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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잡설

수십 년 만의 만추

뒤늦은 작별

by 세니사

파랗게 펼쳐진 가을 하늘 아래, 주줄이 늘어선 은행나무의 잎들이 노랗고 샛노랗고 푸르다.

노란 잎들 사이사이 이름 모를 가로수의 잎들이 붉고 검붉고 짙푸르다.

온갖 색의 잎들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에 나뭇잎들의 색이 투명해질 듯 맑다.

아름답다. 순전하게.

아름답다...?

일말의 쓸쓸함 없이 순전히...?


대부분의 사람들이 감탄하며 부러 찾는 만추의 단풍이 난 싫다.

사실 낙엽을 보며 아름다움과 동시에 쓸쓸함을 느끼는 심정은 별스러울 게 없다.

하지만 나는 그 정도가 아니다.

이 계절이 되면 집 밖으로 나서기가 두려울 만큼 싫다.

그저 그리되었을 리 없다.

외부 자극에 대한 내면의 반응은 (본능이 아닌 이상) 대체로 역사가 있다.




열여덟 늦봄, 서울 소재 대형 학원에서 고등학교 졸업학력 검정고시 준비를 시작했다.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아침을 짓고, 악다구니를 쓰는 손님들 사이에서 물건을 팔거나 새로 들어온 물건들을 정리하며 종일 서 있어야 했다.

네 시 반쯤 가게를 나서 시 경계를 넘는 버스에 서서 한 시간 반쯤을 이동해 학원에 도착했다.

열 시에 수업을 끝내고 집에 도착하면 자정이 가까웠다.

씻고 복습하고, 한 시 무렵 잠들었다.

다시 다섯 시 기상.


늘 잠이 부족했던 나는 학원 수업 사이사이 쉬는 시간마다 엎드려 잤다.

한 반에 100여 명이 들어앉아 수업을 듣는 교실에서 말이 없을 뿐 아니라 쉬는 시간마다 자는 내게 관심을 갖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한 달이 지났다.

학원 측에서 주야간을 합쳐 천 명에 가까운 학생들을 대상으로 월말고사를 보게 했다.

전체 일등부터 삼등까지는 학원비가 면제된다고 했다.

시험이 끝나고 학원비 면제 대상이 발표된 후부터 말을 거는 사람들이 생겼다.

그렇게 말을 걸어온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커피를 두고 가거나 우유를 두고 가면서 한 마디씩 하더니, 어느 날부터 음료수와 함께 편지를 두고 갔다.

마음을 열게 한 건 그의 친절이 아니었다.

어느 날 그가 두고 간 편지에 쓰여 있던 한 문장이었다.


‘새로움이란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손에 잡히지도 않지만 엄연하고 확실한 것, 네가 그렇다.’


아버지가 반대하는 공부를 기어이 하느라 매일매일 진이 빠졌다.

이 공부를 마치면 학력고사를 볼 수 있으리라는 희망도 없었다.

그런 내게서, 그 사람이 새로움과 가능성을 본다고 ‘썼다’.

나라면 뭐든 할 수 있으니 멈추지 말고 공부하라고 격려했다.

그래서 마음을 열었다.

여름날 시작된 첫사랑이었다.

가을이 깊어지던 11월 어느 날, 그 사람이 사라졌다.

우리 반 반장이었고 주야간 통합 회장이었던 그 사람이 학원에조차 아무 연락이 없었다.

누구도 그 사람과 연락이 닿지 않았다.

언제부턴가 그래왔듯, 그 사람 집으로 편지를 보냈지만 답장은 오지 않았고, 전화를 하면 늘 집에 없었다.

학원에 갈 때, 학원에서 나올 때, 거리를 가득 메운 색의 찬란함과 휘날리는 낙엽이 견디기 힘들었다.

모든 빛깔과 바람이 칼날이 되어 심장을 찌르는 것 같았다.

열두 살 여름, 아버지에게 유기되었던 그때의 고통이 겹쳐 왔다.

새해가 되어서야 같은 반 한 아저씨를 통해 그 사람 소식을 들었다.

알고 보니 그는 입대 전에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전역 후에 공부를 다시 하려니 학력고사 학원의 수업을 따라갈 자신이 없어 검정고시 학원에 다녔고, 학력고사를 잘 마쳐 학원을 중단했고, 원하는 대학에 합격했다는 그런 내용이었다.

나를 포함해, 누구도 몰랐던 사실들이었다.

그럴 수 있다. 차마 말을 못 했을 수 있다.

그러나 어떻게 일언반구 없이 사라질 수 있는가.


3월이 되어 뒤늦은 답장이 왔다.

입학식에, 오리엔테이션에, 수강 신청에... 바빠서 연락을 못 했다고, 미안하다고.

진심으로 미안했을까.

그랬다면 사라지고 넉 달이 지나 편지로 소식을 전했을 리 없다.

그 사람을 다시 보진 않았지만, 묘하게도 만추의 통증은 이후로 날 떠나지 않았다.



그런데 며칠 전 찬란히 물든 가로수 사이를 달리는 차 안에서 수십 년 만에, 색색의 나뭇잎으로 물든 거리가 ‘다만’ 예뻤다.

왜 달라졌지?

내 일상에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다.

아, 다시 생각해 보니, 한 가지 있다. 내가 글을 쓰고 있다. 그제도, 어제도, 오늘도.

이건가...? 잘 모르겠다.

3개월 후면 알까. 서은국 교수가 행복감의 유통 기한이 최장 3개월이라고 했으니.

3개월? 기대해 볼 게 있다니... 재밌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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