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유기된 자의 분투기
수십 군데 약국을 돌며 사 모은 수면제들을 삼키고 잠자리에 드는 일을 두 차례 반복했다. 두 차례 모두, 출근 시간이 돼도 깨지 않는 나를 보고 놀란 동생이 오빠에게 연락하여 실패로 끝났다. 응급실에서 정신이 돌아오면 다시 또 살아야 한다는 현실이 끔찍했다. 약을 먹고 한데서 잠들지 않는 한 성사될 수 없는 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약을 살 수 있는 월급날이 돌아오기 전 어느 새벽, 경찰서에서 연락이 왔다. 오빠가 교통사고로 병원 응급실에 있다는 것이었다. 현실로 느껴지지 않았다. 무얼 어찌해야 할지, 이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전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병원으로 달려가니 오빠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만신창이가 되어 응급실 침대에 누워 있었다. 두 다리, 특히 발가락 부분의 뼈가 심하게 으스러졌다고 했다. 간밤에 실려 왔지만 밤에는 인턴만 있어 수술을 못한 채 의사의 출근을 기다리고 있었다.
성인 보호자가 있었다면 다른 병원을 수소문해 밤사이 수술을 받았을 수도 있었으리라. 지체된 수술로 오빠는 남은 생을 발가락이 구부러진 채 조금씩 다리를 절며 살게 되었다. 수술 후 오빠는 두 다리와 오른쪽 팔에 깁스를 한 채 입원했다. 나는 몇 달을 병원에서 먹고 잤다. 동생은 오빠의 친구 집에서 지냈다.
팔다리를 쓸 수 없는 환자를 돌보는 일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의상실에 출근하지 않아도 되고, 끼니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퇴근길 성폭행범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병원 생활이 나는 편했다. 더욱이 같은 병실에 있는 환자와 보호자 들은 물론이고 간호사들까지 우리를 챙겼다.
‘남’이 이처럼 타인을 배려할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모처럼의 보호와 안전 속에서 학생 환자들에게 책을 빌려 읽었다. 그렇게 시간이 멈추기를 바랐다. 하지만 오빠는 퇴원을 하고 나는 의상실로 돌아가야 하는 때가 왔다. 나는 한없이 무섭고, 도무지 내일이 보이지 않는 날들로 돌아갈 수 없었다.
오빠의 퇴원 전날, 다시 약을 먹었다. 내가 가지 않으면 오빠의 퇴원 시간이 지체되리라 생각했다. 그러니 이번에는 응급실에서 깨어나지 않을 수 있으리라고.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예정된 시간에 퇴원한 오빠는 일찌감치 집에 왔고 다시 나를 응급실로 데려갔다. 그런데 오빠에게 변화가 생겼다.
“의상실이 그렇게 싫어? 학교 다니고 싶어?”
그렇다고 대답했다.
“학교 보내줄게. 장애보상금을 받을 거야. 그 돈이면 너 학교 다닐 수 있어.”
너무나 기뻤다. 6학년 때 담임 선생님께 연락해 급사 자리를 알아봐 달라고 부탁하리라 마음먹었다. 한껏 들떠 웃음이 절로 났다.
그런데, 수년 동안 연락이 끊겼던 아버지가 나타났다. 보험회사에서 미성년자인 우리에게 큰돈을 지급할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회사는 경찰서에 의뢰해 아버지를 찾았고, ‘상황’을 얘기했고, 아버지는 돌아왔다. 그를 돌아오게 만든 ‘상황’이 오빠의 장애가 아니고 ‘돈’이었다는 사실을 그때는 몰랐다. 이제 됐다. 그렇게 생각했다.
나와 달리, 오빠는 돌아온 아버지를 믿지 않았다. 아버지에게 동생들을 꼭 학교에 보내겠다는 다짐을 받아냈다. 얼마 후 우리는 성남시로 이사했다. 초등학교 앞에 새로 차려진 문구점이었다. 문구점 뒤편에 작은 방 하나와 부엌이 있었다. 새어머니는 없었다.
6학년이던 동생은 학교에 다녔다. 하지만 오빠와 나는 여전히 학교에 가지 못한 채 온종일 문구점 일을 했다. 며칠 후 오빠는 아버지에게 왜 나를 학교에 보내지 않냐고 따졌다. 아버지는 문구점 차리느라 돈을 다 써서 여유가 없다고 했다. 그날로 오빠는 집을 나갔다.
나는 상황이 어찌 돌아가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새벽에 일어나 밥을 짓고, 온종일 문구점 일을 했다.
동생이 학교에서 중학교 지원서를 가지고 왔을 때, 아버지는 동생이 아파서 중학교에 갈 수 없다고 회신했다. 실제로 동생은 아팠다. 우리끼리 사는 동안 언제부턴가 배가 아프다고 울던 동생은 수년 동안 결핵성 복막염을 앓고 있었던 것이었다. 동생은 아버지가 나타나서야 병원에 가 진단을 받고 끼니마다 한 움큼의 약을 먹었다. 약을 먹는 내내 초등학교는 다녔으면서 중학교는 갈 수 없다는 설명은 누가 들어도 합당하지 않았다.
동생의 담임 선생님은 아버지를 학교로 오게 했다. 두어 차례 학교에 다녀온 후 아버지는 마지못해 중학교 지원서에 서명했다. 돈이 없다는 말을 남에게 하기 싫어 아프다는 핑계를 댔던 것일까.
하지만 오빠가 받은 장애 보상금이 장사 밑천으로 다 쓰였다 해도, 문구점은 장사가 아주 잘됐다. 자식들에게 냉정한 아버지는 어린 손님들에게 놀라울 만큼 다정했고, 그들과 어울려 놀기도 했다. 등하굣길에 밀려든 학생들로 발 디딜 틈 없는 가게 안에서 소리소리 질러대는 아이들에게 나는 끊임없이 문구를 팔고 아이스크림을 팔고 과자를 팔고 뽑기 놀이를 도왔다.
아버지는 돈이 없는 것이 아니라 자식을 교육시킬 생각이 없었다. 한국전쟁 와중에도 본인은 고등학교를 마쳤던 분이 왜 자식들은 교육시킬 생각이 없었는지 나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동생의 선생님이 그저 맡겨진 업무 처리를 하는 데 그쳤다면, 동생은 끝내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사실은 안다.
오빠가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우리를 살펴 주었던 모든 분들과 동생의 진학을 위해 불편한 일을 감당해 주셨던 동생의 담임 선생님에게 뒤늦은 그리고 전달되지 못할 인사를 올린다. 그분들 덕에 세상은 오로지 무섭고 추운 곳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있었다. 특히 동생의 담임 선생님 덕분에 우리는 3년이라는 시간을 벌어 조금이나마 더 자랄 수 있었다. 이후 3년 동안 오빠와 나는 천천히 성인이 되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