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유기된 자의 분투기
1980년대 초만 해도 인천 장수동은 넓게 펼쳐진 벌판과 숲의 사이사이 집 몇 채씩이 모여 있는, 벽촌 느낌의 동네였다.
정거장에서 집까지 10여 분을 걸어야 했는데, 그 길의 한편은 모두 곧바로 숲과 연결되었다.
드물게 서 있는 가로등은 곳곳을 밝히지 못했다.
의상실 시다가 되어 처음 맞는 12월의 월급날이었다.
가방 하나가 없어 월급봉투를 바지 주머니에 넣고 퇴근했다.
내릴 정거장이 가까워져 버스 뒷문 앞에 섰다.
뒤쪽에 앉아 있던 군복 입은 아저씨가 비칠 비칠 걸어 나와 내 옆에 섰다.
훅 끼치는 술 냄새.
내리는 사람은 나와 그 아저씨, 둘 뿐이었다.
어쩐지 겁이 나서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빠르게 걸었다.
밤 11시가 넘은 어두운 길에도 다른 이는 없었다.
땅바닥을 쓸면서 빠르게 걷는 발자국 소리가 계속 따라왔다.
뛰다시피 걸었지만 곧, 뒤에서 덮친 놈의 팔에 상체가 꼼짝없이 붙들렸다.
끌려가지 않으려 버텼지만 소용없었다.
“아저씨, 놔주세요. 집에 동생 혼자 있어요. 가야 돼요.”
놈은 말없이, 바둥거리는 내 몸을 억세게 잡아끌고 길에 면한 숲으로 올라갔다.
얼마 오르지 않아 놈은 나를 바닥에 내던지며 비로소 입을 열었다.
“너, 남자랑 살 섞어 봤냐? 재밌어.”
놈이 당시 나로서는 정확한 뜻을 알 수 없는 말을 지껄이는 그 다급한 순간에 문득 월급봉투 생각이 났다.
한 손으로 놈을 밀어내려 애쓰며 다른 손으로 바지 주머니를 더듬었다.
없었다.
“아저씨! 월급봉투가 없어요! 오늘 월급 받았는데... 없으면 안 되는데...”
그 순간,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놈이 멈췄다.
“돈? 어디 있었는데? 잘 찾아봐.”
놈이 몸을 일으켜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순간, ‘지금이다’라는 생각이 퍼뜩 스쳤다.
뛰었다.
어디가 집으로 향하는 길인지도 모른 채 내리막길을 따라 그냥 뛰었다.
돈봉투를 찾는지 놈은 따라오지 않았다.
미친 듯 펄떡이는 심장으로 집에 뛰어들었다.
동생은 자고 있었다.
놈이 쫓아올까 무섭고, 잃어버린 월급봉투가 걱정되어 잠들 수가 없었다.
밖이 환해지는 기운을 느끼고 마당으로 나왔지만,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놈이 안 가고 있으면 어떡하지. 밤새 거기 있었으면 얼어 죽었을지도 몰라. 안 죽고 여태 있으면 어떡하지.’
심장도 다리도 와들와들 떨렸지만 봉투를 찾아야 했다.
그 돈이 없으면 동생과 나는 또다시 굶어야 했다.
짐작으로, 놈에게 끌려간 길을 되짚었다.
놈이 나를 내던진 곳이 여기쯤 아닐까 싶었을 때, 바닥에 흰 봉투가 보였다.
월급봉투였다.
봉투를 주머니에 넣고 달려 내려올 때 비로소 눈물이 났다.
열네 살이었다.
성장기에 굶기를 반복해 키가 작고 말라 있었다.
누가 봐도 ‘애’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여자애를 성폭행하려는 놈이 있는 밤길.
그렇지 않아도 이미 무서운 세상에 불쑥 칼날이 튀어나와 한순간 온몸을 찔러댈 듯한 시퍼런 공포가 스몄다.
살아 있는 모든 순간이 미치게 무서웠다.
의상실 바닥 곳곳에 뒹구는, 고양이가 먹다 남긴 쥐의 머리를 치우는 일로 시작하는 하루, 여자아이들로 발 디딜 틈 없이 꽉 찬 부속품 가게에서 사야 할 물건을 고래고래 외쳐야 하는 일상, 언니들이 아무리 친절해도 나는 관심이 안 생기는 옷 만드는 일, 언제 쏟아질지 모르는 오빠의 매, 성폭행범이 튀어나오는 밤길... 오늘도 내일도 내년에도 후년에도...
죽어야 했다.
달리는 차에 뛰어들어 죽을 용기는 없어, 마침 받은 월급으로 수십 군데 약국을 돌아 수면제를 모았다.
엄마 심부름이라고 거짓말을 하면서.
『자살론』의 저자 에밀 뒤르켐은 자살이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사회적 현상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개인과 사회의 통합 정도를 기준으로 자살을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누었다.
첫째, 이기적 자살. 가족 또는 공동체와의 유대가 약해져 개인은 고립된 채 삶의 의미를 자기 자신에게서만 찾아야 한다. 그러나 아무리 해도 그 의미를 찾을 수 없을 때 자살을 택한다.
둘째, 이타적 자살. 개인이 집단을 지나치게 중요하게 여겨 집단의 가치나 목표를 위해 스스로 목숨을 버린다.
셋째, 아노미적 자살. 심각한 경제 위기나 급격한 변화로 기존의 사회 질서가 무너질 때 개인이 삶의 방향을 잃고 극심한 혼란에 빠지면 극단적 선택을 한다.
세상이 너무나 공포스러운데 피할 곳이 어디에도 없을 뿐 아니라 그 공포가 끝나리라는 희망조차 없어 택하는 자살은 뒤르켐의 관점에서 어느 유형에 속할까.
첫 번째에 가까울까.
분명, 학문은 세상과 인간과 삶에 대한 이해를 돕기도 한다.
그러나 그 정교한 ‘분류의 체계’는 개개인이 처한 삶의 고통을 이해하거나 해결하는 데에는 별반 도움이 되지 못한다.
세상의 질서를 만드는 일이 일면 학문의 일이긴 하지만, 살아감은 늘 그 질서에 앞서거나 질서를 벗어나기 때문인 듯하다.
그걸 알면서도 나는 왜 자꾸 책을 보는지...
아마도 어떻게든, 살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