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영화

2021.03.05-2021.03.11

by 드플레

<중경삼림 리마스터링(重慶森林: Chunking Express)> (왕가위, 1994)


왕가위의 영화에서 시간은 속절없이 흐르다가도 필름 위에 머물거나 멈춰 있으려 하고, 그의 영화에서 공간은 많은 변화를 겪지만 한편으로는 늘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 듯 보인다. 왕가위는 가장 개인적이면서도 너무나 당당한 방식으로 영화적 시공간을, 자신만의 세계를 정의하는 법을 알고 있다. 이 영화의 매력은 바로 거기에 있다.


첫 번째 에피소드의 활력은 자신을 꽁꽁 싸매는 자와 자신의 모든 걸 드러내려는 자의 만남에서 피어난다. 223은 사랑을, 아니 사랑했던 시간을 떨쳐낼 수 없다. 마약 밀매상은 흔적만 남은 과거를 떨쳐내지 못하고 숨기고만 있다. 223과 마약 밀매상의 만남은 서로에게 알게 모르게 영향을 끼친다. 두 번째 에피소드는 떠날 수 없는 자와 떠나고 싶은 자의 만남을 통해 텐션을 만들어낸다. 페이는 663의 공간을 자신만의 캘리포니아로 만들고 싶어 하는데, 663은 그걸 알아차리지 못한다. 마침내 663이 집의 변화를 눈치채는 과정은 곧 페이가 그의 마음속을 비집고 들어가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페이는 663의 제안을 거절하고 캘리포니아로 떠난다. 두 사람의 캘리포니아는 매번 각자에게 다르게 정의되면서 엇갈림만을 유발한다. 마침내 두 사람이 조우하는 그 식당에서 영화가 끝난다는 점에선 이 영화가 공간을 얼마나 세심하게 다루는지 엿볼 수 있다. 이 영화가 품은 다층적 매력은 몇 마디 코멘트로는 온전히 담아낼 수 없다.


<타락천사>는 이 영화 속 에피소드의 일부처럼 보인다(실제로 원래 기획으로는 두 편의 작품이 하나였다고 들었다). 왕가위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저마다 상처를 안고 있다. 그들에게선 고독과 상실, 고뇌와 무력감 등이 어지럽게 얽혀 있는 청춘들의 고단함이 묻어난다. 왕가위는 낯선 이들과의 만남과 스쳐가는 인연들의 관계를 통해 완전한 회복은 아니더라도 찰나의 휴식과 희미한 낭만을 얻고자 하는 인물들의 모습을 긍정하려고 한다. 그 지점이 바로 내게 와닿는 왕가위 영화의 매력이고, 그게 바로 내가 <중경삼림>과 <타락천사>를 좋아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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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경삼림(重慶森林)>



<샌 안드레아스(San Andreas)> (브래드 페이튼, 2015)


영화는 러닝 타임 내내 롱 쇼트에 대지진의 압도적인 스케일과 실감 나는 현장감만을 담으려고 한다. 게다가 이 영화는 재난을 서사적 소재로 영리하게 사용하지도 않는다. 이 영화의 대지진은 그냥 전시품일 뿐이다. 오프닝 시퀀스를 떠올리면, 극한 상황에 처한 사람을 구조하는 과정마저도 경쾌한 음악과 스릴 요소를 뒤섞어 공산품처럼 묘사했다는 것에서 영화의 태도를 예측할 수 있다. 중심인물에 의해 어떻게든 전개되는 확정적 구원 서사가 목표로 하는 지점이 재난에 대처하는 각 계층/집단의 상이한 양상을 동반하는 다층적 묘사보다 분열된 가족의 재결합이라는 진부한 휴머니즘에 치우쳐져 있다는 점도 영화의 매력을 반감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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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 안드레아스(San Andreas)>



<고질라: 킹 오브 몬스터(Godzilla: King of the Monsters)> (마이클 도허티, 2019)


색채감 넘치는 조명 등으로 극의 톤을 마냥 무겁지만은 않게 하려고 하나, 인간들은 쓸데없이 비장하고 괴수들의 박진감 넘치는 전투 신은 몰입할 즈음 툭툭 끊겨서 어느 요소 하나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 전작 <고질라>(2014)처럼 의도된 연출 하에 괴수를 장르적으로 어떻게 활용할지에 관한 고뇌의 흔적이라도 보이면 좋은데, 그마저도 이 영화에선 찾을 수 없다. 작위적이다 못해 억지를 부리는 듯한, 무리하게 포진해 있는 서사적 설정들은 아무리 상업영화적 성격의 작품임을 감안해도 너무나 가혹하게 다가온다. 초거대 괴수들의 웅장함을 프레임 가득 채우려는 시도는 좋지만, 영화 자체는 방향을 정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휘둘리다가 형형색색의 눈요기로만 소비되고 만다. 물론 그 눈요기 자체에서 오는 쾌감은 부정하진 않겠다. 개인적으로는 노란빛 천둥번개를 동반하는 기도라를 푸른 색감의 고질라와 대비해 묘사하는 순간들이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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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질라: 킹 오브 몬스터(Godzilla: King of the Monsters)>



<피닉스(Pheonix)> (크리스티안 펫졸드, 2014)


매번 느끼지만 펫졸드는 공간의 여백을 활용하는 데에는 완전 도가 튼 감독이다. 카메라 무빙도 절제하고, 음악도 절대 과하지 않게 적재적소에만 쓰는데 이상하게 현란한 형식미를 동원하는 연출 마냥 기묘한 텐션이나 모호한 긴장감이 피어난다. 어떻게 매 작품마다 이렇게나 매력적인 미장센과 촬영 구도 등을 변주해서 녹여내는 걸까. 고정된 프레임 내부를 유영하는 피사체들의 유려한 움직임, 매혹적인 뒷모습을 포착하는 시선 또한 펫졸드 영화만의 특색이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도 매력이 넘친다. 정적인 영화인데도 지루하지 않아서 너무 좋다. 앞서 말했듯 여백을 놓치지 않는 펫졸드는 역시나 인상적인 엔딩 쇼트를 만들어냈다. 니나 호스의 연기가 너무 탁월해서 감탄했던 순간이 많았다. 파울라 베어가 연기한 <트랜짓>의 마리보다도 더욱 유령 혹은 망령 같은 모호한 느낌을 준다.


P.S. DVD에 한글 자막이 지원되지 않아, 가뜩이나 많은 독일어 대사들을 영어 자막으로 읽느라 고생을 했다. 심지어 영어 대사 부분은 자막이 없어 귀를 쫑긋 세우고 듣느라 힘들었다... 영화 배경이 배경인지라 불어가 안 나와서 다행... 제발 추후 극장 개봉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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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닉스(Pheonix)>



<영향 아래 있는 여자(A Woman Under The Influence)> (존 카사베츠, 1974)


영화는 메이블(지나 롤랜즈)의 신경 쇠약 증상을 일으킨 원인에 관심이 없다. 의도적으로 설명을 피하는 듯 보이기도 한다. 카사베츠의 카메라는 늘 표면만을 담는데, 이 영화에서도 역시 메이블의 기행으로 빚어낸 파국의 피상적인 순간들만을 나열하고 응시한다. 관객은 지나 롤랜즈의 퍼포먼스에 압도당하며 불안정한 파열음이 여기저기서 터지는 혼란스러운 광경을 그대로 받아내야만 한다. 카사베츠는 메이블과 닉(피터 포크) 그리고 그들의 아이들이 처한 상황을 그저 특유의 촬영으로 담아내기만 할 뿐이다. 그는 이러한 묘사를 메시지 전달의 수단으로 활용하거나 완결된 서사를 통해 뭔가를 표출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관객은 이 단란한 가정과 평범한 주부의 삶에 균열을 가한 요소가 무엇인지 능동적으로 찾아 나설 기회를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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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향 아래 있는 여자(A Woman Under The Influence)>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IM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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