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내가 책임질 차례

- 한 유기된 자의 분투기

by 세니사

사람을 무너뜨리는 일은 고통 그 자체보다 삶의 예측 불가능성일 수 있다. 마틴 셀리그만의 학습된 무기력 이론에 따르면 행동과 결과 사이의 연결 고리가 끊어질 때 인간은 깊은 절망에 빠진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는 ‘설명 없는 상실’은 세상의 규칙을 붕괴시킴으로써 삶의 예측 불가능성에 대한 공포와 내가 무엇을 해도 상황을 바꾸거나 나의 안전을 확보할 도리가 없다는 비극적 확신과 지극한 무기력감을 심어준다.(마틴 셀리그먼, 『낙관성 학습』, 물푸레)


목적 없는 대입 준비

다니던 학원에서는 4월에 검정고시 시험이 끝나자마자, 그해에 학력고사를 볼 이들은 바로 학력고사 반에 등록하게 했다. 하지만 난 돈도 의지도 없었다. 사실, 등록할 돈이 없다는 건 핑계였다. 검정고시 준비 기간 동안 담임을 맡았던 선생님의 주선으로, 학원비가 면제되었다는 연락을 받았기 때문이다.

진짜 이유는 의지가 생겨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아버지에 의해 한 번, 첫사랑에 의해 다시 한번, 아무 설명 없이 남겨진 현실이 왜 그렇게까지 아팠는지 그때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공부에 집중할 수 없는 심리 상태가 좀처럼 끝나지 않았다.

내가 학원에 가지 않는 동안 같은 반에서 공부했던 이들이 돌아가며 집으로 찾아왔다. 공부가 정 안 되면, 그저 와서 앉아 있기라도 하라는 끈질긴 설득을 더 이상 밀어내지 못해 정말 가서 앉아 있기만 했다. 그래도, 가서 앉아 있다 보니 조금씩 공부를 하게 되기는 했다. 열정 없이.

그렇게 맥없이 공부한 끝에 본 학력고사 결과는 이름을 들으면 알 만한, 서울 소재 4년제 대학에 갈 만은 했다. 등록금을 지원하겠다는 이도 있었다. 그러나 마음을 정할 수 없었다. 선명한 욕망이 생기지 않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동생이 중학교의 마지막 학년을 보내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아버지는 동생이 학교에서 가져온 고등학교 지원서에 이번에도 서명하지 않았다. 약물 치료를 무사히 마친 동생은 이제 더 이상 아프지 않았다. 아파서 못 보낸다는 핑계를 댈 수 없게 된 아버지는 집에 돈이 없다고 했다. 동생의 이번 담임 선생님은 아버지를 부르지 않았다.

동생은 어떻게 해야 하고, 난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결단

갈팡질팡하는 머리로 가게에 새로 들어온 노트들을 정리하던 어느 날, 선반에 쌓인 노트 뭉치들 사이에 숨겨져 있던 통장을 우연히 발견했다. 아버지 명의의 그 통장에는 6백만 원이 넘는 돈이 들어 있었다. 돈이 없다는 말이 사실일 리 없다고 짐작은 했었지만, 막상 예금 액수를 명확히 확인하는 순간, 내 안에서 단호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가자. 학교를 다니든 못 다니든, 더 이상 아버지와 살 수는 없다.

무엇도 하고 싶지 않은 무력감과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는 혼란 속에서 그 한 가지만이 또렷했다. 그렇게, 그 주 일요일에 인천에 친구들을 만나러 간다고 집을 나와 돌아가지 않았다.

친구 집에서 지내며 인천 주안의 공단을 돌았다. 고졸학력의 공원을 구하는 몇 곳에 이력서를 냈지만, 검정고시 학력은 고졸로 인정해 줄 수 없다며 모두 거절당했다. 검정고시 합격증은 대학 갈 때만 소용 있는 물건이라는 현실을 몰랐던 것이다. 막막했다. 친구 집의 밥을 축내는 날을 하냥 늘릴 수도 없었다.

그즈음 오빠에게 연락이 왔다. 영장이 나왔다는 것이었다. 가벼운 장애이다 보니 면제도 아니고 현역도 아닌, 당시 용어로 ‘방위’ 복무 영장이었다. 복무 기간이 3년쯤 되었던 듯하다. 아버지가 받아줄 리 없었다. 내가 해야 했다.

언니가 마련해 준 월세 보증금으로 인천 송림동 산동네에 단칸방을 구해 오빠와 함께 지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빠 친구가 일하는 작은 전자회사에 공원으로 들어갔다. 학력이 필요 없는 회사였다. 일자리를 구하자마자 아버지 모르게 동생을 데리고 나왔다. 그렇게 셋이 사는 삶으로 돌아왔다. 이번에는 우리가 아버지를 버린 것이었다. 이번에는 내가 오빠와 동생을 책임져야 했다. 최소 3년 동안.

갚아야 했다. 아버지가 소식을 끊었을 때 오빠는 동생들을 때렸을망정 버리지 않았었다. 병들어 죽어가던 동생은 오빠뿐 아니라 나의 매를 받아내야 했었다. 학교에 보내주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오빠는 집을 나가 일하며 번 돈으로 나를 학원에 보냈었다. 앓는 이유도 모른 채 맹장염의 통증을 참고 참으면서. 그 모든 마음의 빚을 갚아야 했다.


확신도 후회도 없이

대학을 포기한 일을 잘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니, 사회생활을 할수록 내 평생 가장 잘못한 선택이었다는 사실을 순간순간 확인해야 했다. 그러나 그것이 잘못된 선택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채로 시간을 되돌려, 똑같은 상황으로 돌아간다 해도 난 같은 선택을 하게 되리라. 착해서가 아니다. 미안해서만도 아니다. 형제간의 우애가 깊어서도 아니다. 함께 고통을 겪은 이들 사이에 생겨난 의리였다.

또한 중고등학교 과정을 공부하며 무언가를 깨우친 내 머리가 그것이 옳은 일이고, 이치에 맞는 일이라고 명확히 말했기 때문이다. 검정고시 자격증이 현실에서 내게 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취업이나 대입 자격을 얻기 위한 통과의례에 지나지 않는 중고등과정의 공부를 하는 동안 나 홀로 발 들인 다른 세상에서, 난 이치를 따지는 머리를 갖게 돼 버렸다.

어쩌면, 이때 의식하지도 못한 채 들어선 ‘과잉 책임’의 길은 마틴 셀리그만이 말한 학습된 무기력에서 벗어나기 위한 나만의 대책이었는지도 모른다. 마냥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는데, 세상이 자꾸 나를 내팽개치니 나를 지키기 위해 차라리 내가 없는 척하면서 철저히 능동적이 되어버리는 모순된 존재 양식.

그래서 만족스럽냐고 묻는다면 모르겠다. 방위 복무 기간 동안 오빠는 야간에 전산훈련원을 다녀 전역 후 소프트웨어 개발자로 일할 수 있었다. 그 기간에 동생은 고등학교 졸업학력 검정고시를 마치고 대입 준비를 하고 전문대에 입학했다. 내가 잃은 것과 형제들이 얻은 것을 저울에 달면 어느 쪽으로 기울어질지 누가 알겠는가.

분명한 것은 중고등과정을 공부하는 동안 내 머리에 굳건히 뿌리내린 의문 하나가 전자회사 공장의 공원이 된 나를 독하게 괴롭히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도 답을 얻지 못한 그 의문은 공부로 시작되어 노동으로 증폭된 셈이다.

작가의 이전글11. 첫사랑