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영화

2021.02.26-2021.03.04

by 드플레

<미나리(Minari)> (정이삭, 2020)


<미나리>를 지탱하는 요소는 두 가지의 믿음이다. 하나는 모니카(한예리)의 신앙이고 다른 하나는 제이콥(스티븐 연)의 아메리칸 드림이다. 감상적 몰입을 어느 정도 자제(감정 대립이 극에 달한 순간에 문 여는 소리로 주의를 다른 데로 환기하는 연출 등)하면서 두 사람을 응시하던 영화가 전복되는 지점은 모니카의 엄마이자 제이콥의 장모인 순자(윤여정)로부터 출발한다. 영화는 위태롭게 흔들리는 부부 각자의 믿음을 바라보다가 그 믿음이 한데 모여 무너지는 순간까지 담아낸다. 그러고 나서 이 영화는 그 이후, 그러니까 믿음이 무너진 뒤 재건되는 과정을 촘촘하게 제시하지 않고 일부러 생략한다. 오히려 영화가 담아내는 건 갈등이 남긴 상처가 있었냐는 듯 일상으로 돌아간 가족의 모습과 제이콥이 허무맹랑하게 여겼던 것들을 마침내 수용하는 장면이다. 물론 결말부의 흐름을 납득하기엔 무리가 따른다. 서사적으로 불친절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낯선 타국의 땅에서도 쑥쑥 자라있는 미나리를 가끔씩 확인하는 극중 인물들처럼, 감독은 잘 자라고 있는 미나리를 가끔씩 바라보듯 극중 인물들을 응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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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리(Minari)>



<애니 홀(Annie Hall)> (우디 앨런, 1977)


쉬지 않는 입과 재치 있는 연출로 무장한 우디 앨런의 사랑 이야기, 아니 인생철학이 관객에게 전염된다. 어쩌면 한 시간 반짜리 연애 상담처럼 보이기도 한다. 가면을 쓴 채 맘에 없는 말을 늘어놓는 남녀의 속마음이 자막을 통해 관객에게 노출된다. 남자는 끊임없이 영화와 현실의 경계를 허물고 관객을 향해 대사를 친다. 이뿐만인가, 교실 속의 선생님과 알비 사이로 미래의 알비 자신이 능청스럽게 끼어드는 연출이나, 애니의 가족과 알비의 가족이 시공간의 단절을 극복하고 대화를 나누는 장면들도 놓칠 수 없다. 영화적 시공간, 극적 요소들은 내재된 특성을 잃고 스크린 바깥으로 쏟아져 나와 관객에게 가닿는다. 영화와 현실의 경계를 뭉개다 보면 모순에 둘러싸여 요동치는 감정들, 이리저리 휘둘리는 각자의 인생을 찾아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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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 홀(Annie Hall)>



<오프닝 나이트(Opening Night)> (존 카사베츠, 1977)


연극을 영화의 소재로 삼았다는 점에서, 영화와 현실의 간극을 들여다보려는 시도와 맞닿아 있는 작품이다. 당장 떠오르는 작품은 <클로즈 업>(1990)이다. 키아로스타미가 <클로즈 업>에서 보여준 현실과 영화의 관계는 감독의 관점을 반영한 듯 보인다. <클로즈 업>의 영화 속 영화엔 실제 사건 관련자들이 연기를 하고 있지만, <오프닝 나이트> 속 지나 롤랜즈의 연기는 <클로즈 업>의 사례와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고든 역의 지나 롤랜즈는 연극 무대 위 배우로서 현실과 허구를 직접 넘나드는 모호한 경계 그 자체를 연극 무대의 관객과 현실의 관객 모두에게 각기 다른 형태로 전이시킨다. 고든은 희곡의 대사를 마음대로 바꿔서 현실의 자신을 버지니아라는 배역과 충돌하게 만든다. 허구의 연극은 연극배우들의 즉흥적인 연기와 예측 불가한 대사들로 현실과 마주한다.


불안하게 떠도는 영혼들의 표면을 카메라에 담는 카사베츠는 이 영화에서도 역시 흔들리는 인물을 담아낸다. 누가 뭐래도 나만의 길을 가겠다는 그의 고집스러운 면이 좋다. 존 카사베츠는 누구도 신경 쓰지 않고 자신만의 영화를 만든다. 그의 영화엔 어지럽게 부유하는 삶의 표면만을 잠시 머금으려는 시도가 있다. 무심한 듯 구멍 나 있는 서사나, 유동하는 움직임만을 포착하는 클로즈업 역시도 카사베츠의 뚜렷한 목적에 따라 기능한다. 생각해 보면 즉흥적으로 연출했다는 <그림자들>(1959)에서 카사베츠는 박물관 내 조각 공원 신의 쇼트 배열에 꽤나 신경 쓴 흔적을 드러냈다. 그렇다면 그는 통제의 영역이 아닌 즉흥성조차도 자신의 세계로 편입시킬 방법을 알고 있는 진정한 천재가 아닐까. 이것은 즉흥성을 예술로 승화시켜 포장하려는 기만인가? 그렇게 따지면 특정 의도 하에 영화를 찍는 작업은 모두 기만행위다. 영화는 현실이 아니고 현실을 재현하는 척하려는 속임수에 불과하다. 카메라가 현실을 담아낼 수는 있지만 영화는 현실 그 자체와 동치가 아니다. 그래서 카사베츠가 그의 영화를 통해 의도적으로 생성하는 즉흥적 순간들을 긍정하고 싶다. 카사베츠의 영화 문법은 현실의 재현을 목표로 삼기 위해 고안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이해한 세계를 자신이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언어로 묘사하는 지나치게 솔직한 사람이다. 그래서 그의 영화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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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프닝 나이트(Opening Night)>



<아들(Le Fils)> (장 피에르 다르덴, 뤽 다르덴, 2002)


감히 파고들 수 없다면 그저 바라보기만이라도 하겠다는 일관된 태도가 마음에 든다. 인물을 대상으로 한 클로즈업은 사실 그 자체로 얼굴을 통한 내면 묘사에 효과적이다. 이때 쇼트를 끊어가며 나열하지 않는 대신 롱테이크로 이어가는 방식을 곁들인다면, 클로즈업 촬영이 서사적 측면에서 감정의 증폭뿐만 아니라 날 것 그대로의 현실감을 묘사하는 등의 다층적인 매력을 뿜어낼 수 있다. 그래서 <언노운 걸>, <소년 아메드>와 같은 근작보다는 <로제타>, <아들>과 같은 작품이 내 흥미를 돋운다. <아들> 역시 그들의 대다수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음악이 배제된 영화지만 역설적으로 음향의 활용이 뛰어난 영화이다. 목공소의 장비가 돌아가는 소음이 극의 분위기를 자연스레 뒷받침하는 인상을 받았다. 배우의 호연 역시 영화를 더욱 훌륭하게 가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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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Le Fils)>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IMDb


부족한 글이지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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