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1.22-2021.01.28
언제나 변칙적인 생동감을 발산하는 사프디 사단(사프디 형제+로날드 브론스타인의 3인 체제)의 진정한 출발점이라 할 수 있겠다. 사프디의 영화에선 낯선 타자와의 만남을 통해 피어나는 양상이 많이 포착된다. 이들이 영화 속 인물에게 부여한 뉴욕이 비극적이고 폐쇄적인 공간이라는 전제 덕분에, 이 만남은 영화를 지탱하는 주요한 요소로 자리 잡는다. 결과보단 과정에 집중한다는 상투적인 표현이라 할 수 있겠다. 어차피 뜻대로 안 풀릴 인생이라면 그 흐름에 몸을 맡기다가 문득 잡히는 의외성을 통해서 잠시 기분 전환을 할 수 있다는 자체로 의미가 충분하지 않을까.
이 작품을 보고 나서야 사프디 형제의 영화가 조금씩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다. 원래도 만족스러웠지만 그 이유를 명확히 짚어내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젠 어느 정도 감이 잡힌다. 그래서 난 사프디 형제 특유의 형식적 스타일의 반복과 변주가 반영된 <헤븐 노우즈 왓>, <굿타임>, <언컷 젬스>를 떠올린다. 이 영화 속 인물들은 모두 비극적 결말에 처해지는 초라한 존재들이지만, 사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인물 중심의 서사에서 비롯되는 테마 요소와 관련한 담론보다도 그들이 부유하고 방랑하며 겪는 사소한 순간들을 그냥 지나칠 수 없다는 데에 있을 것이다.
능청스럽게 허구적 요소를 끼워 넣는 일종의 초현실주의적인 작법은 이 작품뿐만 아니라 언제나 그들 영화에서 반복되지만 그런 연출을 시도하는 자체만으로도 워낙 매력이 넘친다. 과도한 클로즈업이 공간 정보를 제한하여 관객의 수용도를 다변화시키는 지점 역시 고민해 볼 만한데, 이들의 클로즈업 자체가 섬세한 내면 묘사에 목적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래서 더 흥미롭다.
사설 탐정 플레처(휴 그랜트)를 가이 리치 본인을 투영한 존재로도 볼 수 있겠다. 영화 속의 이야기꾼이 시나리오를 통해 입담을 늘어놓는다. 일종의 영화 속 영화라는 액자 구조가 재치 있게 전개되는 점이 인상적이다. 도입부에 흘린 복선이 회수될 때의 파급력이 약하고 개연적 문제들이 곳곳에 산재해 있다. 그래도 이 영화에선 숱한 단점들을 잠시 묻어두고, 가이 리치만의 독특한 스토리텔링 체계를 뜯어낼 때 비집고 나오는 단편적인 쾌감에만 집중하는 편이 적어도 작품을 즐기기엔 훨씬 좋아 보인다.
<운디네>, <트랜짓>에 매료된 이후, 베를린파 1세대라 불리는 펫졸드의 연출작을 나름 파헤쳐 보기로 마음먹었다. 이 영화에선 국가와 개인 간의 사회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 사회 구조적인 폭로보다는 개인의 정서를 섬세하게 담아내는 시도가 돋보인다. 몇몇의 패닝 쇼트를 제외하면, 카메라는 고정된 채로 기교를 최소화하여 피사체를 담는다. 묘하게 프레임 내부에 여백이 느껴지는 순간이 많았는데, 쇼트의 사이즈와 상관없이 피사체의 움직임과 그를 둘러싼 여백과 촬영 구도가 만들어내는 일종의 운동감이 있다고 느꼈다. 이는 <트랜짓>의 마리의 움직임이나 <운디네>의 몇몇 클로즈업 쇼트 등에서도 역시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일상에 스며든 리얼리즘 요소가 산재해 있고, 관조적인 시선으로 미세한 정서 변화를 포착하려는 정적인 영화지만, 앞서 언급한 묘한 리듬감이 영화의 텐션을 꾸며내는 듯하다. 이 영화는 또한 조명과 자연광의 활용이 좋았다. 절제될 때도 있고 색감에 따라 서사적인 의미가 달라지는 구간도 있었다.
장르의 질감이 진하게 묻어 있음에도 감독 특유의 접근법이 빛나는 영화다. <글로리아>(1980)를 떠올려 보면 확실히 이 작품은 형용할 수 없는 매혹성을 품고 있다. 장르의 관습을 벗어나려 스타일을 부각하는 건지 스타일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장르의 문법을 슬쩍 빌려온 건지는 모르겠다. 어느 쪽이든 그 묘한 외양이 이 영화를 몇몇의 키워드로 정리될 수 없게 만든다. 영화의 스토리 자체도 수렁으로 빠져드는 인물의 비극적인 운명을 환기하는 데에는 크게 관심이 없어 보인다. 삶의 표면과 심연을 넘나드는 듯한 이미지와 조명의 잔상들, 모순과 우연으로 가득한 삶의 단면들 따위가 흩뿌려진다. 카사베츠의 다른 영화가 그렇듯 이 영화 속 주인공은 구상된 이야기 속에서 기능적인 역할에 머무르는 존재가 아닌, 그 자체로 이야기의 미완된 부분을 만들어가는 주체로 자리한다. 비텔리가 중국인을 죽이러 가다가 갑자기 전화 부스로 들어가 쇼가 잘 진행되는지 확인하는 신, 대기실에서 연설 마냥 자신의 철학을 늘어놓는 신이 기억에 남는다.
평면적인 인물 구성과 지나치게 단선적인 서사 전개로 인해 영화에 몰입하기 어려웠지만, 뚜렷한 생동감을 뿜어내는 요소들이 장르적 쾌감을 만들어내는 점은 좋았다. 국가적인 차원의 개입이 전제된 다소 의뭉스러운 영화적 무드가 배우들의 에너지, 적재적소에 배치된 음악, 사실적인 항공 액션 신 등의 매력에 희석되는 느낌이다. 주연 배우의 존재감이 특히나 돋보이는 영화라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사운드 디자인 등을 고려하면 극장에서 봐야 할 영화지만 그러지 못해 아쉽다.
사진 출처
- 네이버 영화
- IMDb
부족한 글이지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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