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2.12-2021.02.18
왜 이 영화가 좋았냐고 물으면 대답하기 힘들다. 솔직히 자의식 과잉에 가까운 현란한 스타일이 허세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는 데 어느 정도 동의하지만, 어쩐지 이 영화에선 그 과한 지점들 마저도 그럴 수밖에 없었을 거라 여기며 긍정하고 싶다. 왕가위는 내레이션과 촬영, 음악 등으로 인물들의 내면을 서술하지만 정작 나는 그들의 감정선에 자연스레 이입되지는 않았다. 이건 마치 내가 인물에게 감정을 이입하는 감상보다는 내게 전이된 감정을 능동적으로 재구성하는 시도와 맞닿아 있다. 어차피 내가 공감하기 힘든 자들의 이야기라면 내게 전이된 날 것의 덩어리들을 곱씹어 보는 재미가 있기 때문에, 그래서 이 영화가 마음에 든다.
현재를 살아가는 인물들을 지탱하는 건, 적어도 왕가위의 영화에서는 과거의 기억들이 아닐까. 인간은 기억에 얽매여 흔적만 남은 행복을 추억하기도 하고, 떨쳐낼 수 없는 고뇌에 매몰되기도 한다. 어떻게 보면 차우(양조위)는 곧 왕가위 본인이다. 수리첸(공리)을 향한 차우의 질문은 사실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차우가 만나는 여자들은 모두 차우의 자아 일부를 어느 정도 투영한 존재처럼 보이기도 한다. 차우는 소설 속 인물에 자신을 대입해서 살아오면서 깨닫지 못한 것들을 헤아리기 위해 몸부림친다. '사랑과 기억 그리고 시간'은 왕가위의 영화를 집약하는 테마들이다. 그래서 현재에 몸담은 차우가 미래 배경의 소설을 통해 과거를 돌아보는 이야기에 여러 남녀의 사연이 얽힌 영화의 서사는 의식의 흐름 따라 써 내려간 시나리오에 기반했다기보다는 감독 본인이 구축한 세계관에 대한 끈질긴 애착이 반영된 결과물처럼 보인다.
P.S. 아무 생각 없이 일정에 맞춰 영화를 봤는데 <아비정전>, <중경삼림>을 보기 전에 이 영화를 먼저 관람해버렸다. 조금만 찾아보고 예매할걸...<동사서독>과 <열혈남아>도 보아야 한다. <중경삼림>을 극장에서 보고 싶었는데, 죄다 매진이다. 슬프다.
영화는 시종 가볍고 경쾌하다. 한국 현대 정치사의 흐름에서 포착되는 치부들을 날카롭게 파헤치면서도 끝까지 경쾌한 무드는 잃지 않겠다는 고집인가. 그런 점에서 보면 다소 과해 보이는 이 영화의 친절한(?) 내레이션도 역시 관객의 정서적 몰입을 은근슬쩍 제한하려는 설계로 보인다. 눈에 띄는 스타일은 영화를 더욱 영화스럽게 가공하기 바쁜데, 정작 영화 속 인물들은 실제 역사를 관통하는 산증인처럼 보인다. 이런 괴리감은 관객을 자연스레 현실과 영화의 경계를 넘나드는 블랙코미디로 이끈다. 매력적인 구간들이 종종 기억난다. 데칼코마니처럼 연출한 오프닝 타이틀 시퀀스도 그렇고, 현실에선 이미 결정된 역사인 대통령 선거 결과가 용한 무당을 찾아가는 인물과 연결되는 묘한 장면들 말이다. 분명 여기까진 좋다.
하지만 후반부의 매력이 떨어진다. 앞서 말한 괴리감이 영화를 정의한다면, 이 영화는 흡인력 있는 교훈을 내포한 서사의 완결을 목표로 둔 작품이 아닐 확률이 크다. 하지만 이 영화는 머금고 있던 신랄한 풍자를 슬쩍 뱉어내고 인물을 일부러 입체적으로 보이게(박태수의 급격한 변화) 만들고, 다소 진부한 서사적 메시지를 지향하는 듯한 태도로 돌변한다. 소격효과를 노린 엔딩의 내레이션이 그래서 와닿지 않는다. 그러니까 박태수가 관객에게 당신이 결정하는 거라며 바통을 넘긴다는 건, 그 괴리감을 영화 내내 저글링 하다가 결국 관객의 현실에 개입하여 영화가 다뤄온 풍자적 요소들을 곱씹어 보게 하려는 결정타와 같은 시도이다. 그런데 후반부의 전개는 오히려 그 효과가 충분히 유발될 가능성을 다소 제한하지 않았나 싶다.
카메라는 타이트하게 인물을 프레임에 가두는 대신, 주변부까지 담아내며 인물이 처한 상황과 배경을 지속적으로 환기한다. 한편 서사 진행에 있어 조금은 부자연스러운 지점들이 있다. 로나가 어디론가 이동하는 모습을 담은 쇼트들, 인물의 감정이 급변하는 듯한 구간이나 인물의 죽음을 일부러 드러내지 않고 간접적인 후속 정보로 인지하게 하는 상황이 그렇다. 관습적인 감상을 제한하는 다르덴 형제의 의도된 편집이 아닐까. 이 점이 영화를 뛰어나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서사를 해체하는 시도엔 현실을 들여다보려는 욕망이 반영되어 있지 않을까 싶다.
로나의 말을 들어줄 사람은 없었고, 그녀는 침묵하다가 도피를 선택했다. 모순 덩어리 인간은 자신의 모순을 발견한 뒤 스스로를 향해 징벌하고, 동시에 구원하려 한다. 영화는 이 인간에 대한 훈계를 유보한다. 죄를 지은 인간이 양심의 가책을 느껴 고장난 인간성을 회복하려 몸부림친다. 하지만 세상과 분리된 채 창문이 닫혀버린 어두운 오두막에서 맹목적으로 희망을 논할 수 있는가? 당장 잠에서 깬 다음날부터 로나가 어떻게 삶을 헤쳐나갈지 가늠이 잘 가지 않는다.
사진 출처
- 네이버 영화
- IMDb
- https://mania.kr/g2/bbs/board.php?bo_table=freetalk&wr_id=4682815
부족한 글이지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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