거대한, 범세계적인 담론을 펼칠 수 있게 하는 감독의 탁월한 연출력도 마음에 든다. 물론 이슬람 문화, 특히 현대 이란에서 통용되는 종교적 통념을 미리 찾아보고 감상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가족의 존속 여부, 가정교육, 젠더 갈등, 이슬람 문화, 종교에 구속된 인간, 심리 변화, 진실과 거짓을 다루는 태도 등 이 영화가 담아내고 포착한 것들은 한 가정의 문제뿐만이 아니라 이란 사회, 이슬람 문화권, 더 나아가 전 세계에 통용될 수 있는 공감대를 형성한다. 세계 공용어로 영화를 채택할 수 있다면 이 작품이 반드시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기생충, 2019>이 자본주의 사회 구조에서 촉발되는 것으로부터 인간 본성과 사회의 관계에 주목하여 범세계적인 공감대를 이끌었다면 이 작품은 그것과는 조금 다르게 가정이라는 가장 작은 사회적 단위부터 파헤치기 시작하여 초월적 존재와 얽힌 종교까지 건드리면서 상당히 풍부한 차원으로 이야기를 서술해낸다. 인간이 향유하는 모든 것들과 문화, 생활양식, 가치관 등 건드리지 않는 부분이 없을 정도로 폭넓은 감상의 바다로 인도해 준다.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

<카메라를 든 사나이> (지가 베르토프, 1929)


소련의 영화감독 지가 베르토프의 다큐멘터리 영화이다. 감상자는 이 작품을 통해 숏들의 조합으로 만들어지는 일종의 서사적 흐름을 느낄 수 있다. 감독은 평범한 시민들의 삶을 포착하려 한다. 영화엔 노동의 현장, 퇴근 후의 여가와 휴식 등 일상의 장면들이 다양하게 담겼다. 인간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구도나 관점을 반영한 '카메라의 눈'으로 담아낸 일상적 이미지들을 재구성하여, 영화적 리듬이나 이야기의 소재를 만들어 내는 점이 이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이자 매력이다. 유심히 작품을 보고 나면, 영화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다는 이 작품의 영향력이 그냥 너무나도 잘 느껴진다. 난 비록 영화학도가 아니지만 느낄 수 있었다. 다양한 숏에 담긴 운동성이나 방향성, 이중 인화, 화면 분할과 중첩 등 짚고 넘어갈 포인트가 굉장히 많다.


관련 이론을 심도 있게 공부하고 영화사를 짚어보아야 정확한 논의가 가능하겠지만, 아마도 베르토프는 카메라를 인간보다 더 정확하고 유용한 대상 인식의 주체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이 작품에선 스톱 모션 기법 처리가 된 것처럼 카메라가 혼자 독립된 개체로 움직이는 신이 나온다. 이 장면은 감독의 평소 철학이 많이 반영된 결과물일 것이다.


<카메라를 든 사나이>

<브라이트> (데이비드 에이어, 2017)


인간, 오크, 엘프 등이 지구에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설정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오크가 자연스럽게 경찰복을 입은 모습을 보면 분명히 영화에 흥미가 생기지 않겠는가? 한편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의문이 남는다. 수많은 선택지 중에서 이 결과물이 최선이었을까? 인간과 비인간 종족이 한데 얽혀 현대 사회 속에서 살아간다는 설정은 상당히 풍부한 이야깃거리를 제공한다. 종족 간 갈등 문제와 사회 이슈를 새로운 시각으로 엮어볼 수도 있고, 판타지 장르의 통념이나 관습을 보기 좋게 비틀어서 신선함을 주입해도 좋지 않은가. <디스트릭트 9>은 이 영화보다 활용 폭이 좁은 요소(외계인과 인간 사이의 갈등만 존재)로 드넓은 담론의 장을 제공하는 재치 넘치는 수작이었다. 반면에, 이 작품은 스스로 이야기의 폭을 제한하며 매력을 잃어버렸다.


영화는 우리에게 익숙한 세상을 무대로 삼아 기묘한 다종족 사회를 표현한다. 주인공은 미국 LA의 경찰들이다. 하나는 인간, 하나는 오크다. 초반부 영화의 전개는 괜찮다. 종족 간의 미묘한 온도 차는 은유적으로 현대 사회의 인종 문제를 떠올리게 한다. <엔드 오브 왓치>를 연출했던 감독의 스타일이 반영된 덕분인지 사실적이고 폭력적인 묘사들도 현장감 넘친다. 하지만, 영화는 사회상 묘사나 풍자에 집중할 생각이 없다. 초중반 이후, 영화의 플롯에 마법봉에 얽힌 판타지적 배경이 녹아들어 가면서 리얼리티 넘치던 사회는 '어둠의 군주'를 막아내야 하는 영웅들의 무대로 바뀐다. 나는 이 선택이 소재로 뽑아낼 수 있는 매력을 다소 제한했다고 생각한다. 판타지 영화를 만들 생각이었다면 굳이 초중반부의 캐릭터 간의 관계 형성이나 배경 제시를 현실감 있는 방식으로 풀어냈어야 했나? 접근을 다양하게 할 수 있는 소재인 탓에, 감독이 욕심이 너무 많은 게 아니었나 싶다. 좋은 재료로 만든 것치고는 기대 이하의 결과물이라 상당히 아쉽다.


<브라이트>

<몽상가들>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2003)


이사벨(에바 그린 분)이 자신을 장 뤽 고다르가 1959년에 연출한 <네 멋대로 해라> 속 패트리샤(진 세버그 분)와 동일시한 채로 대사를 따라하는 모습이 나온다. 이사벨은 현실에서 늘 영화를 갈망한다. 틈만 나면 영화 속 장면을 현실로 소환한다. 그녀에게는 영화가 곧 현실이다. 이사벨과 테오(루이 가렐 분)가 매튜(마이클 피트 분)에게 <국외자들, 1964> 속 등장인물들이 루브르 박물관에서 달리는 장면을 따라 해 보자고 말한다. 매튜는 처음엔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며' 거절하지만 이내 수락하면서 셋은 영화를 현실로 불러내 현실을 지워내고 그 자리에 그들만의 현실을 다시 구축함으로써 더욱 관계가 돈독해진다. 그렇게 매튜가 남매의 세계에 녹아들어 가고, 남매도 매튜에게 영향을 받기도 한다.


그렇지만 셋은 영원할 수 없다. 혁명(운동)의 인파 속에서 매튜가 그녀를 현실로 되돌려놓으려 하지만, 그녀는 마지막 순간에 끝내 제안을 거부한다. 매튜가 보기엔 이사벨과 테오는 단순한 남매가 사이가 아니다. 사회적 통념 하에서 그들은 현실과 동떨어진 사람들 취급을 받는다. 영화라는 매개체로 유대감을 형성한 그들은 끝내 어우러질 수가 없었다. 매튜와 남매가 인식하는 세상은 달라도 너무나 다른 것이었고, 이는 당시 프랑스의 68혁명(운동) 속 젊은이들의 대립되는 입장을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한편, 셋의 관계는 3자 대립일 수도 있고 2자 대립으로 볼 수도 있는데, 이는 다양한 관점에서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테오가 급진적인 입장이라면, 매튜는 신중한 보수적인 측면이 있다. 이사벨이 제일 흥미로운데 중립을 지키는 듯하면서도 나에겐 그녀가 현실을 등지고 회피하려는 사람처럼 보였다.



<몽상가들>

<블러드 심플> (조엘 코엔, 1984)


코엔 형제가 합심하여 만든 첫 장편 영화이다. 형 조엘 코엔이 연출을, 형제가 같이 각본, 제작, 편집을 맡았다. 영화 속엔 짜릿한 쾌감을 절묘하게 형성하는 지점이 많다. 명암 대비, 빛의 조절 등을 활용한 미장센도 상당히 세련됐고 사운드의 활용도 재치 넘친다. 후반부에 시각적으로 인상적인 장면들이 많다. 코엔 형제는 끝없이 엉키고 꼬이는 상황을 정리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 크레딧이 올라갈 때 극을 지배하던 긴장감은 알 수 없는 공허로 가득 차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블러드 심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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